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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례 여행 8 - 성공회 종교개혁: 전례를 통한 개혁
  • 주낙현 신부와 함께하는 전례여행 8

    성공회 종교개혁: 전례를 통한 개혁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을 거쳐서 등장한 교회를 개신교라 부른다. 그 대표적인 세 개의 교회가 루터교, 개혁교회(장로교), 성공회이다. 현대 수백 개의 개신교단은 대체로 이 세 개의 교단에 기원을 둔다. 그러나 16-17세기에 쓰던 ‘개신교’라는 말과 20-21세기에 쓰는 ‘개신교’라는 말에는 그 공통점만큼이나 차이점도 많다. 수백 년을 두고 저마다 다른 처지에서 발전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또 그 첫 세 개의 개신교도 서로 같지 않았다. 이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오해가 생기고 종종 억지주장도 나온다.


    개신교 종교개혁은 신학과 예배를 새롭게 하여 교회의 신앙생활을 개혁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그 무게 중심은 달랐다. 루터교와 개혁교회는 탁월한 두 지도자 ‘개인의 신학’에 기대고 발전했다. 루터교는 마르틴 루터의 신학을, 개혁교회는 장 칼뱅의 신학을 표준으로 삼았다. 다른 탁월한 동료 개혁자들도 있었지만, 이 두 거인의 그늘에 가리곤 했다. 이들에게 예배 개혁의 잣대는 그 신학적 주장을 얼마나 잘 반영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루터교의 예배 개혁은 점진적이었고, 개혁교회의 개혁은 급진적이었다. 이 두 사례는 2-30여 년 늦게야 종교개혁 대열에 동참한 성공회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그 그림자가 짙다.


    로마 교회 지배에서 영국 교회를 독립시킨 영국 왕 헨리 8세는 신학과 예배에서 중세 교회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로마 교회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호칭까지 받았다. 영국 교회를 독립시켜 자신을 교회의 수장이라고 불렀지만, 1547년 죽는 순간까지 중세 신학과 예배를 버리지 않았다. 그 생전에는 종교개혁의 핵심인 신학과 예배의 개혁이 거의 없었다. 헨리 8세의 교회 독립을 성공회의 시작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이다.


    영국 교회에서 신학과 예배의 본격적인 개혁은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의 몫이었다. 그는 독일에서 루터의 신학을 공부했고, 개혁교회의 영향을 받은 동료의 조언을 얻어 예배를 개혁했다. 크랜머 대주교의 개혁 방법은 신학 논문 발표가 아니라 예배문 개정이었다. 1548년에 첫 자국어(영어) 성찬례문이 나왔고, 이듬해인 1549년 마침내 성공회의 가장 중요한 전통이 되는 ‘공동 기도서’가 처음으로 나왔다. 이 첫 기도서는 중세 교회의 여러 전통을 보존하면서도 종교개혁 신학의 중요한 점을 반영했다. 3년 후 나온 1552년 기도서는 종교개혁 신학을 좀 더 반영하기도 했다. 영국을 천주교로 되돌린 메리 여왕 때문에 이런 노력이 잠시 멈추기도 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 성공회의 독특한 신학과 예배의 기풍이 자리를 잡았다. 그 결정판은 1662년 ‘공동기도서’였다. 이 역사는 성공회 종교개혁의 몇가지 특징을 잘 드러낸다.


    첫째, 신학 논쟁보다는 전례를 통한 개혁이다. 신학적 정밀함에 무게를 둔 대륙의 개혁과는 달리, 성공회 개혁자들은 신학적 논쟁을 하느님을 예배하는 일보다 먼저 내세우지 않았다. 실제로는 전례의 언어와 행동 안에서 오히려 신학적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다.


    둘째, 전례를 통한 일치이다. 신학적 논쟁의 결과는 교회의 일치보다는 교회의 분열이기 일쑤였다. 그러나 ‘공동 기도서’는 예배와 전례 안에서 모든 신자가 하나임을 경험하는 도구였다. 기도서는 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언어와 논리의 토대였으며, 아울러 개인의 신앙생활과 경건생활을 위한 길잡이였다.


    셋째, 공동의 예배 신학이 바로 교회의 신학이다. 종교개혁의 몇몇 유산은 루터주의, 칼뱅주의처럼 탁월한 신학자의 이름을 따서 불린다. 이에 비해 성공회는 공동기도서를 함께 사용하는 집단의 이름으로 불린다. 성공회 신학과 전통을 뜻하는 ‘앵글리카니즘’을 현대말로 푼다면,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함께 예배하며 경험한 신학과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했든 안 했든, 성공했든 못 했든, 성공회 종교개혁은 유럽 대륙의 종교개혁과는 다른 기풍을 만들었고, 그 다름으로 그리스도교 전통의 풍요로움에 이바지했다. 그 기반은 ‘공동체의 경험’이었다. 공동기도서는 여러 개인의 다양한 경험을 공동 예배를 통해서 공동체의 경험과 신학으로 안내하는 방법이다. 이에 반해, 특정 신학자의 신학은 그 ‘개인’의 신학이 지배하도록 버려두거나, 신학자들만이 독점적으로 소유한 신학을 부추기기 쉽다. 중요한 것은 ‘신학’의 회복이 아닐는지 모른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 공동체’의 회복이다. 성공회 종교개혁 유산에도 불구하고 이 깨달음을 얻기까지 300여 년의 시행착오가 더 필요했다. 이 회복을 위한 근대 전례 운동은 19세기에 들어서야 움트기 시작한다.


    (성공회 신문 6월 11일)


    위 글은 2011년 "성공회 신문"과  “성공회 신학-전례 포럼”에도 게재되었으며, 필자인 주낙현 신부의 허락을 받아 이 홈페이지에 다시 게재한 것입니다. 이 글을 다른 곳에 옮겨 실으시려면 주낙현 신부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주낙현 신부 블로그 http://viamedia.or.kr

    성공회 신학 전례 포럼 http://liturgy.skhcaf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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