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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을 살아온 사람 - 하종강

  • "연구소 닫으니 '앵벌이 노동운동가의 말로'래요"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
      
    ▲ 하종강 전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의 인터뷰는 성공회대학교 한홍구 교수 연구실에서 이루어졌다.  

    얼마 전 인기리에 방송된 세시봉 콘서트 마지막에 MBC 노동조합 부위원장인 신정수 PD 모습이 잠시 비쳤다. 짧은 메이킹 필름이었는데 담당 PD인 그는 삭발한 채로 열심히 제작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하종강 전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의 마음도 짠해졌다. 신 PD는 하 소장이 작년까지 강의를 했던 인천대 수업에도 찾아와 MBC 파업에 대해 선전했던 사람이다.

    15일 저녁, 성공회대학교에 마련된 특강을 시작하면서 그는 잘나가는 간판 예능 프로그램의 PD까지 파업에 참여하고 스스로 노동자라고 하는 이유에 대해, 세시봉 콘서트 화면을 시작으로 얘기를 풀어냈다. 들을수록 빠져드는 노동자 이야기, 웃다 울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소문난 노동교육, 역시 명불허전, '하 소장표 강의'다.

    세시봉 콘서트 화면은 이날 아침 강의 슬라이드에 새로 붙인 것이라 한다. 늘 비슷비슷한 것 같아도,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똑같은 강의안으로 강의한 적이 없다. 강의할 대상에 따라 조금이라도 더 쉽게 접근할 방법을 고민한다. 노조라는 이름 달고 활동하는 곳 치고 그의 강의 한번 듣지 않은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는 유명하다. 노조뿐 아니라 각종 단체, 강연회, 교장들 교육까지… 정말 "(강의를) 하려고만 하면 하루도 안 거르고 할 수 있는" 바쁜 강사이기도 하다.

    이날 특강은 성공회대학교 한홍구 교수가 한국노동운동사 수업에 초청해 마련되었다. 5년 동안 최상위 평가를 받았던 인천대 강의도 '박사학위 없는 자'라는 이유로 잘리고, 23년 동안 활동한 '한울노동문제연구소'도 문을 닫으면서 '교수', '소장' 같은 직함을 모두 잃고 '무직'이 된 하종강 전 소장을 강의가 끝난 후 한홍구 교수 연구실에서 만났다.

    연구소가 문을 닫은 후 그의 일상엔 어떤 변화가 있는지 물었다. 인터뷰를 청할 때 "연구소가 없으니 당장 인터뷰할 장소가 아쉽네" 했던 그의 말이 기억나서다.

    "1988년 12월에 처음 이경우 변호사 사무실에 책상 하나만 놓고 노동상담이란 걸 시작했어요. 아무 간판도 없다가 노동, 인권 전문 변호사들이 늘면서 다른 곳과 통폐합도 되고 규모가 점점 커져서 법률 회사의 부설 연구소가 된 거지. 94년에 한울노동문제연구소라는 간판을 달았는데, 그땐 한울의 '한'자도 '아래아'자로 썼어. 노동자들이 읽기 힘든 글씨라는 지적을 받고 그냥 '한'자로 바꿔서 지금의 '한울노동문제연구소'가 됐어요.

    법률 회사의 부설 형태이다 보니 연구소라는 공간이 유지되려면 변호사들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데 20명쯤까지는 가능했어요. 그런데 최근 사무실이 크게 통폐합되서 변호사가 80명이나 되는 큰 법무법인으로 바뀌었어요. 이제 변호사 80명이 동의해야 하는데, 사무실 유지 비용만도 엄청난 상황에서 노동문제연구소를 유지하는 게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현실적으로 우리 연구소가 존재하는 한 기업 사건 맡기 어렵다는 얘기도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문을 닫기로 결정했어요. 함께 일하던 분들 가운데 원하는 사람은 모두 고용승계를 했어요.

    섭섭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분들이 많은데, 전혀 섭섭하진 않았어요. 지금까지 이 공간을 유지하고 지켜준 공이 훨씬 크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이 먼저지. 개인적인 섭섭함은 고마움에 비하면 아주 적어요. 그게 내 생존의 근거지였다면 더 허탈했을 테지만, 내 개인이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다만 그 공간이 없어졌다는 건 생각하면 안타까워요. 그래서 생각 안 하려고 해요. 나 혼자만의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그걸 결정했을 무렵엔 사람들이 눈길을 안 마주치고 다녔어요. 서로 미안해서…."

    '<작은책> 편집위원'과 '노동자교육센터 교육위원'이 당분간 그의 공식 직함이다. '하 소장'은 그가 아주 오래 불린 직함이었다. 이날 아침, 모든 직함이 사라진 후 처음 나간 <경향신문>의 연재 칼럼에는 그의 직함이 '노동과 꿈 대표'로 바뀌었다. 물리적 공간도 없는 웹상의 홈페이지 이름을 대표로 써준 건 파격이다.


    - '이혼당하지 않을 만큼만 해라"

    '노동과 꿈'. 그와 참 잘 어울리는 말이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소박한 꿈을 위해 자신의 노동을 잠시도 쉬지 않았던 그이기 때문이다. 스물여덟에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자원봉사자라는 무직 신분으로 결혼에 성공했고, 서른넷에 상담 일을 시작해 오늘까지 쉼 없이 달려 온 그의 인생. 활동비 10만 원도 고마웠던 때에 상담 일을 시작했고, 설령 활동비를 못 받아도 동일방직 노동자들과 함께 활동할 수 있어 영광스럽기만 했다. 물론 그의 영광이 아내와 가족에게는 고통이었을 테지만.

    "여성운동 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나를 안 좋게 봐요. 우리 연구소의 연구실장도 아내를 한 번 보더니 '하 선배가 돈 벌고 언니가 운동하라고 그러세요. 그게 우리 사회 민주화에 더 기여하는 거예요' 하면서 진짜 정색하더라고요. 제 아내를 보니 '저 훌륭한 여성이 어쩌다. 쯧쯧' 뭐 그런 마음이 들었겠죠.

    얼마 전에 <울지마 톤즈>를 본 아내가 나한테 그래요. '당신은 나를 안 만났으면 그 사람처럼 살았을 거 같더라'고. 자기와 안 만났으면 마음껏 꿈을 펼쳤을 거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 부부가 사랑은 식어도(정말 식었다는 건 아니라고 여러 차례 강조 후) 부채감으로 사는구나' 싶었어요. 결혼 30년이 되도록 나에게 그런 신뢰를 준다는 게 정말 감격스러웠어요. 우린 서로에게 '나를 안 만났으면 이 사람 인생이 더 나았을 텐데' 하는 자격지심과 부채감이 있어요. 그게 우리의 관계를 다잡는 기둥이 되는 것 같아요.

    우리 가족들도 마찬가지죠. 다른 가족들이 겪는 어려움이 우리에게도 있지만 지혜롭게 푼 편이에요. 많이들 아는 이야기인데, 내가 집에 늦게 들어갈 때 가족들이 대문에 나를 규탄하는 대자보를 붙였잖아요. '하종강은 귀가 시간 엄수하라! 아빠와 놀고 싶다!' 그거 쓰면서 얼마나 재미있었겠냐고. (웃음) 그런 식으로 푸는 거죠."

    "아내가 신혼 때 정한 기준이 '노동운동 하는 남편한테 일찍 들어오라고 할 생각은 없으니, 최소한 이혼당하지 않을 만큼만 해라. 일주일에 두 번만 10시 이전에 들어와라.' 그거였어요. 그걸 못 지켜서 그 대자보가 나온 거예요. 내 활동의 최저값과 최대값은 그게 기준이에요. 불성실한 활동가가 되지 않을 만큼이 최저값, 이혼당하지 않을 만큼이 최대값.

    한번은 교원 임용에 합격한 사범대생, 교대생 워크숍에 갔는데 한 학생이, 어머니가 교사신데 벌써부터 전교조 하지 말라고 계속 다짐을 받으신다는 거예요. 그런 갈등을 어떻게 푸느냐고 나한테 물었어요. 그래서 모녀지간의 인연이 끊어지지 않을 만큼, 불성실한 교원이 되지 않을 만큼, 그만큼만 하라고 그랬어요."


    - "내가 밤을 새면 저 노동자가 따뜻한 밥을 먹겠지"

    그가 평생의 자랑으로 여기는 타이틀은 '전태일문학상 수상자'다. 그는 살면서 만났던 평범하지만 매우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너무 늦게 만난 사람들>로 써서 94년 제6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진정성 있는 이야기가 어떻게 세상에 울림을 줄 수 있는지 그 기록을 통해 보여주었다. 30년 넘는 세월 동안 만난 숱한 사람들은 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상담 일이 어찌 보면 나를 지켜줬다고 볼 수 있어요. 노동운동 분야에 30년 활동했다면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해요. 지금 내 나이가 쉰일곱인데 젊은 학생들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그래요. 근데 노동 상담 업무에는 사람을 지켜주는 고전적인 휴머니즘 같은 게 있어요. '내가 이 서류 뭉치를 붙들고 며칠 밤을 새면 저 노동자가 따뜻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게 된다' 하는 그런 마음이 들거든요. 90년대 초반에 소비에트는 해체되고, 92년 대선에서 운동권 90%가 지지했던 비판적지지 노선도 비참하게 실패하면서 세계관이 흔들렸던 사람들 많았어요. 그때 내 친구들도 다시 복학하고, 사법시험 준비, 영어회화 그건 걸로 썰물처럼 빠져나갔으니까요. 근데 나는 내가 수고하면 노동자와 가족들이 따뜻한 방에서 발 뻗고 자는 데 보탬이 되는 일이 있었던 거죠. 그게 나를 지켜줬어요.

    한 날은 사람들이랑 밤새 서류 만들고 자료 꾸미고 새벽에 셔터 내리고 집에 가려는 길이었어요. 어떤 노동자가 와서 손을 잡아요. 부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산재 인정받기 위해 상담했던 분인데, 나보다 나이도 많은 인천 삼익악기 노동자였어요. 그분이 우리에게 '정말 내가 제대로 찾아왔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집사람하고 붙잡고 많이 울었어요' 그러면서 열 번도 더 같은 말을 하는 거예요.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나를 지금까지 지켜준 거죠."

    어슴푸레한 새벽, 인적 드문 거리에서 동이 터 올 시간까지 노동자를 위한 자료를 준비하고 셔터를 내리는 사람들, 자신 같은 사람이 아내와 따뜻하게 밥을 먹을 권리를 위해 밤새 고생을 마다 않은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늙은 노동자. 그 모습이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그려져 살짝 울컥했다. 말하는 그의 목소리도 젖어든다. 아마 그 늙은 노동자도 그랬을 것이다. '이번엔 제대로 찾아왔을까? 이 사람들이 정말 나를 위해 애써 줄까?' 세상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대접 한번 못 받았을 그 노동자가, 실낱 같은 희망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복잡한 마음으로, 그 새벽까지 사무실 앞을 서성였을 생각에 그도 많이 서글펐을 것이다.


    - 그의 장수 비결 '최대공약수의 룰'

    그는 그 나이의 남성 노동운동가들이 하지 않는 행동을 자주 한다. 강의하다 울먹이기, 여성들과 수다 떨기, 조직에 속하지 않기, 조직에 안 속해도 욕 안 얻어먹기 등.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바닥'에서 욕먹지 않는 게 과연 가능할까 싶은데, 내가 본 사람 중 그는 이 바닥의 좌우를 넘나들고 상하를 막론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인물이다. 이 속 시끄러운 바닥에서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단지 뛰어난 강사라고 해서 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텐데.

    "조직사업도 한 10년 해봤어요. 후배를 조직에서 제명해보기도 했고, 나도 조직 내에서 내 일을 금지당하는 결정을 받아보기도 했고. 그런 일을 겪으면서 감당이 안 됐어요. 조직사업은 누군가 할 일이고 꼭 필요한 일이지만 내가 감당할 일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그런 일들을 나는 못 견디겠더라고요. 그래서 노동상담 영역을 선택했을 때 탓하는 후배들이 많았어요. '편하게 살지 말고 거기서 기어나오라'고 하는 후배도 있었어요.

    그때 후배들한테 그랬어요. '노동상담을 선택한 건 운동권 내에서조차 출세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영원히 운동의 중심에 설 수 없으니까.' 한마디로 '배 째라'는 거지.(웃음) 정말 작은 노동조합, 조합원 열 몇 명도 안 되는 그런 노동조합의 간부들만 봐도 나는 정말 존경스러워요.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에. 내가 너무 버거워서 포기한 길을 가고 있는 그 사람들이 진짜 존경스러워요. 진심으로."


    그와 책 모임을 통해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나는 그가 장수하는 비법을 알았다. 그는 늘 최대공약수를 찾는다. 자꾸 선을 긋고 다른 걸 확인하는 것보다, 공통점, 장점, 합의점들을 찾아 함께하는 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서다. 물론 뚜렷한 자기 생각도 있고, 우리 안의 차이를 명확하게 하는 일도 진보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군가 그걸 하는 것도 존중하지만, 자신은 차이를 확인하는 일엔 되도록 말을 보태지 않는다.

    최근에 그가 최대공약수 룰을 깨고 한 쪽을 비판하는 행동을 취하려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한진중공업의 김진숙이 김주익이 올랐던 크레인에 오른 지 벌써 두 달째, 그 곳에서 혼자 밥까지 굶고 있을 때 이를 모르쇠한 사람들에게 너무 화가 나서다. 부산에 갈 때마다 그녀를 찾아 안부를 묻고 온 것만 해도 몇 차례, 답답하고 화난 마음에 욕먹을 각오하고 나설까 생각했다. 최대공약수의 룰을 지켜온 건 그게 운동을 위해 더 나은 방법이란 믿음 때문이었지, 한 노동자의 목숨과 실리를 맞바꾸는 게 운동이란 이름으로 행세하도록 하기 위함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 '광대의 부채'와 같은 사람

    그는 얼마 전 작은 필화를 겪었다. 세시봉 콘서트 때문이다. 콘서트는 정말 감동스러운데 저기 나온 가수들이 적어도 담당 PD가 왜 삭발했는지 그 이유라도 알았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온라인 공간에 했다가 비난을 받았다.

    "사람들이 엄청 분노하더라고요. 노래는 제발 노래로 좀 끝내면 안 되겠냐고. 나는 애완동물 안고 다니면서 자기를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들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파업하는 노동자들에게도 저런 사랑을 좀 가져주면 좋을 텐데.' 노동교육 하는 박준성 선생은 실제로 강아지한테 '엄마가~' 어쩌고 하는 사람한테 '아니, 어쩌다 개를 낳으셨어요?' 하고 물은 적도 있대요. 하하하."

    알고 보면 매사에 이렇게 까칠한 남자들인데, 말투랑 글투가 착해서 사람들이 모르는 거라고 했더니, 한홍구 선생이 "평소 착한 척하느라고 받은 스트레스를 그런 데 푸는 거지" 하며 웃는다. 사실 그동안 바빠서 뒤끝을 발휘 못해 그렇지 섭섭한 게 있었다면서. 그러자 이번에는 하종강 소장이 받아쳤다.  

    "대학 강의 잘린 사람한테 베풀어주는 가장 큰 호의가 오늘 한홍구 교수처럼 강의 주는 건데, 사실 맨 처음 대학 강의 부탁 받은 것도 한 교수 통해서예요. 10년쯤 전에 성공회대에서 강의해 달라고 요청이 왔는데, 그땐 노동운동가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다고 회의에서 안 하기로 결정했어요. 근데 나중에 어찌어찌 인천대 강의를 하게 됐는데, 최근에 잘리고 나니까 한 교수가 그때 내심 섭섭했다며 이제야 말을 하더라고. 완전 '뒤끝 홍구'지. 하하."

    그는 괜찮은데 주변 사람들이 더 지금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오히려 그동안 직함이 없어지는 고비가 있을 때마다 전화위복이 된 경험이 있어 내심 기대가 될 정도인데, 그런 주변의 걱정들이 고맙고 미안할 뿐이다. 연구소가 문을 닫았다고 하니 그의 홈피에는 "평소 노동문제에 대해 온정적인 접근이 불만이었는데, 자기 문제는 어떻게 접근하는지 두고 보겠다"는 사람도 있고, "프롤레타리아 무장투쟁을 강조하지 않는 앵벌이 노동운동가의 말로"라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런 주장을 잘 받아들이는 편이에요.(웃음)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그런 면이 있는 사람이니까. 물론 '일리(1, 2)'는 있어도 '삼사(3, 4)'는 없다고 하지.(웃음) 대부분 대중 강좌나 언론 기고를 보고 나를 판단하는 분들일 텐데, 나는 그런 공간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무장투쟁을 얘기하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내가 개량이란 소리를 들어도 뭐 할 수 없지."

    그가 강의에서 잘하는 말이 있다. "줄 타는 광대가 한쪽 손에 부채를 쥐고 있는 건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다. 온통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우리 사회에서, 노동운동은 이 부채와 같은 존재다." 아마도 그가 노동운동에선 이 부채와 같은 존재일 것이다. 애완동물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노동자들을 연민하는 마음, 그들의 따뜻한 잠자리와 오붓한 밥 한 끼를 위해 애쓰는 게 자신의 삶을 지키는 유일한 길임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마음. 그게 지금껏 그가 이 자리에 오래도록 남아 있게 한 힘일 것이다.


    ⓒ 2011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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