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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주의와 복음주의 - 이신근 간사(희념함께)
  • 자본주의와 복음주의


    한 개인이나 집단이 지니고 있는 일정한 신념 체계에 ‘OO주의’라고 붙인다. 보이지 않는 손 즉 자유시장에 의해 소득과 분배가 결정되는 제도, 어쩌면 자본과 시장에 의해 삶의 모든 방식이 결정될 수도 있는 체계를 자본주의라고 하고, 예수의 뜻을 믿고 따르는 신념 체계를 넓은 의미에서 복음주의(기독교내의 특정한 집단이라기보다 복음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고 가정)라고 한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복음주의자로 살아간다. 이 두 가지 신념체계는 아무 갈등 없이 같이 갈 수 있는 것일까?

    자본주의는 신념이나 신앙의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그렇다. 자본주의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적절하고 유용한 도구나 제도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자체가 신념이 나 신앙이 될 수 없다. 많은 기독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좀 더 솔직해져 보자. 현재 한국의 기독교인을 움직이는 가치관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만나고, 어떤 기준으로 전공과 직업을 선택하고, 어떤 기준으로 소비습관과 삶의 태도들이 결정되는가. 어떤 기준으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어떤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가.

    교묘하게 가려져 있고 그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을 뿐, 한국 기독교인을 움직이는 신념 안에 자본주의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물론 대놓고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제도가 신념이나 신앙이 될 수 없다고 하지만, 반공이 한국 기독교 안에 신념이나 신앙이 된지 오래됐다. 대형기도원에는 반공(더구나 올바른 지식도 아닌)에 대한 성토가 줄을 잇는다. 구역모임이 사교육이나 부동산투기의 정보처가 되기도 하고, 소득과 경제력으로 끊임없이 비교당하고 압박당하는 것은 다른 집단보다 교회가 더하다는 신빙성 있는 소문도 들린다.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소통과 단절,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자본주의 특성에 적응하지 못하면 인생의 명함은 극명하게 갈린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비 기독교이 가져야 할 생각인데, 기독교인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부자 록펠러’라는 책이 기독교인 사이에서 스테디셀러가 됐다. 록펠러 일화는 교회 강단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손님이다. 이 단면만 봐도 교회 안에서 마저 성공 기준이 지극히 성경적이지 않고 자본주의적인 걸 볼 수 있다. 헌신이란 이름 뒤에 욕망을 부추겨 헌금을 많이 걷으려는 교회 측과 헌금을 많이 내야 복을 받을 것 같은 샤머니즘적인 개인 신앙이 맞닿아, 한국 특유의 독특한 신앙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전혀 복음적이지도, 신앙적이도 않은 자본주의적 발상과 방법이다. 게다가 록펠러 가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독점, 탈세, 뇌물수수 등으로 경이적인 부자가 된 가문이다. 이런 록펠러 가문이 한국교인들의 모범이 된다는 건 교회의 망신을 자초하는 일이다.

    자본주의는 체제는 모두에게 성공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 얼마 전 EBS다큐프라임에서 자본주의 5부작이 방영된 적이 있다. 다큐프라임에서는 자본주의가 5명이 4개의 의자를 놓고 서로 앉기 게임으로 묘사된다. 처음에는 음악이 흘러나와 서로 즐겁게 춤추며 의자주위를 빙빙 돌다가 신호가 떨어지면 치열하게 살아남기 위한 경쟁을 하듯이, 자본주의는 실패자와 낙오자가 대거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의자는 4개에서 3개로 줄고, 3개에서 2개로 줄어든다. 자영업을 해도 3년 안에 살아남을 가능성이 40%도 안 된다는 기사가 있다. 치열한 경쟁 가운데 부와 성공에 대한 전 국민의 갈증이 극에 다라고 있다.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고 특별하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나에게서 이익을 낼 수 있는 요소만을 골라 ‘나’라는 존재를 규정한다. 학생은 암기력이라는 잣대로만 판단당하고, 가정에서 가장은 소득으로 평가된다. 여성은 외모로, 남성은 재산으로 존재가 규정되는 경우가 많다. 그 안에서 끊임없는 소외가 발생한다. 그래서 규정된 존재의 크기를 과장하기 위해 무리한 소비를 하기 시작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명품가방과 좋은 차로 존재가치를 높이려 끊임없이 시도한다. 구입을 하면 얼마동안 존재가치가 높아진 것 마냥 착각이 들 뿐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소외감이 발생된다. 학생들은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전혀 유익하지도 않고, 오히려 해롭기만 한 선행학습에 목돈을 들이고, 많은 가정들이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집을 사서 경제 전반에 큰 해악을 끼치고 있다. 생활의 질이 점점 높아지는 한국사회에서 우울증은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언제 낙오될지 모르고 소외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자본주의를 살아야 한다. 많은 한국인이 그 두려움을 감추지만, 분명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건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1등이 되는 것이 성공이 아니다. 적어도 복음을 아는 우리는 실패나 낙오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성공방법을 지향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그 시대 실패자와 낙오자, 손가락질 당하던 자, 저주받은 자와 항상 가까이 있었다. 예수의 존재규정방식은 그 사람의 직함이나 사회적 신분이 아니다. 그 사람을 신분이나 겉모습으로 대하지 않고, 그 사람이 이제껏 살아왔던 삶과, 절박함, 태도등으로 그 사람을 인식했다. 예수와 친구가 될 마음이 있는 태도라면, 사람을 대하고 사랑을 하는데 조건이 없다.

    아침부터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한 일꾼이나, 해지기 한 시간 전에 겨우 일하기 시작한 일꾼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다. 일꾼이 얼마나 일하고 소득을 냈는가가 고려대상이 아니라 이 일꾼이 하루 품삯을 가지고 가지 않으면 굶주릴 수밖에 없는 한 가족의 삶이 포도원 주인에게 고려 대상인 것이다. 아흔아홉마리의 양이 훨씬 더 가치 있을지 몰라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고통이 더 신경 쓰이는 것이 목동 예수의 마음이다. 예수의 가치판단은 그 사람이 나에게 얼마큼의 손익을 가지고 오는가가 아니라 그 존재 그 자체였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고통과 저주의 손가락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을 예수는 기꺼이 가까이 다가갔다. 저주와 비난의 손가락질은 실패자에게서 예수에게로 선회했고, 예수는 그 시대 가장 큰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형을 받았다. 하늘보좌를 움직이는 위대한 자가 자신 같은 하찮은 자와 가까이 지내기 위해 죽었다는 소식, 복음은 그 당시 세계의 전부였던 거대한 로마까지 흔든 충격이었다. 그 복음에 의지한 사람들은 가난한자, 실패자, 나그네와 함께 거하고 재산을 나누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는 가난한자가 없었다.

    사람이 가치 있는 이유는 루이비똥이나 BMW를 소유해서가 아니다. 사람이 가치가 있는 이유는 존재자체가 사랑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랑에 조건이 없다. 조건 없는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조건 없는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낸다. 그것이 복음의 힘이고 복음의 선순환이다.

    하나님의 복은 내가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에 가난한 자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가난하고 실패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야 하고, 우리의 재산을 나누어 가난한 자들과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제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EBS다큐프라임에서 제시한 것처럼 복지자본주의에 눈을 돌려야 하는 이유다. 복지는 우리가 서로에게 해 주는 보험이다.

    빈부격차가 오히려 자본주의의 비효율을 가지고 온다. 부자 한사람보다 가난한 사람 10사람이 훨씬 더 소비하기 때문에 복지가 오히려 시장의 순기능을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성장과 복지는 갈등되는 개념이 아니다. 그리고 창의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모험에서 나온다. 실패와 패배자를 위한 사회 안전망이 그 사회의 창의가 넘치는 사회를 만드는데 큰 도움을 준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자본주의는 신앙이나 신념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데 적절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복지가 발달한 북유럽은 의료, 교육, 주택등의 인간의 기본권이 보장된 나라다. 목돈이 들어갈 이유가 없기 때문에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혹은 자본주의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많은 부분 토지보유세에서 복지재정을 충당하면 사회의 성장과 분배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다.

    복음주의자는 부와 성공보다 가난과 실패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사람에 대한 이해, 조건 없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 좋은 제도, 이 모든 것이 잘 조합이 될 때 하나님 나라의 실존은 우리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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