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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례 여행 7 - 종교개혁의 빛과 그늘
  • 주낙현 신부와 함께하는 전례여행 7

    종교개혁의 빛과 그늘


    “목욕물을 버리려다 그 안의 아기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이 속담은 16세기 서방 교회 종교개혁의 횃불을 든 마르틴 루터가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교회의 오랜 전통을 무시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던 이들을 비판하려고 쓴 말이다. 그런데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둔 지금, 어떤 이들은 이 속담을 루터와 종교개혁 자체를 비웃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종교개혁이라는 사건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빛과 그늘을 남겼을까?


    12세기 이후 여러 신앙 쇄신 운동은 16세기에 이르러 극적인 전환을 맞았다. 종교개혁은 이 과정에서, 하나이던 서방 교회가 천주교와 여러 개신교로 분열된 사건이다. 천주교에서 개신교가 갈라져 나왔다고들 말한다. 정확한 말이 아니다. 공식적으로 하나였던 서방 교회가 천주교와 다른 여러 교회로 분열된 것이다. 이 분열을 치르면서 교회는 자기 개혁을 단행했다. 개신교의 종교개혁은 신앙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이끌었다. 천주교의 대응 개혁은 허물어진 기존 교회의 권위와 교리 체제를 정비했다. 이렇게 나뉘어 따로 개혁한 교회들은 이후에 다양한 신학과 지역과 세속 권력이 얽히면서 지금 같은 여러 교단들로 발전했다.


    종교개혁의 빛은 중세 교회의 어둠과 비교된다. 한마디로 중세 서방 교회는 힘을 멋대로 부리는 권력이었다. 권력은 이권과 얽혀 늘 부패를 낳았다. 이 교회 권력은 신자들의 신앙과 일상생활을 잘 돌보지 않았다. 오히려 획일적으로 통제했다. 학교의 신학은 세련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현란한 자기만족에 빠지기도 했다. 그동안 신자들은 교회 조직과 신학을 멀리했다. 대신에 자신의 처지를 위안하는 신앙심을 찾아다녔다. 때로 뛰어난 영성의 대가가 등장하여 이들을 돕기도 했지만, 교회의 가르침과 학교의 신학을 멋대로 조립한 기이한 신심 행위에 빠져드는 일이 잦았다.


    개신교 종교개혁은 신앙의 근본에 대한 고민에서 빛났다. 그것은 ‘성서’에 근거하여 ‘신앙’과 ‘은총’으로 얻는 구원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교회의 전통 이전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최우선이다. 인간은 선한 행동 이전에 신앙으로 구원받는다. 그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주장은 새롭지 않다. 초대 교부들의 성서 읽기와 그 신학에 기대어 개혁자들이 신앙의 근본을 재발견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제시한 탓이다. 개혁자들은 ‘말씀’을 강조하며, 그에 따라 ‘성사’를 설명하고 ‘영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에 중점을 뒀다. 이때 ‘영적’이라는 말은 하느님이 주시는 구원의 깊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성사 안에서 체험한다는 뜻이다. 자국어 성서 번역과 간소한 자국어 예배 개혁 등을 통해서 이런 이해와 체험을 도우려 했다.


    한편, 천주교의 대응 개혁은 보기에 따라 개혁이라는 말이 무색했다. 로마 교회의 권위자들은 교리와 교권 체제가 분명하지 않아서 혼란이 일어났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중세 스콜라 신학의 교리를 이해하기 쉽도록 대중적인 교리 체계를 정비하여 강화했다. 교회의 위계와 치리 방식도 더욱 관료화했다. 이 개혁으로 천주교는 내부 결속을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두 개혁에도 그늘이 있었다. 당시에 발전된 지성적 사고와 논리로 신앙을 지나치게 설명하려다 보니, 그동안 교회 안팎에서 신자들이 삶 속에서 스스로 경험하고 누리던 신앙 양식과 전례 전통을 대체로 무시했다. 신앙과 전통은 복잡한 삶의 과정이 쌓여 만들어진다. 삶의 다양한 결들이 겹쳐 있다. 얼핏 비천하고 미신적으로 보이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는 이런 결들을 느끼기 어렵다.


    그런 탓이었을까? 개신교 개혁자들의 설명은 얼마 후 딱딱한 교리가 되었다. 말씀을 성서로 동일시하고, 성사는 형식으로 치부하며, ‘영적’이라는 말의 뜻도 좁아졌다. 천주교는 단순하게 정리한 교리로 교회와 전례를 더욱 통제했다. 전례 행동은 분열된 교회 사이의 교리 논쟁 소재로 전락했다. 분열된 교회들이 교리로 경쟁하면 서로 정죄하는 일을 피할 수 없다. 교회사학자 디어메드 맥컬로흐는 이렇게 지적한다.


    “종교개혁은 간단히 말해서 두 세기에 걸친 전쟁이라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16세기에는 평화기가 10년이 채 안 됐고, 17세기 중반까지 고작 2-3년이었다. 종교개혁은 이미 자라나던 국가라는 권력 기계를 각각 개신교와 천주교의 옷을 입혀 그 성장을 촉진했다. 그 결과 개신교와 천주교는 이어진 전쟁 속에서 엄청난 피를 뿌렸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종교개혁의 훌륭한 성과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시각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목욕물과 아기를 함께 버리지 않으려면 더 신중해야 한다. 성공회의 개혁은 대륙의 개혁에 비해 약 20년 늦었다. 이 시차는 성공회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성공회 신문, 2011년 5월 21일)


    위 글은 2011년 "성공회 신문"과  “성공회 신학-전례 포럼”에도 게재되었으며, 필자인 주낙현 신부의 허락을 받아 이 홈페이지에 다시 게재한 것입니다. 이 글을 다른 곳에 옮겨 실으시려면 주낙현 신부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주낙현 신부 블로그 http://viamedia.or.kr

    성공회 신학 전례 포럼 http://liturgy.skhcaf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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