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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년함께 칼럼 : 누가 나그네인가? - 이무하

  • 워낙 어떤 공식적인 조직이나 모임에 깊이 연루(?)되는 것을 꺼려하는 편이어서 공식 직함을 가져 본 적이 거의 없다시피 한데 얼마 전 ‘희년함께’ 지도위원이라는 분에 넘치는 직함을 갖게 되었다. 기실은 명색뿐인, 지도는커녕 지도를 받아야 할 처지이고 유일하게 기여하는 바가 있다면 가끔 대내외적 행사가 있을 때 보잘 것 없는 노래로 모임을 섬기는 일이 전부이다. 그런데 올 해 막바지에 ‘희년함께’로 부터 예기치 않았던 (자못 기습적인)막중한 미션(?)이 주어졌다. 바로 이 칼럼을 부탁받은 것이다. 이 역시 내겐 과분한 무엇이나, 지은 죄가 있어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서투른 타자솜씨로 진땀을 빼고 있다. 그나마 노래가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이듯 글 또한 내가 쓸 수 있는 무엇을 쓰는 도리밖에...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레 25:23) 이는 ‘희년함께’의 표어이기도 하거니와 적으나마 희년에 관심이 있는 경우라면 익히 아는 귀절일 터이다. 그런데 이 글은 바로 그 뒤에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는니라”는 후반절 말씀과 관련해서 나그네라는 주제와 더불어 좀 생뚱맞지만, 나그네 곧 떠나온 자의 정서로서의 그리움에 대한 것이다. 전자가 누군가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으로서의 행동강령이라면 후자는 “이를 수행해야 할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관한 무엇이다. 그 중요도나 무게감에 있어 앞 귀절과 견주어 결코 가볍지 않음은 주어진 명령을 수행함에 있어 마땅히 그리 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밝히고 있다.


    만일 누군가가 자신이 토지 곧 땅의 주인이 아닌 나그네요 우거 곧 잠시 더부살이하는 처지임을 잊고 있다면, 저는 주어진 명령을 지킬 수 없을 뿐더러 설사 지킨다 하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도리이지만) 남들은 지키지 못한 명령을 자신은 행했다는 자기 의(義)와 더불어 비록 사고팔지 않았으되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땅이 부지중에 자기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나마도 적지만 대부분의 경우일는지도....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는 ‘희년함께’의 표어는 당연히 나중 말씀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누가 나그네(일반적 의미가 아닌, 말씀 안에서의)인가?


    누군가가 많은 땅과 재물(땅과 무관하지 않은)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 스스로 나그네임을 깨닫기란 쉽지 않을 터이다. 반면 예수께서 그러하셨듯이 머리 둘 곳 없이 떠도는 경우라면 그 삶의 정황 자체만으로 그는 얼마쯤 나그네라 할 수 있을 터이다. 가난하고 애통한 자가 복이 있다는 역설적 말씀은 곧 나그네는 복이 있다는 말로 바꾸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물론 집 없이 떠돌거나 가난 자체가 복은 아니며 그것이 정작 하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무엇은 아닐 터이다. 어떤 부모가 그러하겠는가? 요컨대 우리 자신이 나그네임을 깨닫고 그분께서 명하신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떤 상태가 유리한가를 생각하는 것은 결코 어리석거나 부질없는 일이 아니다. 허나 가난하다고 해서 다 나그네가 되는 것은 아니며 부자라고 해서 결코 나그네가 될 수 없는 것 또한 아니리라. 그 행위와 마음의 중심을 아시는 그 분께서 판단하실 일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단지 땅을 팔지 말라는 계명을 지켰다(부동산 투기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나그네가 되는 것은 아니며 또 지금은 집이 없어 나그네처럼 떠돌지만 장차 내집 마련이라는 생의 제일 명제와 나아가 보다 풍요롭고 안락한 삶만을 추구한다면(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와는 상관이 없을 터이지만) 그 또한 나그네가 아니다. 세상에서는 부자가 되기 힘드나 그 분의 나라에선 나그네가 되기 힘들다는 역설.... 부자가 나그네가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과 같고 한편 가난하고 또 정처 없이 떠도는 자라고 다 나그네가 아니라는..... 그렇게 세상에는 두 종류의 나그네가 있다. 먼저는 위에 레위기  말씀에서처럼 이 땅에서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이나 그 분과 함께하며 종래에 돌아갈 곳이 있는 경우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몰라 하릴없이 떠 돌 수밖에 없는 덧없는 인생으로서의.


    누군가 그리움이 인간 정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근원적 무엇이라 했던가. 그렇다. 그리움은 나그네 곧 떠나온 자의 정서 그 자체이다. 우리는 모두 떠나온 자들이다. 가깝게는 순진무구했던 어린 시절 고향과 모태와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생명의 기원 곧 에덴(본향)으로부터. 나그네가 둘로 나뉘듯 그리움 또한 그러하다. 지금은 멀리 떠나와 있지만 거기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으며 언젠가 돌아가리라는 소망어린 그리움과 돌아갈 곳을 알지 못하기에 상실과 허무, 때로 엄습해오는 두려움과 절망의 정서로서의 그것이다. 창세기에 바로 이 두 종류의 그리움을 지닌 나그네가 등장한다. 아담과 하와로부터 아벨과 셋으로 이어지는 계보와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 부모가 떠나온 에덴은 물론 가족으로부터도 떠나야 했던 가인과 그 후예들이다.


    이들 두 나그네가 나뉘게 된 것은 아벨과 가인이 드린 제사(예배)에 기인한다. 예배의 기원이자 모범은 하나님께서 에덴으로부터 아담과 하와를 내보내실 때 저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기 위해 양을 죽이신 것에서 비롯된다. 잘 아는 것처럼 가죽옷은 은혜를 나타내고 예배는 바로 하나님과 그 분의 은혜를 기리는, 곧 그 분을 그리워하고 그 행하신 일을  기념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본을 보이신 대로 양을 잡아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았다. 허나 문제는 제물이 아니라 그 심중에 그 분을 향한 참된 그리움이 있었는가의 여부이다. 결국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는 인류최초의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부모를 떠나 에덴 동편 ‘유리하는 자’의 땅 놋에 거하면서 에녹이라는 이름의 최초의 도시를 건설한다.


    가인이라고 왜 하나님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었겠는가. 허나 그 그리움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과 가족에 대한 상실과 원망, 회한 같은 무엇이었을 터이다. 그러한 허무적 정서는 다름 아닌 불순종 곧 죄의 열매이며 가인의 후예들은 조상 가인이 범했던 죄를 더욱 확대, 심화시킨다. 자신의 죄는 가인이 받은 벌의 열배가 되리라고 호언장담했던 4대손 라멕이 씰라로부터 나은 아들 두발가인에게서 각양 날카로운 기계 (무기로 사용되었을)곧 파괴적 열매가 나타나고 다른 한편 첫 아내 (라멕은 최초로 두 아내를 취했다) 아다에게서 나은 아들 유발은 수금과 퉁소 잡는 자의 조상이 된다. 아마도 그는 할아버지 가인의 이름을 딴 두발가인과는 달리 유독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였음에 틀림없다. 그는 해질녘이면 조상들이 떠나온 고향 서쪽 하늘, 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만든 수금과 퉁소를 불어 짐짓 그리움을 달랬을 터이다. 그는 최초의 악기 제작자이자 연주자로 예술의 기원인 셈이다.


    모든 인간정서의 기저에 그리움이 있다면 예술 또한 그리움의 정서가 주조라 할 것이다. 허나 그것은 다름 아닌 상실과 회한으로서의 허무적인 무엇이며 거짓 위로(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희미해지고  마침내 돌아갈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않는, 마침내 “그곳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기억상실 상태에 이른다(가인의 계보를 따르는 오늘날 니체의 후예들은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냉소한다). 그렇게 본향에 대한 그리움은 무의식의 심연에 가라앉게 된다. 이제 예술은 위로를 넘어 즐거움과 쾌락의 도구로서 존재이유를 갖는다. 이 또한 두려움과 절망을 은폐하기 위한 무엇에 불과하다. 고대의 예술가들은 저들이 속한 공동체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리라 믿었던 이방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던 제사장이자 지배계급이었다.


    차츰 제사와 정치가 분리되고 힘과 물적 토대에 따른 계급이 나뉘고 잉여생산물이 생기면서 일찍이 노동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지배계급 곧 유한계급은 여가시간을 즐길 거리가 필요하게 되는데 일단의 예술(주로 음악)가들은 그들의 요구에 복무한다. 여기서 뜬금없이 다시 땅 이야기로 돌아가면 요컨대 땅을 가지지 못한 예술가들은 대개 넓은 땅을 가진 왕이나 귀족들에게 예속 혹은 고용되거나 자유로운 신분, 가령 중세의 음유시인(troubadour)들과 같은 부류는 방랑자처럼 돌아다니며 호구지책으로 부자나 귀족들을 위해 노래했으며 그들 또한 땅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여 올바른 예술(그 분의 성품과 왜곡됨이 없는 희로애락의 표현으로서의)을 위해서도 땅은 누군가에 의해 독점되거나 주거 이동의 목적이 아닌 투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 필요이상의 많은 땅과 재물을 쌓아두어 먹고 마시고 즐길 거리가 허다한 누군가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기억도 없는 아득한 과거 혹은 믿지도 않는 먼(허나 도둑같이 임할)미래 다가올 그분의 나라를 그리워해야 할 이유는 없을는지 모른다. 더러는 돌아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떠날 때까지 자신의 땅을 다 밟아 보지 못하고 쌓아둔 재물을 다 쓰기도 전에 거기 묻히고 말 터이다. 또한 생계유지를 위해 혹은 여인을 유혹하기 위해 노래하던 유발의 후예들 또한 방랑자일지언정 나그네는 아니며 그의 노래 밑바닥에 흐르는 그리움의 정서 또한 소망어린 무엇이 아닌 더러는 애틋하고 아름답기도 하겠지만 한낱 덧없는 감상과 회한 따위의 허무적 무엇이리라.


    허나 땅을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자신의 본래적 정체 곧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요 잠시 이 땅에 우거하는 자임을 분명히 기억한다면 땅을 가진 자는 더 이상 땅을 사고팔지 않을 것이요 땅이 없는 자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하나님이든 누구든 원망하지 않을 터이다. 나아가 필요이상의 땅이나 재물을 가진 자는 주저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과 나눌 것이며 가난한 자 또한 그 가난을 면하기 위해 애써 비굴해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난함을 넘어 (공)의에 목마르고 핍박 받을 용의가 있는, 더불어 지금 여기에 임해야 할 하늘나라와 궁극적인 본향 곧 하늘 집에 대한 참된 그리움을 지닌 나그네라면.

댓글 1

  • 김광국

    2011.01.21 11:28

    예수원에서 같이 식사한적이 있는 이무하선생님~~수줍음과 겸손함이 온몸이 배어있었지요~지금은 선교사가 되시어...
    그렇군요..감상적인 애틋함과 인간적 회한으로 포장된 언어들 역시 죄의 열매일 뿐이라는 것을요~
    "방랑하기 위한 공허"를 버리고 "사랑하기 위한 비움"의 발걸음을 가진 나그네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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