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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년 2월 20일]레위기19:1-2,마태5:38-48 그 만큼을 넘어서는 삶이 거룩이다.
  • 청지기
    조회 수: 1683, 2012-11-20 00:58:03(2011-02-21)
  • 20110220                            

    오늘 1독서 레위기에서 하느님은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라고 명령하신다.

    거룩이 무엇이고 어떻게 거룩할 수 있는가?

    하느님은 출애굽한 무지렁이같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거룩한 백성이라고 했다.

    출애 19:5-6, 이제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 온 세계가 나의 것이 아니냐? /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줄 말이다."

    이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되는 <거룩>이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이 세우신 계약을
    잘 지키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즉 거룩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사는 것이 거룩이다.

    그래서 오늘 1독서 레위기는 <거룩하라>는 명령을 선포하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생활 속에서 지켜야 하는 삶의 자세를 말씀하고 있다.

    <거룩>의 절정은 18절 말씀이다.
    레위기 19:18,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개역개정)

    오늘 복음에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레위기의 말씀과 유사한 주님의 말씀이 나온다.

    마태 5:48,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완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레위기의 <거룩하라>는 말씀과
    동일하게 이해해도 될 것이다.

    레위기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삶을 거룩함으로 말한 것처럼
    마태오복음에서도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완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거룩은 “그 만큼을 넘어서는 삶”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되새겨졌던 표현이 있다.
    마태 5:47, “이방인들도 그 만큼은 한다.”

    ‘그 만큼’이란?
    ‘자기들끼리 끼리는 사랑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사랑의 실천이 어느 정도일까?
    이방인들이 행하는 그 만큼도 못한 수준?
    이방인들도 하는 그 만큼?

    ‘그 청년 바보의사(안수현)’의 글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십리까지 간다.>

    “한 후배가 집이 멀어 성경공부 중간에 슬그머니 나가는 것을 알고는 공부가 끝난 뒤 안암동에서 성남시청까지 태워주기를 한 학기 동안 계속했습니다. 모임이나 예배가 끝나면 다들 돌아가는데 늘 차 없이 멀리 가야 할 후배들을 위해 파주 교하리로, 양수리 수양관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거의 자동차는 9개월 만에 25,000 킬로를 돌파했습니다.”

    그는 항상 오리를 가고자 하는 자에게 십리를 간다는 원칙을 지키려고 언제나 차를 탄 사람은 그 집 앞까지 태워다 주었다. 차를 운전하게 된 것은 차 없이 다니는 친구들에게 빚진 마음으로 가능한 섬기고 도와주라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내가 왜 오리를 가야해?’라고 하지 않고
    ‘그래 내가 오리까지는 가준다’가 아니라,
    자원하여 십리까지 가는 자기희생의 사랑이 거룩이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물으신다.

    “그 만큼도 못하는가?
    그 만큼만 하는가?
    그 만큼을 넘어서서 행하는가?“

    거룩은 “그 만큼을 넘어서는 삶”이다.  

    우리는 이런 거룩을 살라고 부름받은 존재들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만큼 그렇게 산다.
    신분의식이라고 한다.
    투철한 군인정신을 가진 사람은 군인답게 산다.

    그 청년 바보의사 안수현의의 인터넷 아이디는 <스티그마>였다.
    <스티그마>란 헬라어로 <예수의 흔적>이라는 뜻이다.
    그가 얼마나 분명한 신분의식을 지니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작은  예수>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대학시절부터 <작은 예수>답게 살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우리를 <성도>라고 부른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 단수형으로 <성인>이다.

    예수님의 피값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의식이 있는 사람은 거룩을 살기 시작한다.

    이것을 오늘 2독서에는 이렇게 말씀한다.
    고전3:16,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

    “내 안에 거룩한 하느님의 영이 살아계신다.
    내가 하느님의 성전이다.“

    이 의식이 분명하다면 거룩을 살 수 있다.

    우리를 거룩하게 살라고 하시는 주님의 마음은 무엇일까?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 레위인이 있다.
    하느님께은 12지파 중에 레위 후손들을 하느님께 예배하는 성전 봉사자로 택하셨다. 레위 지파 중 아론의 후손들이 제사장을 맡고 다른 레위인들은 제사장을 돕은 역할을 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안에 레위인을 택하시고 구별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스라엘이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악들을
    레위인들이 주관하는 제사에 참여함으로 죄사함을 받고
    거룩한 백성의 삶을 계속 살게 된다.

    이렇듯 레위인이 택함받고 구별되어 존재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여 레위인들은 먼저 구별되어 거룩하게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구별하신 이유도 그렇다.
    레위인을 통해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듯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열방을 거룩하게 하기 위함이다.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형통적 이스라엘과 동일한 주님의 비전을 갖고 있는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하느님은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거룩하게 하기를 원하신다.

    모든 족속이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예배하며
    그 말씀대로 사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이 거룩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비전이고 교회의 비전이고
    이 비전을 이루어가는 것을 선교라고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라는 주님의 비전을 이루는 선교적 삶이
    거룩이다.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가 택함을 받고 구원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방인들도 행하는 ‘그 만큼’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꿈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 청년 바보의사 안수현은 이 땅에서 예수의 생명을 품고 살면서
    자신이 가는 곳마다 예수의 흔적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그 만큼’을 뛰어넘는 <스티그마>의 삶이
    우리 모두의 삶이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조심해야하는 것이 있다.
    ‘거룩하라, 완전하라’는 주님의 명령 앞에서
    나 자신이나 타인에 대해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신분은 분명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자녀, 성도이지만,
    실상 우리의 삶은 완전을 향해 거룩해지는 점진적인 과정 중에 있다.

    우리는 모두 공사 중이다.
    우리는 모두 사랑을 배워가는 훈련생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자신이나, 서로에 대해서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아니예요 옛날 알던 그 사람 때론 느리지만 난 알고 있죠
    언젠가 완전해져요
    매일매일 조금씩 매일매일 변하지요.
    Jesus is Changing me(oh, yes Changing me)
    주님께로 돌아선 후 걷고 있죠 은혜 속에
    Jesus is Changing m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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