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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동하는 믿음 - 양재성목사 (기독교 환경연대 사무총장)의 글
  • 행동하는 믿음 - 야고보서 2장 14-17, 마 25장 31-46

    * 용산참사

      가진 자들의 정부, 경제 살리기를 최우선으로 내건 이명박 정부의 실상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용산참사는 더 이상 밀려날 곳이 없는 철거민들의 생존투쟁을 외면하고 그들을 테러범으로 규정하고 강경진압으로 해결하다가 발생한 어처구니없는 살인입니다. 사람이 6명이나 죽었는데도 누구하나 사과하거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어처구니를 지켜보던 한 지식인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과 그가 열심히 다니는 한국교회에 묻고 싶다. 부지런히 일하며 열심히 살고 있던 가난한 사람들을 졸지에 철거민으로 만들고, 그들의 한 맺힌 절규를 경찰 대테러 특공대까지 동원해서 제압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아 죽이라고 가르쳤는가? 예수가 가난은 태워 죽여도 좋은 죄라고 가르쳤는가? '강부자'에게 막대한 개발이익의 취득을 가로막는 가난한 철거민들은 테러분자보다 더 나쁜 존재일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강부자'야말로 절대 천국에 못 갈 죄인이다.”

      정말 사람의 탈을 쓰고 할 수 없는 일이 자행되었습니다. 이런 때에 기독교인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에 깊은 자괴감을 느낍니다.


    * 감리교사태

      작년 9월에 발화된 감리교 사태는 또 어떻습니까? 겉으로 보기엔 사회법과 교회법의 싸움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물량주의로 인해 화인 맞은 양심에서 기인되었습니다. 이미 총대들을 매수한 수십억 아니 수백억원이 원흉입니다. 물론 그 돈으로 교회를 자본의 늪으로 빠뜨린 자들이 원인입니다. 이제 돈으로 교권도 사고 교회도 살 수 있다면 종교개혁 당시의 종교타락상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감리교 본부에 쳐들어와 깽판을 부려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종교가 사회를 변혁시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무딘 양심이 날카로워지고 영혼이 맑아질 수 있다면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닌 듯 보입니다.


    * 신자유주의에 포섭된 한국교회

      지난 40년 동안 경제발전과 더불어 한국교회도 급성장해 왔습니다. 대통령이 그렇듯이 잘 나가는 교회의 목회자도 자신들이 CEO임을 강조합니다. 교회가 경제 원리로 경영되고 있고 경영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경제와 교회를 같은 부류로 보는 난센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의 굴레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을 만큼 자본주의 구조 안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삶 전 영역에서 그 위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실체를 뜯어보면 자본이 주인이 되는 세상입니다. 맘몬이즘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부동산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돈을 버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한국교회, 펀드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데는 관심이 없고 펀드에 투자하여 돈을 벌 수 있다고 펀드 상품을 선전하는 목회자들, 불로소득을 얻어 헌금 많이 하고 좋은 일에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신앙과 교회의 정체성은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 안에서 기독교 신앙이 가능한가를 물어야 합니다. 피상적으로 재물과 하나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예수의 가르침 때문만은 아닙니다. 무한 경쟁과 개인주의로 몰아가는 자본주의는 비인간화를 조장하고 생명을 파괴하여 공동체 영성을 추구하는 기독교의 근본을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경제, 그 어두운 몰락

      미국발 금융위기는 세계 시장을 얼어붙게 하고 있습니다. 부동산 시장의 붕괴에서 비롯된 금융지주회사의 파산은 기업의 파산으로 이어졌고 대량실업을 불러왔습니다. 야심차게 경제를 살리겠다고 7% 성장을 약속했던 이명박 정부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으니 국민을 기만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지난 해 4분기 성장률이 예상목표인 -1.6%에 훨씬 못 미치는 -5.6%로 추락하였습니다. 올 해 상반기 성장률도 예상치 보다 훨씬 심각한 -4%성장을 보일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는 기업의 도산과 실업자 증가는 거대한 사회적 충격을 몰고 올 것이 뻔합니다. 3월 붕괴설이니, 5월 봉기설이 하는 말도 어려운 사회현상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투자 보단 투기를 가치보다는 부채를 창출함으로 돈을 창출하는 경제구조는 반드시 망할 수밖에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1,000만 명을 바라보는 한국경제, 그간 무소불위의 권좌를 유지하여 온 대기업도 엄청난 적자에 무너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풍전등화와 같은 중소기업들. 무너지는 자영업자들, 그 비싼 돈을 지불하고 대학을 나와도 한 달에 88만원, 아니 그것도 옛 이름이 되어 취직도 할 수 없는 사회, 토목건설업으로 고등학력자들을 일용직 노무자로 만드는 MB정부, 남북갈등을 고조시켜 위기수단으로 악용하여 수구의 결집을 부추기는 정부, 장기적 비전보다는 단기적 업적을 얻어 재집권하려는 정치권, 예수의 얼과 정신엔 무관심하고 축복과 구원만 받으면 그만인 한국교회는 우리사회를 어두움으로 몰아가는 장본인들입니다.

      하지만 경제란 ‘생산, 분배, 소비의 순환으로 이루어지는 부의 사회적 재생산과정’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물건을 만드는 자나 그것을 유통하고 소비하는 자가 모두 즐거운 경제가 참 좋은 경제란 말입니다. 거기에 이젠 천연자원을 고려하는 친자연적인 녹색경제가 도래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영성을 부여한 새로운 경제모델-프라우트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70년대 토목건설위주의 경제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심각한 위기입니다.


    * 말만 무성한 한국교회

      우리나라 사람들은 교회하면 부정적인 하나를 꼽는데 교인들은 말이 많고 말을 잘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말만 무성하고 행동이 없는 한국교회를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3년 전, 쓰나미로 수십만 명이 죽음을 당한 것을 놓고, 태국이 성적으로 문란한 곳이니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라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4초에 한 명씩 굶어서 죽어가는 것을 놓고도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한국교회들. 불교국가는 다 못살고 기독교 국가는 다 잘산다며 기복을 선전하는 목사들은 진짜 예수를 알고 있는 지 묻고 싶습니다.


    * 현장에서 유배된 한국교회

      연초부터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으로 세계가 긴장하였습니다. 팔레스타인 여성 이린를 포함하여 1000여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13명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자중지란으로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95%가 폭격을 지지하고 있고 어떤 언론에서도 비판적인 기사가 없다니 무섭습니다. 그리고 가족단위로 도시락을 싸 가지고 능선에 올라 폭격하는 것을 불꽃놀이 구경하듯 망원경으로 구경하고 있다니 인간이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세계 부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초강국입니다. 자본으로 언론을 통제하고 미국 등 선진국을 위협하여 침공을 정당화하는 이스라엘을 편드는 한국교회는 이제 예수를 버린 듯합니다.

      지난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진행된 기독자 교수들의 기도회 및 기자회견의 자리에서 한 조직신학 교수는 기독교 정경에서 구약성경을 분리하여 태워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국교회가 이스라엘을 무조건 지지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 팔레스타인 기독교도들은 구약성경을 읽지 않고 있다고 소개하였습니다.

      용산참사를 놓고도 철거민들의 강경투쟁이 경찰의 강경진압을 불러왔기 때문에 근원적 책임은 철거민들에게 있다고 한국교회는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국민이 세운 한시적 정권입니다. 진정한 주인은 국민입니다. 철거민들도 이 나라 국민입니다. 철거민들도 이 나라의 주인이란 말입니다. 심부름꾼인 이명박 정부가 주인인 철거민들을 죽였습니다. 그러고도 사과 한 마디 없고 책임자를 처벌하기는커녕 감싸고 있으니 한심한 나라입니다. 이제 원칙도 없고 상식도 없는 정권에 대다수 한국교회는 침묵하고 있고 대형교회들은 이명박 정권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지난 참사 11일째 청계광장에서 추모집회를 열면서 기독교측 문대골 목사님이 인사말씀을 할 때 기독교에 대한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민중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다가 외면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 예수없는 예수교회

      꼭 30년 전 “저 낮은 곳을 향하여”란 책을 내 놓아 화재를 불러일으켰던 한완상박사가 “예수없는 예수교회”란 책을 내 놓아 화제가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기독교 분야 판매서적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한 박사는 기복주의와 물량주의, 세습과 도덕적 불감증, 여성차별과 비민주성을 한국교회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거기에 보신주의와 성공주의, 개인구원과 영원구원에로 함몰, 가부장적 권위주의, 공교회성의 공멸이 한국교회의 문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기윤실의 종교 호감도 조사는 기독교가 얼마나 일반 시민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는 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교 호감도에서 불교가 32%, 천주교가 30%, 개신교는 20%에 불과했습니다. 신뢰도는 천주교가 36%, 불교가 31%, 개신교는 18%였고 개신교에 대한 신뢰는 신뢰한다가 18%인데 비해 신뢰하지 않는다가 48%를 차지하였습니다. 모든 면에서 개신교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위기의 원인은 근본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없는 교회, 예수 없는 목회, 예수 없는 선교가 한국교회를 망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죽으심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기독교는 진정한 기독교가 아닙니다. 현세축복과 내세구원에 집중된 구속신앙은 그 소중한 가치와는 상관없이 사회적 책임을 회피한 채 부도덕하고 무기력한 순종파 수구기독교도들을 양산하였습니다.


    * 행동하는 믿음

      야고보서는 당시 감독이었던 야고보가 디아스포라 기독교도들에게 한 설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으로 강조하고 있어 믿음을 강조하였던 종교개혁자 루터에겐 “지푸라기로 가득 찬 서신”으로 냉대를 받았지만 웨슬리목사는 야고보서 주석을 두 번 쓸 정도로 좋아하였습니다. 사실 바울서신은 행위를 소홀히 여기지 않습니다. 원조인 예수님은 지나치리만큼 행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성경의 본래 의미와는 상관없이 해석자들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주관적으로 성서를 해석한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둘이 아닙니다.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습니다. 믿음이란 말은 CREDOS에서 왔습니다. CREDOS는 심장이란 CREE와 드린다라는 DOS의 합성어입니다. 결국 믿음이란 심장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심장이란 목숨을 의미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뜻과 예수의 가르침을 실행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 정도면 믿음이란 말을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 예수는 답인가?

      저는 아직까지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기독교에 속해 있고 기독교의 정체성을 가지고 목회를 하거나 운동을 하고 있는 한은 예수에게서 답을 찾고 있으며 어느 정도 그 답을 찾았습니다.

      예수는 그저 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였고 당신의 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일이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억눌린 자들을 자유하게 하고 갇힌 자를 해방시키고 눈먼 자를 보게 하는 일입니다. 민중의 친구가 되어 그들의 속박을 풀어주는 일입니다.


    * 예수 살기

      예수가 가르치고 살고 걸어가신 길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길이며 예수를 따름은 예수의 가르침에 복종하는 길이며 예수를 사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추구했던 영성과 이상은 무엇입니까?

      예수의 영성은 비움의 영성입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모든 권세를 버리고 명예를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명예를 가지고는 이룰 수 없습니다. 전적인 타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신 영성, 한 없이 자신을 비워서 마침내 하나님이 되신 영성입니다.

      또한 예수의 영성은 고난의 영성입니다. 이 시대의 하나님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고난의 현장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 속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진리를 황금 속에 두지 않고 보잘것없는 작은 자들 속에 두셨습니다. 고난의 현장에서 묵묵히 제 길을 걷는 지극히 작은 자를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것이 기독교의 길입니다.
      한국교회의 살 길은 여기에 있습니다. 수를 늘리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예배당을 짓는 것도 아닙니다. 현란한 신학을 구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훈련을 위한 대단한 이론을 구성하고 자료를 축적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사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예수로 사는 길을 결단할 때입니다.

      또한 복종의 영성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복종입니다.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의 가르침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 복종의 꽃은 십자가입니다. 교회하면 가장 먼저 십자가가 생각납니다. 십자가가 교회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죽어 너를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는 당신을 죽여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절대적인 순종이 역사를 구원할 것입니다.


    * 예수를 사는 사람들

      예수의 이상은 하나님 나라 실현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의 이상도 하나님 나라 실현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의 증인으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지상 목표입니다. 이 일을 위해 연대하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선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가슴 따뜻한 사람이 되어주십시오. 선물이 되는 삶은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수가 나타나는 사람들이 진정한 교회이며 성도간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이 보이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라고 본회퍼는 말했습니다. 삶을 통해 하나님이 나타날 때 하나님은 비로소 하나님이 되십니다.

      까마라 주교(남미천주교주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해 일하면 사람들은 나를 성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왜 가난해졌나요? 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욕합니다.”

      투투 주교(남아공성공회주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평화를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고상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내가 평화를 위해 일하기 시작하면 나를 위험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상당한 고난도 당하게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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