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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정론의 이해 - 읽으면 유익하기에 뉴스엔조이에서 퍼온 글입니다.
  • 칼뱅의 작정론의 문제

    예정론에 있어서 칼뱅에게 있어서 예정과 작정은 동의어이다. 그가 기독교강요 마지막 편에서 구분하여 작정은 섭리론에서 다루고 예정은 구원론에서 다루고 있지만 동의어이다. 칼뱅에게 있어서 우주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었다고 본다. 예정에서 벗어나는 것은 이 우주 그 어디에도 없으며 그 무엇도 없다고 말한다. 돌 하나가 어떤 지역에서 어떤 모양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것도 예정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이 절대 불변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시고 그 사람이 영원한 구원에서 떨어지는 것을 예정하셨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도 이미 정해진 대로 되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쓰나미도, 지진도, 그로 인한 엄청난 사람의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예정에 대한 그의 생각은 그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최고로 높이는 신앙고백이라고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성경적인 생각인가의 문제가 있다. 칼뱅의 예정론은 성경의 가르치는 바가 아니다. 그의 주장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정을 임의로 무한대로 확장한 인간적인 사고의 결과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것을 예정하시지 않으셨다. 우주의 모든 것을 예정하셔야만 우주 경영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에 매여 사는 사람과 달리 하나님께 있어서는 모든 것이 동시적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경영에 있어서 특정한 영역에서 예정하셨지만 그 이외의 영역은 허용하신 것이다. 참새 한 마리가 언제 어떻게 땅으로 떨어지는가는 예정이 아니라 허용이다. 예정과 허용은 동의어가 아니다.

    서로 다른 개념의 두 단어를 함께 붙여 사용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는다. 범죄의 경우에 대한 허용적 작정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신자의 범죄에 있어서 작정이라는 단어가 사용될 여지는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신자가 감당하지 못한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한다. 그리고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셔서 능히 감당하도록 하신다고 하신다. 시험당할 때에 감당하지 못하고 넘어지는 것이 범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범죄하지 않기를 원하시고 범죄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도움을 주신다. 그럼에도 신자가 자기 욕심을 따름으로 하나님께서 내신 피할 길로 가지 않고 범죄한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예정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범죄하지 않을 수 있는 시험당함만을 허락하시고 범죄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도움을 주시고는 범죄하도록 예정하셨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나름대로 신실하게 살려고 노력하시는 한 집사님이 “목사님, 제가 지금 이 상태인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지요?”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목사는 “집사님, 제가 지금 이 상태인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 정도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성숙하여 예수님을 더 온전히 닮고 풍성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제가 지난 삶에서 그 은혜를 언제나 온전히 받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성경적으로 어느 것이 옳은 생각일까? 목사의 생각이 성경적으로 옳은 것이다.

    그 집사님의 질문은 예정론에 입각해서 생각할 때에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이다. 예정론에 따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현재 상태를 창세전에 정하셨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대로 지금 된 것이다. 그 집사님은 자신이 배운 바를 따라 생각하게 되는 것을 질문하였던 것이다.

    칼뱅의 예정론은 우리의 연약함과 잘못의 결과임에도 하나님께 그 책임을 넘기도록 길을 터놓고 있다. 현재의 상태를 넘어서도록 하시기 위하여 이전부터 지속된 하나님의 도우심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다. 연약하여 넘어지거나 범죄의 경우에는 이미 피할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간과하게 만들고 있다.

    숙명론과의 동일성

    칼뱅식의 예정론은 그 내용에 있어서 숙명론, 운명론과 다르지 않다. 현재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인생은 정해진 대로 된다는 것이다. 숙명론, 운명론도 사람의 노력 자체를 부정하고 있지 않다. 사과나무 아래에서 사과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떨어질 때까지 입만 벌리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한 경우도 가능하고 사과를 따기 위해 사과나무를 올라가는 것도 가능하다. 어떠하든지 그리고 어떤 결과를 얻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이 이미 정해진 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칼뱅의 예정론도 마찬가지이며 이는 성경적이지 않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정론으로 혼란을 겪고 있다. 이는 목사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예정론은 깊이 알려고 하면 되지 않는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성경에서 벗어난 예정론을 말하고서는 그 안에서 생각하려고만 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면 그렇게 말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예정과 섭리

    예정이란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에 대하여 이전에 미리 정하여져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있어서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틀 안에 있는 우리와는 달리 동시적이다. 영원에서 영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아신다. 그런 가운데 어떤 일에 대해서는 정하셨다. 인간의 시간의 관점에서는 미래의 일이 정해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정하셨다는 사실이다. 모든 일이 아니라.

    예정에는 언제나 그 예정의 성취를 위한 섭리가 뒤따른다. 하나님의 예정은 기계적으로 성취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정이 인간과 관계되어 있는데, 인간은 로봇이 아니고 자신들의 의지를 따라 산다.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의지를 따라 살기에 하나님께서는 섭리를 통하여 예정하신 바를 이루시는 것이다.

    반면에 예정하지 않으신 일들은 섭리가 뒤따르지 않는다. 허용하신 일들인데 거기에는 섭리가 뒤따르지 않는다. 인간들의 뜻이 그대로 반영되어 일이 진행된다. 물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누리며 생활하는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예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정의 내용

    그렇다면 예정과 관련하여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에서 예정으로 제시되는 내용은 구속 역사와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언약의 시대가 진전하면서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구속 역사는 하나님의 예정이며 그 예정을 이루기 위한 섭리가 뒤따랐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역사에 사람들이 악역을 담당하는데, 그것을 성경은 예정의 성취로 말씀하고 있다. 물론 그 당사자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서 그러한 역할을 한 것이다. 섭리는 인간의 의지를 거스리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도 예정된 것이다. 이 땅의 다른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음에도 복음을 듣게 되고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얻게 된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하였는가에 대한 물음을 가질 때에 그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 선택과 예정이다. 구원받기 전의 상태에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예정되었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에 있어서의 예정은 반드시 구원을 얻은 이후에 그 구원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아직 구원을 얻은 자리에 나오지 못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원하심이 적용될 뿐이다.

    선택과 예정을 따라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섭리는 복음을 들을 때에 “마음을 열어 복음을 청종하게 하신지라”는 성령님의 역사이다. 그 성령님의 역사는 기계적이지 않다. 인격적이다. 그 역사의 열매는 당사자가 인격적으로 받아들임으로만 가능하다. 동시에 그 역사를 당사자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반드시 받아들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은혜를 누린다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며 능력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예정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어 있는 인간들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와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정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이들에게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는 은혜인 것이다.

    성경을 따라 예정을 이해하면 아주 쉽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제한하여 예정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 신학자를 필두로 하여 무한대로 확장되었고 여러 가지 문제를 만들어내었다. 너무나도 어려운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성경을 따라 쉽게 이해하는 길로 나아가지 않는다. 왜? 먹고 사는 데에 아주 유용하기 때문이다. 쉬운 것을 어렵게 만들고 그것을 말하면서 인정을 받고 먹고 사는 데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하루 속히 이러한 행태에서 벗어나야 하는 데에 쉽지 않아 보인다.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이 죄성의 인간이 가지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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