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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 - 이민규교수
  • 1) 우리나라 기독교인 절대다수는 기복신앙에 전염되어 있다. 기독교인 상당수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면 힘든 일을 막아 주시거나 줄여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일이 잘 풀리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반대로 신앙생활을 게을리하면 이러다가 하나님에게 벌을 받는 것은 아니냐고 불안해한다. 이는 100% 틀린 말은 아니다. 맞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반쪽 이하의 진리다. 원칙으로 정하기엔 그럴 경우도 있지만 아닐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전도서는 이런 기복신앙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지적한다. 의롭게 살아도 멸망하고 악하게 살아도 성공하고 장수하는 이가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 일은 권선징악의 원칙대로 돌아간다고 보기엔 예외가 너무 많다.

    14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 8:14).

    15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전 7:15)

    2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전 9:2)

    2) 신학자들이 아무리 기복신앙은 잘못되었다고 외쳐도 교회의 현실은 다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기복신앙을 배제하면 유지될 수 있는 교회가 얼마나 있느냐는 의구심이 든다. 소수를 제외하곤 정도 차이만 있을 뿐 다들 기복신앙에 물들어 있고 이런 이들이 특히 교회에 헌신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성장을 위한 더 열정적인 헌신과 많은 헌금을 끌어내기 위해 기복신앙은 필수라고 생각하는 목회자들도 많다. 사실 기복신앙은 특정 교단과 상관없이 아주 보편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순복음 교단이 활발하지 못한 이유도 다른 교단에서 기복신앙을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이미 잘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기복신앙은 교회성장의 밑거름이었고 아직 성장의 가장 큰 원동력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기복신앙을 부추기거나 기복신앙을 믿지 않는 목회자들도 성도들의 기복신앙을 그냥 두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헌금을 강조하다 보니 어느새 세금의 종류보다 헌금의 종류가 더 많은 교회도 있다. 아마 인류 역사상 이처럼 헌금 종류가 많은 종교현상은 없는 것 같다.

    4) 건전하다고 소문난(?) 대형교회 목회자들도 이에 자유롭지 못하다. 교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훤하게 다 알고 있고 자주 이 욕구를 채워주는 설교를 서비스한다. 지금 이 역경에 좌절하지 말고 믿고 견디면 반드시 좋은 결과(성공)가 나타날 것이라고 강단에서 누누이 선포한다. "내가 과거엔 이렇게 고생했고 난 별 볼 일 없던 사람이었는데 믿음으로 살다 보니 모든 것이 변하여 큰 복을 받았다. 그땐 지금의 상황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주 안에서 모든 것이 협력하여 복(성공)을 받을 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가 안 좋고 상황이 안 좋을수록 특별 새벽기도회와 집회들은 차고 넘쳐난다. 사람들이 지금은 캄캄하여도 이 터널을 통과하면 성공이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을 얻기 때문이다.

    5) 그러나 하나님 뜻 안에 있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믿음은 성경에는 없다. 그저 대중에게 널리 퍼진 미신적인 혼합주의 기독교(?)일 뿐이다. 부와 건강, 성공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지만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믿음이 클수록 원하는 분량만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받는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물론 믿음이 커지는 것이 원하는 것이 다 사라지고 만족하는 것과 같은 상태라면 모든 것을 다 받은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6) 주변에 보면 정말 많은 기독교인이 구약을 인용하며 기복신앙이 성경적임을 주장한다(신약에는 기복신앙을 주장할 만한 구절이 거의 없다). 그러나 구약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조건을 만족시키면 누구나 재물, 성공, 건강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할까? 그렇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구약의 특정 구절들을 인용한다(시 34:10, 시 35:27, 37:25, 1:18, 욥 36:11). 이는 모두 신명기의 복에 근거한다.

    계명을 잘 지키면 복을 주시겠다는 내용
    8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10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신 28:10).

    계명을 안 지키면 저주를 내리시겠다는 내용
    45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네게 명하신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너를 따르고 네게 미쳐서 필경 너를 멸하리니
    46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적과 감계가 되리라
    47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48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신 28:45-48).

    신명기는 복과 저주의 언약을 담고 있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주의 계명들을 지키면 그들은 넘치게 복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부, 성공, 건강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받는 복이 오히려 하나님을 잊게 만드는 재앙일 수 있음도 경고하고 있다(신 8:17-18).

    실제로 구약에서 하나님 백성의 현실은 어떠했나? 과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이 만족할 만큼 풍요롭게 해 주셨을까? 신명기적 복의 특징은 우리의 상식적인 기대와 달리 하나님 보시기에 적절한 수준의 충분함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필요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필요에는 차이가 많다. 신명기 기자는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 대한 묘사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7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년 동안을 너와 함께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신 2:7).

    7) 이 구절은 정말 눈을 의심하게 한다. 하나님이 40년동안 복을 주어 그들에겐 부족함이 없었다고? 그들의 삶은 실제로 어떠했는가? 척박한 광야의 현실은 애굽 땅이 그리워질 정도로 땅도 집도, 안락함도 안전함도 없이 떠돌며 지낸 40년이었다. 흥미롭게도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잘 섬겨 풍성하게 복을 받은 상태에서도 이웃 국가들같이 풍요로웠던 적이 드물었다. 대부분 시절은 입에 풀칠할 만큼 가난하였고 이방인의 핍박에 시달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나님은 짠돌이(?)이신가?

    8) 그러나 그들이 겪은 진짜 어려움은 결코 가난과 고난이 아니었다. 진정한 어려움은 그들이 풍요로울 때 왔다. 풍족함은 그들에게 이미 가진 것에 대한 감사를 잊게 했고, 자기만을 생각하게 하며 사람 관계하고 사는 법을 잊게 했다. 이 위험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더욱 커지고 있다. 예전보다 훨씬 잘살게 되었지만, 사람들은 더는 감사를 모르고, 나눌 줄도 모르고 인간관계에 실패한다. 진짜 하나님의 인도 하심과 보살피심은 분명히 번영을 넘어선 관계성에 있다. 이는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공동체의 관계적 삶 자체다. 하나님의 참된 공동체에는 사람다움의 회복이 있어야 한다. 사람다움을 잃을 때 물질적 번영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회는 불행을 피할 수 없다.

    9) 물론 구약의 선지자들은 부를 정죄하거나 가난을 도덕적인 이상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구약에서 건강, 부, 성공은 분명히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의 남용과 위험을 경고하고((잠 11:28) 하나님이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한다.

    7 내가 두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8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 30:7-9).
    10) 구약에서도 열심히 그리고 올바르게 믿기만 하면 죄다 성공하고 부를 누린 것이 아니란 말이다. 부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신앙인이라면 절대로 의지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잠 11:28).

    물론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특별하게 물질적인 복을 준 인물들이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아브라함, 다윗, 솔로몬, 욥과 같은 일부에게 일어난 일이었을 뿐이다. 사실 족장이나 왕은 어느 나라나 부자다. 그들은 이미 부자였고 하나님이 특별하게 더욱 부유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혹독했다. 부러워할 만큼 편한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 엘리사, 그리고 요나, 예레미야, 에스겔, 스가랴, 스바냐, 하박국와 같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잘 섬겨서 부자가 되었다는 말은 없다. 그들은 엄청난 시련을 당하며 인생을 보낸 인물들이다.

    11) 구약에서도 하나님 백성의 가치는 재물과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혜에 있다. 지혜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잠 3:15). 재물과 성공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고 거부하라는 말이 아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자(왕상 3:9) 하나님은 그가 구하지도 않은 부와 영광을 주셨다(왕상 3:13). 부, 건강, 성공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표시가 아니다. 이는 구약과 신약 모두 마찬가지다. 믿지 못하겠다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구약 증인들의 처참한 삶을 보라.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이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5-38).

    12) 자신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가진 본능적인 열망이다.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것을 하나님께 비는 것도 그 때문이다. 복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욕망이 아니다. 다만 노력하지 않고 비는 것을 통해 얻으려고 하는 것이 큰 문제다. 기도는 세상적인 복을 얻는 지름길이 아니다. 기도를 통해 심은대로 거두는 법을 어기는 지름길을 찾는 것은 미신이지 신앙이 아니다.

    13) 성공의 욕구는 막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본능을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본능적인 욕구를 어느 정도 채워주지 않으면 성도들은 자기 교회에서 채우지 못해 생긴 답답함을 다른 건전하지 못한 곳에서나마 해결하려 든다. 요즈음은 심지어 금전, 건강, 애정 문제 해결을 위해 점집을 찾는 기독교인들이 늘어난다고 한다. 목회자 사모 중에도 점집에 드나드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물론 얼마나 답답하면 그렇게까지 하는지, 참 측은한 면도 있지만, 성경은 분명히 "복술자나 기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을 용납하지 말라”(신 10:11)고 한다.

    14)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반드시 하나님께 아뢰고 구해야 한다. 그러나 구하는데도 우선권의 원칙이 있다. 절대적인 복, 예를 들어 하나님, 지혜, 하나님의 통치와 같은 것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인가 보다 항상 먼저 구해야 할 것들이다. 그리고 상대적인 복은 주셔도 감사 안 주셔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넉넉하게 살라는 말이다. 재물과 성공의 복은 선물이고 선물은 주시는 분 마음이다.

    15) 기복신앙이 아닌 통합적인 복된 삶을 추구
    기복신앙을 철석같이 믿고 살아온 성도들에게 그들이 움켜쥐고 있고 기복신앙을 빼앗기란 어렵다. 평생 믿어온 기복신앙을 빼앗으면 많은 이가 깊은 혼란과 공황을 경험할 것이다. 기복신앙보다 더 설득력 있고 좋은 무엇을 직접 보여주고 먼저 앞선 이들이 삶으로 증명하는 길밖에는 없다.

    삶은 통합적이다. 삶의 만족과 충만한 행복은 다양한 것들도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통합적인 삶의 풍요는 돈과 성공으로 보장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구약과 신약의 신앙의 영웅들은 통합적으로 누구보다 복된 삶을 살았다. 하지만 모두에게 성공, 부, 건강과 같은 요소가 다 충족된 것은 아니었다. 잠언은 만족스럽고 충만한 삶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하고 잇다(잠 1:7).

    세상 복을 위해 궁리하고 땀 흘려 열심히 사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세상 복은 우리가 집착할 삶의 목적은 아니다. 통합적인 삶의 행복을 보장하는 복은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 지혜에 따라 사는 삶이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생활은 우리의 욕망을 채워줄 만큼 물질적 번영과 건강을 약속하지는 않지만, 통합적인 삶의 풍요를 확실하게 보장한다. 누구나 참된 신앙생활에 열정을 쏟을 때 삶의 통합적인 행복 지수는 틀림없이 높아진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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