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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친 운전사는 운전하지 못하도록 끌어내려야" - 대학 시절부터 존경했던 본 훼퍼 목사에 관련된 글이어서 퍼왔습니다. 좀 과격한 듯하지만 새겨보아요...
  • 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한 저항운동에 참여했다가 히틀러가 자살하기 3주 전인 1945년 4월 9일 히틀러에 의해 목숨을 빼앗긴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목사가 히틀러의 비밀경찰인 게쉬타포에 의해 체포되기 이전까지 10년간 살았던 본회퍼 하우스(Bonhoeffer-House, Marienburger Allee 43, Berlin)는 내가 머물고 있는 베를린숙소에서 자전거로 30분 거리에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본회퍼 목사 집을 찾아가면서 본회퍼가 믿었던 그리스도와 오늘날 한국의 기독개신교에서 믿고 있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천천히 자전거 폐달을 밟았다.


    ▲ Berlin, Bonhoeffer-House 전경 ⓒ김상수

    한국 사회 기득권은 정치 경제적 부패에 더하여 국민들을 조악한 이념 싸움으로 빠져들게 부추기면서 빈부격차를 일으키고 그 양극화 현실 사이로 한국의 광신적인 기독개신교의 허장성세 교세는 한국의 국가사회 공동체를 깊은 혼돈에 빠트리고 있는 현실이다. 나는 벌써 여러 번 얘기했다. 언젠가는 한국의 반그리스도적인 기독개신교가 한국에서 가장 큰 사회 국가적 해악을 끼치고 말 것이란 지적을.

    김상수 홈폐이지 visual diary http://www.kimsangsoo.com/zboard/zboard.php?id=news01&page=19&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79 (한국의 광신기독교는 경계도 없는가. 2007년 7월 22일)

    한국의 기독교 인구가 1000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도 있지만 어떤 통계는 믿기 어려운 숫자인 2000만 명 이상을 들이대기기도 한다. 남한 인구 거의 절반이 넘는 인구가 기독개신교를 믿는다는 통계의 부풀림은, 현재 이명박이 전체 국민의 50% 지지율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청와대나 한나라당의 정체를 제대로 알 수없는 여론조사에 펌프질을 마구해되는 주장만큼이나 황당하기만 하다.

    북한을 굴복시키고 섬멸시켜야 한다면서 전쟁을 부추기는 한국의 대형교회들, 다른 종교는 무조건 배척하고 자기가 믿는 종교만 믿어야 한다는 광신적인 기독개신교의 종교 획일화, 종교를 빙자해 싸구려 장사에 혈안이 된 '사기꾼목사'들이 판을 치는 교회들이 '바겐세일하는 은혜'를 팔기 위해 '양아치목사'들의 끊임없는 감언이설(甘言利說), 기복주의(祈福主義) 요소로만 교회세력을 키우는 오늘 한국의 기독개신교의 무지몽매(無知蒙昧)한 행태의 그 절정에서 드디어는 대통령까지 만들어내는 초역사적인 사건도 기독개신교는 저질렀다. 벌써 2년이 넘도록 교회 장로가 대통령인 현실이니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은혜가 저절로 이 땅에 강림(降臨)하고 있는 것일까. 참으로 여러 가지 패악(悖惡)이 하루하루 기가 막힌 현실을 지금 한국인들은 고역스럽게 살고 있다.

    본회퍼는 말하기를, "사람들은 그들의 위기 속에서 하느님께로 다가간다. 인간들은 도움을 간청하고 행복과 먹을 양식을 구하려하고, 질병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간구(懇求)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원들은 그리스도인이나 이교도들이나 모두가 다 하는 짓들이다. 그러나 진실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려운 처지에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삶을 돌아다본다. 같은 인간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살면서, 집도 식량도 없는 헐벗은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다가서는 인간들이야말로 비로소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죄와 허약함과 비록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인간들이라고 해도 그의 삶이 하느님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선다면 하느님도 그의 곁에 서있다."


    ▲ Bonhoeffer-House, 거실에 걸린 본회퍼 목사의 사진ⓒ김상수


    ▲ Bonhoeffer-House, 서재 내, 본회퍼의 책상ⓒ김상수


    ▲ Bonhoeffer-House, 서재 내, 서가ⓒ김상수

    본회퍼 목사가 말하는 기독교 신앙과 한국의 기독개신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간극(間隙)이 너무 크다. 그러나 지금 이런 한국의 기독개신교의 혹세무민(惑世誣民)에 맞서서 그리스도 하느님을 따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이며, 그 하느님은 오늘 우리 한국인들에게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물음은 상대적으로 아주 미미하거나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실정이다.

    본회퍼 목사는 미친 선동으로 독일 국가를 몰아가던 히틀러 집권 이틀 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지도자가 자신을 우상화하기 위해 국민을 현혹하고, 국민이 그에게서 우상을 기대한다면, 그 지도자상은 조만간 악마의 상으로 변질되고 말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한다.

    대중을 교묘하게 동원하여 지지세를 가장하는 히틀러 편에 당시 독일의 절대 다수의 목사들이 기독교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의 정치적인 프로파간다로 "독일 기독교 신앙운동"에 가담했을 때, 본회퍼는 이미 종교로의 독일 기독교는 사회적 파국을 향해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고 간파한 것이다.

    라디오 강연이후 본회퍼는 본격적인 나치의 감시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본회퍼의 신학은 광영(光榮)의 신학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한 고난 속에서 신을 인식하는 길을 찾아 나선다.

    나치의 박해가 갈수록 심해지자 미국의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등이 본회퍼를 미국 유니온 신학교로 초청해 신학공부를 하게 도움을 준다. 그러나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키는 히틀러 군사체제의 반인권적인 독일의 상황은 본회퍼에게 번민을 일으켰고, 안전한 미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니버에게 편지를 썼다.

    "저는 독일의 기독교인들과 같이 독일의 어려운 시기동안 내내 함께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심했습니다. 독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저도 이 시대의 시련을 나누지 않는다면, 전쟁이후에 독일에서 기독교인으로의 사회적 삶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가 저에게는 없다고 스스로 판단했습니다."

    미국의 친구들이 그의 신변의 위험을 염려해 그가 미국에 남을 것을 강력하게 권유했지만 결국 그는 미국을 떠나 독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1940년(34세), 히틀러 지배체제의 당시 독일의 상황은 야만(野蠻)의 시간이었고 밀고와 투옥, 강제추방과 살육이 공공연한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독일 군 정보부의 정보부장 부관으로 일하고 있던 그의 처남 한스 폰 도나니(Hans von Dohananyi)와 같이 반 히틀러 저항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히틀러 암살 음모는 그의 처남과 군고위층의 반 히틀러 세력들이 군 정보부와 함께 시도했던 것인데, 본회퍼도 여기에 적극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제 본회퍼 목사는 가능한 모든 정치적 군사적 방법을 동원하여 나치에 대항해 투쟁하는 것을 행동의 목표로 삼았다.

    "제 정신을 잃은 운전자가 폭주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해치고 있다, 이 폭주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는 미친 사람이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것만이 목사로써 나의 과제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미친 사람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도 바로 나의 과제다."

    이런 본회퍼의 행동주의적인 신학은 히틀러를 제거하는 것만이 독재정치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일차적으로 구하는 것이며 반 나치 저항운동에 가담하여 히틀러를 없앰으로써 국가의 공동체를 악으로부터 건져낼 수 있을 것이라는 명확한 판단으로 그는 과감하게 히틀러의 독재정권과 싸우게 된다. 그러나 히틀러 제거 계획은 실패하고 그는 그 이전인 1943년 4월 5일 게슈타포에 의해 이미 체포를 당하고 만다.


    ▲ Berlin Topographie Des Terrors 옥외 전시 사진 중, 히틀러와 군중ⓒ김상수


    ▲ Berlin Topographie Des Terrors 옥외 전시 사진 중, 반히틀러 처형장면ⓒ김상수


    ▲ Berlin Topographie Des Terrors 옥외 전시 사진 중, 본회퍼 목사의 게쉬타포 체포 직전 모습ⓒ김상수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나 내가 매를 맞는 것, 또 내가 죽는 것 까지도, 이런 것들은 어쩌면 나에게는 그렇게 심한 고통이 아니다. 나를 참으로 고통스럽게 하고 괴롭히게 하는 것들은 내가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에 감옥 밖 세상이 너무나 조용하다는 사실이다."

    히틀러 암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후 히틀러는 전쟁에서 패색이 완연했지만 '반란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 버릴 것을 최후로 명령한다. 히틀러 반란자들 대부분은 처참한 고문을 당했고, 엉터리 제국재판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약 7,000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으며, 이 중 약 5,000명의 사람들이 사형에 언도되었고, 거의 대부분이 갈고리에 매달려 교수형에 처해진다. 당시 히틀러는 이런 처형모습을 가리켜 '푸줏간의 돼지' 같다고 말했다. 불과 그가 자살하기 3주전에 일어난 일이다.

    본회퍼는 서른아홉 살 젊은 나이로 삶을 끝냈다.

    하지만 그는 죽기 전 보낸 편지에서 "죽음은 제게 마지막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는 부당한 권력에 의해 죽음을 당했지만 온갖 종류의 억압과 차별이 있는 세상 곳곳에 그의 '말씀'은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사후 51년만인 1996년 베를린의 법원은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에 대한 나치법정의 사형선고를 공식적으로 무효화하는 판결을 내렸다.

    "본회퍼 목사가 1943년 군 고위장교들과 함께 히틀러 암살을 모의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은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본회퍼는 결코 국가를 위태롭게 한 사실이 없고 오히려 나치의 폐해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구출한 인물이었다."

    본회퍼 하우스 관리자는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집의 곳곳을 안내해 주었다. 본회퍼 목사가 기도하던 장소, 그가 손님을 맞이하던 거실, 그의 서재, 게슈타포가 집안으로 들이닥치면서 체포되기 직전까지 책상 앞에 앉아서 읽고 있던 책을 조용히 책꽂이에 꽂아놓고는, 잠시 외출을 다녀오기라도 하는 것 같은 옷차림새로 게슈타포를 따라 나서던 본회퍼 목사의 정경이 내 눈에 잡혀왔다.

    나는 조용히 그의 낡은 서가(書架)를, 그의 책상 위를, 손으로 한 참 동안 쓰다듬었다. 하우스 관리자는 마치 내 마음의 동작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이, 나 혼자서 본회퍼의 서재에 잠시 남아 있도록, 소리 없이 서재 출입문을 닫고 문밖에서 한동안 기다려주었다.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 한국인에게 정작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

    베를린에서

    (☞바로 가기 : 필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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