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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은사 땅밟기에 관련된 글... 퍼왔습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용어인데, 꼼꼼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봉은사 땅밟기와 관련되 두 가지 글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가지게 계신지 궁금합니다.

    글1.[문화인류학과 신학이 보는 봉은사 땅 밟기 기도] 트위터에서 @JunghoonYoon님 글입니다.

    글2.[봉은사 신도들과 명진 스님, 죄송합니다.] 청어람아카데미 양희송 님 글입니다. http://post-evangelical.tistory.com/65

    글3. [진정한 땅 밟기 기도란?] 국민일보 신상목 기자 글입니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s&arcid=0004260734&code=23111111



    글 1

    [문화인류학과 신학이 보는 봉은사 땅 밟기 기도]

    유학오기 전 강남에 살았고 강남에 있는 교회를 섬겼고 그렇게 봉은사 옆을 많이 다녔지만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한 곳을 비디오를 통해 보게 되네요.ㅋ "땅 밟기 기도" 때문에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생겨 이 문제에 대해 분석하고 올바른 자세를 제시하려 합니다.

    제가 찬양팀 리더를 할 당시 후배의 소개로 온누리교회 찬양인도자 학교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영상을 띄운 찬양인도자 학교와는 다른 곳입니다. 그런데 그때 강의를 하셨던 분은 유명한 찬양인도자 목사님이셨고 단기 선교 기간 중에 우상을 섬기는 큰 절을 향해 기도했는데 다시 가보니 그 절이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더라는 예화를 들었습니다. 과연 그 기도 때문에 그 절이 무너졌을까요?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팔레스타인지방)으로 향하던 중 여리고성을 돌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였을때 성이 무너진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이스라엘은 여리고성을 쉽게 함락 했죠. 그러나 그러한 사건은 구약시대에 특별히 일어난 기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땅 밟기 기도(Prayer Walk)는 대부분의 단기선교 사역 혹은 찬양 인도자 훈련 혹은 전도훈련에 도입이 되어 실시되고 있습니다. 저는 기도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다만 그러한 기도를 하면서 크리스천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관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땅 밟기 기도에 들어 있는 컨셉 중 하나는 "그 지역, 그 땅에 가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장에 가서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그 지역을 통치하고 있거나 지역을 다스리는 악한 영 혹은 사단이 기도를 통해 결박되며 떠나가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우상을 섬기는 건물도 때로 마치 여리고성이 무너지듯 기도를 통해 무너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역 신”이 있다는 컨셉은 성경적 관점이 아닙니다. 샤머니즘적인 컨셉입니다. 1980년대 이후 성령의 은사 운동인 제3의 성령 운동이 시작되면서 은사, 예언, 축사, 신유를 추구하던 기독교 종파는 성경적 세계관 보다는 종교적 혼합주의(Religious Syncretism)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세계관은 성경적 세계관이 아닌 인도-유러피안 세계관으로 능력대결(Power Encounter)을 선교, 전도, 신앙에 도입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도 이러한 사단과의 능력대결이었다고 주장하며 지역마다 그 지역을 다스리는 악한 영(음란, 우상, 살인)이 있다고 믿고 땅 밟기 기도를 함으로 그 지역 신 혹은 영을 결박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선교를 가서 그 지역을 정탐할 때 영적 도해(Spiritual Mapping)을 통해 영적 상황을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유흥가가 많은 곳엔 음란의 영이 우상이 많은 곳엔 우상의 영이 소비가 심한 곳에 사치의 영이 존재한다고 그리기도 합니다. 또한 각 지역마다 토착 신이 있어 기도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영적 도해 자체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땅과 영역은 이미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있는 곳입니다.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대형교회가 있는 지역엔 선한 영만이 존재해야 할텐데 아리러니 하게도 강남의 대형교회가 있는 곳 주변은 오히려 휴흥가가 교회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역삼동의 ㅊ 교회 강남역의 ㅅ 교회 신림동의 ㅇ 교회를 보더라도 주말이면 온통 유흥과 쾌락을 탐닉하는 이들로 밤마다 흥청거리고 있습니다. 소비의 중심지라 할 명동의 ㅇ 교회도 소비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영적도해를 통해 본다면 이 지역의 음란의 영, 소비의 영이 가득한 곳에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셈이죠. 오히려 봉은사가 있는 지역은 조용한 주거지 주변이라 할 수 있고 상대적으로 정결한(?) 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역의 신 때문에 우상을 섬기는 나라가 되고 지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종교, 사회학적 관점에서 그리고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그 지역 사회와 사람들을 분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은사주의 운동이 토착 샤머니즘과 결합된 형태를 보임으로 기독교적이지 않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땅 밟기 기도”를 통한 “능력대결”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궁극적 승리를 주장합니다. 당장은 예수님이 사단에게 패배한 것 같고 십자가에 죽음으로 허무하게 진 것 같지만 3일만에 죽음에서 부활 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고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위치에 계심으로 사단을 이기고 승리하셨음을 강조합니다. 사단은 이미 예수님에게 패배하였지만 궁극적 승리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 집니다. 즉 "이미" 예수님은 승리하셨지만 "아직" 승리는 완성되지 않은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의 이중적 상황이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중적 상황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미 예수께 패배하였기에 능력대결이 아니라 승리를 선포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 사단과 그리스도인이 싸워야 하는 능력대결 차원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땅 밟기 기도를 통해 마치 자신이 봉은사를 무너뜨리고 우상을 타파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경에서는 더 큰 힘은 그리스도인이 예수의 삶을 닮고 그분처럼 희생하는 십자가의 삶을 삶으로 삶을 통해 “진정한 예수가 누구셨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참된 제자의 삶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무당이 굿을 한다고 해서 액운이 없어진다고 믿는 샤머니즘적인 신앙과 같이 땅 밟기 기도를 해야 사단이 결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고 사단의 머리를 밟아 부수었기에 그대로 믿고 선포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땅 밟기 기도 보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고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봉은사에 가서 기도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이슬람 모스크에 가서 그렇게 했다면 큰 변을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전에도 제가 이슬람 선교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언급했듯이 삶과 분리된 신앙생활과 종교생활은 결코 영적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끊임없이 강조한 것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대로에 서서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닌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과 같이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글 2.

    1. 저는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사회에서 종교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것을 매우 걱정하고 있는 한 개신교인입니다. 오늘 몇몇 개신교인들이 봉은사에 들어가서 공공연히 기도하고, 불교 신도들에게 매우 무례한 발언을 하는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입장 바꾸어 생각해보면 만약 어떤 교회에 타종교 신자들이 몰래 들어와 교회당 곳곳에다 부적을 붙이거나, 건물이 무너지고, 공동체에 분란이 생겨서 자신들의 종교가 흥왕하도록 기도를 하고 갔다면, 그리고 그런 동영상을 돌려보면서 그런 행위를 더욱 열심히 하도록 독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그 교회 목사님이 할 일이 ‘한번 껄껄 웃고 말 일’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분노는 이해할만한 일이며, 당사자인 봉은사 신도들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바로 잡아야 한다고 느낄 일일 것입니다.

    어쩌면 조만간 당사자들이 사과를 하거나, 소위 개신교를 대표하는 한국기독교협의회(NCCK)나 한기총 같은 기구들이 나서서 유감을 표명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사건은 이미 당사자들의 개별 해프닝을 넘어 개신교 전반의 문제로 번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제도적 기구가 개신교인 개인의 신앙의지를 다 대변하지 못합니다. 개신교(改新敎)는 개신교(個信敎)이기도 합니다. 저는 차라리 이번 사건을 정말 불쾌하게 느끼고, 사과를 할 마음이 있는 개신교인 개인들이 자기 진심을 전달하는 것이 공식적 유감표명 따위보다 훨씬 나은 방법이라 생각하게 되어 이렇게 글을 씁니다.


    2. 우선, 저는 이번 일을 ‘일부 몰지각한’ 이들의 짓으로 규정하면서 개신교 전반은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피해가려는 논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올 것이 왔고, 드러날 것이 드러났을 뿐입니다. 드러나서 문제가 될 것이라면, 숨어서 해도 문제가 될 일입니다. 이런 유의 행동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에 대해 사건의 당사자들에 앞서 저 자신부터 먼저 반성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동영상에 나오는 것은 사실 저 같은 사람들이 20여년 전에 열심히 했던 일들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종교간 갈등, 특히 개신교와 불교의 갈등은 ‘우상숭배’ 등의 논란 속에 이어져 온 해묵은 현상입니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대적기도’를 한다든지, ‘땅밟기 기도’를 한다든지 하는 식의 공격적 양상을 띄게 된 것은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점점 대중적으로 강화되고 확산되어온 흐름입니다. 제가 대학시절 다닌 교회는 찬양운동을 열심히 하는 곳이었는데, 양상은 조금 달랐을지 모르나 여름이나 겨울방학이면 국내외로 장기간 전도여행을 떠나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언제나 그 지역의 ‘영적 분위기’를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의 존재를 ‘영적 도해(spiritual mapping)’로 파악하고, 핵심적 진지에 대한 ‘대적 기도’를 하는 것으로 전도여행을 시작하곤 했습니다.    

    이런 전도여행/선교여행은 참가자들에게 매우 강한 신앙적 훈련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적 군사’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나태한 일상에서의 삶을 새롭게 다잡는 계기가 되곤 했습니다. 저 스스로 이런 과정을 거쳐 신앙이 어느 정도 자라났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교회에서 대중적 선교열기가 고조되기 시작한 90년대 이후, 교회 내에서는 ‘영적 전쟁’을 독려하고,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점점 더 보편화 되어갔습니다. 그래서, 해외에 나가면 그것이 이슬람권이든, 힌두권이든, 불교권이든, 공산주의 국가이든, 다 기도로 그 땅의 악한 영을 무찌르고, 영적 승리를 선포해야만 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이런 생각과 기도의 행태는 매우 보편화되고 있는 것이었기에 남 탓을 하기에 앞서 스스로 이런 문제에 대한 자각과 반성이 선행되어야 마땅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3. 제 경우에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는 제 신앙이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내 신앙의 진리값을 타인의 신앙을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입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이기 위해서 상대는 악마의 자식이 되어야만 한다면 그 진리는 ‘홀로 설 수 없는 진리’일 것입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늘 ‘외부의 적’을 통해 확인해야 하는 이분법적 관행은 우리를 쉽게 영혼의 불구로 만듭니다. 그 결과 우리는 정작 싸워야 할 내부의 죄에 대해서는 관용적이 되었고, 외부의 타자를 향해서는 과도하게 배타적이 되어 ‘표리부동’한 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위선’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가 위선적이란 평가를 벗어나려면 이런 행태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둘째, 언어가 의식을 지배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면서, 적절한 신앙언어를 갖지 못한다면 신앙은 왜곡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봉은사에서 일어난 ‘땅밟기 기도’는 미숙함이 빚어낸 사건이자 하나의 해프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제는 숨길 수 없이 한국 개신교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공격적 선교’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런 언어는 단지 상징적인 언어에 불과한 것이지 실질적으로 타종교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저는 점점 더 절실하게 느낍니다. ‘인식론적 폭력이 물리적 폭력으로 전환되는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에 불과하다’고요.

    개신교 신앙언어에 너무나 빈번이, 그리고 깊숙이 들어와 있는 ‘전투적 용어’들은 먼저 우리의 심성에 전투적 정서를 고양시킵니다. 그런 정서를 오랜 시간 접하고, 그것이 자연스러워지면 그것이 곧 내적 태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것이 개인과 집단의 정서를 형성하게 되면 어느 순간 그것이 물리적으로 표현되었을 때 그것을 불편하거나, 잘못이라고 여기는 내적 저항감이 이미 사라지고 없기에 아무런 제동장치 없이 튀어나가게 마련입니다. ‘영적 전쟁’을 내면화하고 자신을 ‘영적 전사’로 강렬히 인식하는 상황에서는 ‘언어적 폭력’이 자연스레 저질러지고, ‘정복하려는 의지’가 제2의 본성이 되고 맙니다. 개신교권의 이런 전투적 태도는 부인할 수 없이 이슬람권이나, 북한이나, 제3세계 이민자들을 향해 쉽게 폭력적으로 표출됩니다. 저는 개신교가 사력을 다해 ‘사랑, 평화,화해, 용서, 희생, 회개, 낮아짐’ 등의 단어가 신앙의 중심 언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전도나 선교는 본질상 내 신앙을 상대에게 강요해서 얻어질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나타난 개신교 신앙의 핵심에는 ‘종교의 자유’ 혹은 ‘양심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침해할 수 없는 권리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부정하는 것 자체는 개신교 신앙을 그 근본부터 훼손하는 자기부정이 되고 맙니다. 물론 서양 역사는 숱한 종교전쟁으로 얼룩져 있습니다만, 적어도 그런 역사를 지나면서 개신교는 스스로가 다수 종교이건 소수 종교이건 간에 그 사회에서 ‘종교의 자유’를 신장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개신교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런 자명하게 알아온 전통이 어이없이 훼손되는 듯한 경우를 자주 접하면서 “개신교가 특혜를 봐서 좋다”는 인식보다 “우리가 알던 개신교 신앙은 이렇지 않다”는 낯설음이 적지 않았습니다.


    4. 불교와 개신교가 만날 때, 불교의 가장 좋은 모습과 개신교의 가장 나쁜 모습을 대비시키거나, 반대로 불교의 가장 나쁜 사례와 개신교의 가장 좋은 측면을 비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종교간 교세 경쟁의 양상으로 만날 때면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지곤 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에 두 종교가 진리의 대결이란 것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불교와 개신교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놓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은밀히 뒤로 상대를 거꾸러뜨리자는 식은 어떤 관점으로 보아도 정당화 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의 사건에 대해서는 한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용서를 구하고, 깊이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글3. [진정한 땅 밟기 기도란?]

    [미션라이프] ‘봉은사 땅밟기’ 동영상 하나가 온 나라를 들끓게 하고 있는 가운데 땅밟기 기도와 선교 행태가 도마에 올랐다. 단기선교의 대표적 활동으로 자리잡은 땅밟기에 대한 재고 또는 폐지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선교계는 이미 ‘땅밟기 선교’에 대한 논의가 끝났다. 성경의 자의적 해석과 선교현장 문화를 도외시하는 경향 때문에 현장 선교사들 사이에선 기피 방법이 된 것이다.

    이러한 땅밟기 기도가 해외 단기선교의 현장에서 서울 강남 한복판 봉은사 마당과 대웅전으로 옮겨온 것이다. 대한민국 안에서 행해졌던 땅밟기가 이토록 거센 반대와 혐오감을 던졌다면 이슬람권이나 힌두권에 속한 나라에서 숱하게 했었을 땅밟기는 현지인들에게 어떤 파장을 줬을까.

    일명 ‘여리고 기도’로 불리는 ‘땅밟기 기도’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그가 밟는 땅을 다 주시겠다”(수 14:9)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한 것이다. 땅밟기 사례는 너무 많다. 아직도 인터넷 각종 블로그와 카페에는 땅밟기 사례가 무용담처럼 올라와 있다. 이 가운데 이슬람권에서 문제가 됐던 사례만 다시 정리해보자.

    지난 2006년 이란 단기선교 차 방문한 한인 선교팀이 땅밟기를 한다며 모스크 주변을 반복적으로 돌며 서성이다 현지 경찰에 붙잡혀 곤혹을 치렀다. 요르단에서는 단기팀이 시내 한복판에서 ‘악한 영들을 대적한다’며 통성기도와 방언기도를 해 현지인들을 당혹케 했다.

    카이로 시내 중심지의 한 피자헛에는 한 무리의 한국 젊은이들이 피자를 시켜놓고 열심히 통성으로 기도를 했다. 이집트 백성들을 축복하고 악한 영들을 대적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현지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한 도시를 집중적으로 기도하며 행진했다. 학생들은 캠퍼스 곳곳을 돌면서 선포하고 찬양하고 행진한다. “이 캠퍼스를 내게 주소서…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이 땅을 내게 주소서….”

    땅밟기 기도의 기저에는 악한 세력과의 영적 전쟁을 치른다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특정 지역을 사로잡고 있는 영적인 어둠의 세력이 견고한 진을 치고 있다고 보고 강력한 기도로 이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인터콥 최바울 대표는 그의 책 ‘백투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돌면서 계속 기도하며 영적 전쟁을 행한 것뿐이다. 그런데 마지막 날 믿음으로 외쳤을 때 여리고 성이 일시에 붕괴되었다. 이처럼 10/40창을 향해서 우리가 기도할 때 어둠의 진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고 말했다. 인터콥이 4년 전 아프간에서 평화 축제를 강행하려고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6년 전 이스라엘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베들레헴에서 열렸던 ‘평화행진’ 역시 땅밟기에 기초한다. 수백명 또는 수천명의 기독교인들이 땅을 밟으며 기도할 때 선교의 문이 열릴 것이란 소망에서였다. 이들의 염원과 소망은 그 자체로 선하다. 하지만 현장은 그렇지 못하다는 게 논란의 이유다.

    현장 선교사들에게 땅 밟기는 한낱 이벤트일 뿐이다. 땅만 밟는 행진은 무의미하며 그 땅에서의 삶이 기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전 요르단 김동문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땅밟기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은 우리와 달랐다. 곳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남의 땅에 말뚝을 박듯이 한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샀다. 그리고 그곳에 장막을 쳤다. 그 장막 터 위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붓고 예배했다. 하나하나 값 주고 다시 사들이는 방식으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의 땅밟기는 이어진 것이다. ‘이 땅은 주님 땅’이라고 외치는 것만으로 땅의 회복은 이뤄지지 않는다. 값을 치르는 것이 필요하다.”

    최근 방한한 풀러신학교 김세윤 교수는 26일 숭실대학교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한국교회의 영적 전쟁에 대한 인식을 이렇게 지적했다.

    “바울이 언제 버가모교회에게 신전에 가서 뺑뺑이 돌면서 땅밟기 하라고 했나. 아테네 신전에 가서 뺑뺑이 돌았다는 말이 요한계시록 어디에 나와 있나. 땅밟기식 선교 방식이 한국교회에 들어와서 난리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 예수의 주권에 순종해 사랑을 베풀고 의를 행하고, 의의 열매를 맺는 것이 진정한 영적 전쟁이다.”

    진정한 의미의 땅밟기란 무엇인가. 땅밟기가 삶이며 생활이라고 할 때 8년 전 서울 전농동에 세워진 다일천사병원이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이 지역은 ‘청량리 588’로 지칭되는 홍등가로 매춘여성을 비롯한 노숙인과 행랑자들이 모여 있던 곳이었다. 다일천사병원은 이곳에서 이른바 견고한 진을 파하는 어떤 기도나, 음란의 영을 대적하는 어떤 기도도 하지 않았다. 병원은 그저 그들 가운데 들어왔고 그들과 함께 살았다. 8년간 병원을 거쳐간 사람만 7만명이 넘는다. 내년 2월엔 거리에서 연고 없이 죽는 사람을 위한 ‘임종자의 집’도 개관한다.

    땅밟기의 바른 의미는 땅 자체가 아니라 그 땅의 사람들을 품는 과정이다. 땅밟기의 중심은 하나님이며 지역민들의 삶의 자리와 함께 하는 것이다. 전 세계 곳곳에서 사역하고 있는 장기 선교사들이 한결같이 선교를 ‘더불어 사는 것’으로 정의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때다.

댓글 1

  • 김장환 엘리야

    2010.10.31 22:07

    찬양인도자학교를 주관하는 예배사역 단체 ‘에즈37’의 대표 최지호 목사가 논란이 되고 있는 ‘봉은사 찬양’ 동영상과 관련 입장을 밝혔다. 봉은사에서 기도와 찬양을 하고 이 동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한 곳은 찬양인도자학교로 최 목사가 대표로 있는 에즈37에서 운영하고 있다. 최 목사는 26일 오후 국민일보와 전화 통화에서 “무례한 행동으로 교회와 불교계에 피해를 주게 되어 대단히 송구스럽다”며 “조만간 동영상에 나오는 청년들과 봉은사를 찾아가 사과하겠다”고 밝혔다. 다음은 최 목사와의 일문일답.

    -문제의 동영상 참가자들이 찬양인도자학교 수료자들이 맞는가.

    =그렇다. 총 10주 교육 중 9주차를 진행하고 있었다. 동영상은 6∼7주차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보통 9주차에는 서울 강남역 인근을 방문해 기도와 찬양 활동을 하는데 그 팀들은 봉은사로 향했던 것 같다. 사찰까지 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충격적이다. 또 그런 걸 영상으로까지 만들어 공개할 줄은 정말 몰랐다. 무지하고 무례했다.

    -봉은사측에 연락을 했나.

    =26일 오전 종무실장에게 전화해 사과했다. 동영상이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땅 밟기에 참여했던 청년들도 사과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조만간 이들과 함께 봉은사를 직접 찾아 사과할 예정이다.

    -찬양인도자학교에서 땅 밟기나 결박, 선포 등의 말을 사용하나.

    =그렇지 않다. 그런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에게 전도의 자유는 있지만 타종교인들의 종교까지 간섭하고 그들의 신앙을 막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타종교인들의 신앙은 존중돼야 한다. 청년들의 행동은 모르고 한 것 같다. 그들의 열심은 이해하나 사고에는 동의할 수 없다.

    -동영상 내용이 한국교회 찬양 트렌드 자체를 반영했다는 지적이 있다.

    =찬양인도자학교에는 다양한 스펙트럼과 신앙적 배경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참가한다. 그들이 어떤 신앙적 색깔과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행동을 할지 미리 파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참가자 개인이 경험한 다양한 신앙적 배경이 그런 행동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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