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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픔의 기억 넘어 ‘광주의 진정성’ 일상화해야”
  •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30주년에 이르렀으니 이미 한 세대가 흘러갔다. 광주에서의 항쟁은 1987년 6월항쟁으로 미완의 결말에 이르렀고 이른바 ‘87체제’의 연속선상에서 민주주의의 선진화 행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역사가 나선형으로 진전되는 것이 맞다면 우리는 구부정한 길을 돌아가고 있는 길목에 서 있지 않을까.


      내가 가족과 함께 전라도로 내려가기로 결정한 것은 1976년 가을이었다.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관련자 사형 등으로 유신독재가 절정을 치닫고 있을 때였다. 나는 당시의 하방 이유를 대개 두 가지로 설명해 왔다. 하나는 지식인 사회에서 민주화운동이 나아갈 방향으로 전위론과 현장론이 있었는데 나는 후자를 택했다는 것이며, 둘은 두 해째 계속하고 있던 대하소설 <장길산>을 쓰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전위적인 조직의 선두적 투쟁만이 군사독재를 끝장내는 길이라는 것과, 당시 국민의 대부분이 노동자·농민·도시빈민이므로 이들 민중을 의식화하고 그들의 힘에 의하여 민주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들 삶의 현장으로 가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이를테면 내가 선택한 것은 작가로서의 대중노선인 셈이었다. 이미 70년대 초반에 나는 몇몇 벗들과 함께 구로공단에 취업한 적이 있었고 현장 민중의 의식화를 위한 문화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장길산>을 좋은 작품으로 완성하기 위해서도 태어나서부터 도시내기였던 내가 아직은 전통시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던 시골로 내려가야겠다고 작심한 결과였다.

      개인과 조직의 행동에는 여러 단계가 있기 마련이어서 먼저 자신과 사회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며 그에 따라서 소극적이고 추상적인 의식에서부터 보다 적극적이며 구체적인 행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우리는 의식화의 첫 단계를 전통적인 몸짓과 소리를 출발점으로 하여 거기에 서사를 담고 개인의 서사를 공동체의 서사로,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의 이야기로 전환시키는 촌극 마당극 형태의 현장극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현장극은 참여자나 관객을 함께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조직의 분화와 번식이 매우 빠른 대중 의식화 방식이었다.



      우리는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전국 33개 지역에 각종의 장르가 서로 연결된 문선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그러한 현장 문화운동의 시도와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 서울 변두리 공장 지대에서의 독서회 또는 야학운동과 광주를 비롯한 남도지역의 마당극 집단들이었다.

      전라남도의 끝인 해남으로 내려가니 시인 김남주가 <함성>지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낙향해 있었고, 정광훈·윤기현 등의 농민이 합세해서 ‘사랑방 농민학교’라는 느슨한 조직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현장 문화운동을 전개하던 채희완·임진택·장선우·김민기 등과 광주의 민청학련 세대인 김상윤 등이 지원하여 전남현장문화운동의 준비 조직이 결성되었다. 김남주와 김상윤은 광주의 녹두서점을 근거로 민중문화연구소를 꾸리고 서울에서 문화운동 1세대와 2세대가 번갈아 내려와 함께 숙식하면서 전남대·조선대를 중심으로 한 연희패를 습련시키고 조직했다. 결국은 이들이 민주교육지표 사건의 시위를 주동하면서 옥고와 도피 등을 겪고 성장하여 이후 광주 전남지역의 현장운동과 문화선전을 주도해 나가게 된다. 내가 낙향하고 김남주가 광주를 거쳐서 민중문화연구소의 독서회 사건 등으로 서울로 도피할 무렵에 광주 민청학련 세대의 중심인물이었던 윤한봉이 출옥한다.

      우리는 그와 함께 78년 무렵부터 조직 정비를 했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선배 세대 중심의 민주청년협의회, 노동자와 학출이 만난 들불야학, 여성 중심의 송백회, 시민들이 모인 양서조합, 그리고 문선대로서 극단 광대가 있었고, 이들은 또한 개신교와 가톨릭의 농민회, 노동청년회 등과 연결되어 있었다.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고 신군부가 등장한 뒤에 우리는 군정의 과도기가 적어도 일 년은 갈 줄 알았다. 나는 광주의 시민사회 인사들과 더불어 군정 종식을 요구하는 항의성명을 했고 계엄법 위반으로 군감옥에 유치되었다가 몇 달 만에 석방된 뒤였다. 우리는 시민 조직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현대문화연구소를 열고 극단 광대를 위한 소극장 개소를 준비하고 있었다. 5월16일 금요일에 출판사에 계약금을 받으러 상경했는데 다음주에 다가올 소극장의 계약 기일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주말이라 월요일에 사무처리가 된다고 하여 나는 서울에 체류중이었고 17일 토요일에는 신촌 근방의 주점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와 방금 전국 학생회 간부들의 비밀집회가 있던 이화여대에서 후문 쪽으로 가까스로 탈출해 왔다며 신군부의 일제 공세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사방으로 전화를 해보니 서울의 알 만한 사람들이 모두 끌려간 뒤였다. 이튿날 18일 광주에 알아보니 역시 예비검속이 시작되어 민청협의 후배들이 거의 검거되고 몇몇은 도피했다는 소식이었다. 내 집에도 합수단 소속 수사관 칠팔 명이 구둣발로 들어와 샅샅이 뒤지고 갔다고 알려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서울에 머물러 있었고 월요일이 되자 피의 학살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영등포와 종로 등지에서 몇 차례의 시위가 시도되었지만 초반에 진압되었고 몇 개 그룹이 유인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나는 빈민 운동권의 허병섭 목사와 더불어 노동자와 활동가 중심으로 유인물조를 짰고 광주에서 들어오는 소식들을 기초로 유인물의 문건을 쓰고 찍었다.

      광주 시민의 항쟁이 진압되고 나서 서울로 도피해 올라오는 후배들의 은신처를 마련하고 생활대책을 세우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6월 말경에야 광주 집에 돌아오니 모친은 앓아누워 계셨고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내가 수배자 명단에서 뒤늦게 빠진 것은 수사책임자로 내려온 고교 동창생 덕이었다. 마치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광주에서 제정신이 돌아온 것이 83년 무렵이었고 우리는 광주의 진상을 국내외에 알려야 한다는 결의로 차 있었다.

      이때부터 문화운동의 장르적 분화가 시작되면서 마당극뿐만 아니라 판화, 사진, 영상, 오디오, 비디오 등의 매체들이 활용되기 시작했다. 홍희윤은 그때 이미 광주의 진상을 조사하는 후배들을 뒷바라지하고 있어서 몇 개 그룹이 동시에 진행중이었다. 나는 수집한 자료들과 몇몇 후배들의 도움을 받아 광주항쟁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85년 2월에 풀빛출판사의 나병식, 평론가 채광석, 민청협의 김근태·신동수, 광주사회단체협의회 정상용 등이 대학과 시민사회, 학원가, 서점 중심으로 출판, 배포를 논의했다. 이미 3월에 기록의 일부가 복사되어 대학가에 배포되고 5월에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아래 사진)라는 제목으로 지하출판되었다.

      
      우리는 광주항쟁의 주요 수배자였던 윤한봉과 박효선을 해외에 망명시킬 준비를 해오고 있었다. 해외와의 연대가 시급한 일이기도 했고 기존의 해외 민주화통일운동이 안전지역에서 오히려 급진적인 편향성에 치우쳐 있어서 ‘한국적’인 자생성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광주를 알리는 일과 함께 조정과 재편성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조직가로서의 윤한봉과 광주에서 산화한 윤상원에 이어서 문선대를 이끌었던 박효선이 함께 나간다면 효과적일 것이라고 논의가 되었다. 서울의 기독교 측과 협의하여 윤한봉을 호주를 경유하여 미국 시애틀로 가는 화물선 레오파드호에 승선시키기로 하고 재미 기독교 인권단체와 케네디 인권센터 등과 연결할 수 있었다. 박효선은 유럽 쪽으로 결정되었고 어떤 나라의 대사관과 협의가 되어 역시 선박편으로 거의 출발하려는 즈음에 본인이 승선을 포기했다. 미국 망명에 성공한 윤한봉은 스스로 조직한 ‘한국청년연합’을 기반으로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에 이르는 해외 조직망을 통하여 한국의 민주화 투쟁과 광주의 진상을 온 세계에 알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와 만나서 해외 문선대를 조직하고 이를 아시아 여러 나라와 연결하기 시작한 것은 1985년 이후의 일이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쯤은 우리 모두가 광주를 기억하고 알고 있을까. 거리마다 넘쳐나는 소비사회의 젊은이들은 현대사 연표에 나오는 몇 줄조차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광주의 5월은 직전에 그들을 깨우쳤던 부마항쟁과 만나지 못했고, 양쪽이 번갈아 정권까지 잡으면서 풍요로운 기념과 보상문제로 얼룩졌다. 그리고 세월이 가면서 지역적으로 사유화했던 존재감은 사라지고 반목과 회한이 깊어갔다. 나는 광주 시민사회의 불평분자이며 잔소리꾼이었던 윤한봉의 노심초사를 잊지 않는다.

      이제 처참과 슬픔의 기념식이 아니라 그때 그 장소 그 시민들의 진정성을 일상화하자. 5월 광주는 이 탐욕스런 욕망의 시대에도 우리의 등 뒤에서 뜨거운 눈빛으로 우리를 눈바래기하고 있다.


    황석영 소설가


댓글 1

  • 김장환 엘리야

    2010.05.18 18:13

    오늘이 5.18 민주화운동 30주년입니다.
    한겨레에서 퍼온 글입니다.

    5.18기념식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 조차도 부르지 못하는 작금의 사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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