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십일조에 대해 - 이민규교수
  • ............................................................................................................

    십일조? 진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현재 '십일조'를 하지 않은 교인에게 교인 자격을 박탈하는 법을 만들려 하고 있다. 이에 대한 비판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요즘 교회의 경제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저런 정책까지 나왔는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대형교회조차 마른 걸래 짜낼 정도의 급박한 재정 긴축에 들어간 판...에 작은 교회들은 말할 수 없는 재정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교회마다 봉헌은 계속 줄어들고(헌금은 일제식 표현이므로 봉헌이라는 표현을 쓴다.), 대형교회 건물조차 법원 경매로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십일조, 현재 평균적인 교회 재정의 70% 정도를 차지하고 전체 교인의 대략 20%가 십일조를 드린다. 십일조 봉헌은 신학의 문제를 넘어 현실적으로 교회의 “파산이냐? 생존이냐?”의 문제이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가장 절실하다. 돈이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봉헌은 교회 살림을 꾸려나가는데 현실적으로 절대적이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십일조를 훨씬 넘어선 봉헌을 보여준다. 그런데 요즘 성도들은 십일조 율법을 지킨 구약 백성보다도 봉헌에 훨씬 인색하다. 봉헌에 제대로 신경 안 쓰고 목회하면 하나님도 그 교회 책임 안 지신다. 이런 현실 속에 십일조 율법이냐? 봉헌에 대한 열정 회복이냐? 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고찰해볼 필요가 절실하다.

    십일조의 원래 의도

    구약에서 십일조는 성전제사 제도, 그리고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와 연관되어 있다. 오로지 성전과 제사제도를 섬기기 위해 열두지파 중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지 못해 생계수단이 없는 레위 지파와 가난한 이웃의 생계를 돕기 위해 제정되었다. 오늘날 개신교는 만인 제사장제도를 믿기에 십일조의 정신을 굳이 적용하자면 오로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기 위한 목회자들의 생계와 먹고 살길이 막막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헌이라 할 수 있다. 신명기는 특히 가난한 이웃을 위해 드려지는 것을 강조했다(신 12:12; 18:-19; 14:22-29). 특히 삼 년마다 드려지는 십일조는 오로지 레위인, 나그네,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위해 쓰여야 했다(신 26:12).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는 물론 희년과 다양한 제도를 통해 강조되었는데 십일조도 이에 한몫한 것이다.

    말라기의 십일조

    오늘날 십일조의 복을 위해 가장 오해되는 본문은 말라기이다. 말라기는 제사장을 책망하며 헛된 제물을 더는 단에 드리지 못하도록 성전 문을 닫아 버렸으면 좋겠다고 한탄하시고 말 1:10),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제사장들의) 얼굴에 바를 것이라”고 책망하신다(말 2:3). 그 이유는 무엇인가?

    유다 백성, 즉 “야곱(사기꾼)의 자손”은(3:6) 생명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레위인, 가난한 이웃의 몫인 헌물과 십일조를 떼어먹어 하나님 것을 도적질합니다. 또한, 고위 제사장들은 십일조를 율법대로 모든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계와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를 위해 제대로 분배하지 않는다. 이후 유대 역사에는 많은 빈곤한 하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나타난다.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갈 몫을 빼돌려 부를 축적하며 호의호식을 누리던 고위 재사장들은 말라기 이후 중간기와 신약 시대에도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었다. 쿰란의 하박국 페셰르에서는 고위 제사장들을 사악하다고 부른다(1:13, 8:9; 9:9; 11:4), 그들이 가난한 자에게 강도질을 하고(1QpHab 8:12; 9:5; 10:1; 12:10), 부를 쌓으며 (1QpHab 8:8-12),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힌다고 기록한다(1QHab 12:8-9). 요세푸스도 대제사장의 뇌물 수수(Ant. 20.9.4§ 213; Life 39 § 195-6), 폭력 (Ant. 20.8.8 § 179-81; 20.9.2 § 207)을 비난하다. 예수 당시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

    즉, 말라기의 십일조 문제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써야 할 십일조가 제대로 드려지지 않고 고위 제사장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나머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빈곤에 처하고 가난한 이웃들이 고통받고 있던 사실에 대한 비난이다. 단순히 십일조만 바치면 개인적으로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 발생한 종교 경제적 양극화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이다.

    현대 유대교의 십일조 풍습

    오늘날 정통 유대교에서는 십일조를 회당에 드린다. 성전과 성전제사가 없는 오늘날 레위인들이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구제를 위한 명목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정확히 십 분의 일을 강조하는 것보다는 형편에 따라 액수를 정하고 매달 봉헌하게 시킨다.

    복음서에서의 십일조

    신약에서는 십일조가 복음서에서만 나온다. 그 구절들은 모두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의 실천에 대하여 언급할 뿐이지 기독교인들의 의무를 말하고 있지는 않다(눅 11:42; 눅 18:12). 사실 십일조는 정치와 종교가 구분되지 않았던 신정국가로서의 이스라엘에 세금제도의 성격도 있었고 실지로 다 합치면 십 분의 일보다 훨씬 많은 액수가 요구되었다(레위기 27장; 민 8장; 신 14:22-29; 대하 31장; 느 10,12,13 장; 암 4장; 말 3장). 초대 교회에서는 율법의 완성 위에 선포된 복음의 정신에 따라 십일조 제도를 지속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십일조 정신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형태인 구제봉헌으로 구체화되었다. 즉, 레위인들의 생계에 대한 책임과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은 목회자와 가난한 이웃을 위해 더욱 활성화되었다.

    십일조 율법의 완성인 신약의 봉헌

    초대교회에서 율법에 속한 십일조 제도의 폐지는 결코 봉헌을 적게 할 명분으로 왜곡되지 않았다. 오히려 초대교회는 재물에 대한 훨씬 헌신적인 봉헌의 자세를 보였다. 즉, 십일조 율법의 완성이란 차원에서 자신의 모든 재물의 주인은 오직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철저히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감당한 것이다(눅 16:1-13). 따라서 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의 개념이 아니라 재산 모두를 교회에 헌납하여 필요에 따라 나눠 쓰기도 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행 2:45, 비교 행 4:32-3). 물론 이 이상적인 상태는 항상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의 요구를 완성한 복음의 결과였다(롬 8:4). 또한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라”라는 말씀(눅 3:12),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마 10:21; 마 19:21)라는 예수님의 요청만 보아도 물질의 헌신에 대한 신약의 요구는 율법이 지향했던 훨씬 더 완성된 상태라는 쉽게 알 수 있다.

    신약에서는 기본적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신다는 원칙을 강조한다. 한 부자 청년은 모든 것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을 따를 것을 명한다. 경건을 자부하던 그는 돈이 많아 근심하며 예수를 떠났다(마 19:16-26).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발성이다.

    신약에서 봉헌은 구약의 십일조처럼 소득의 정해진 비율에 따른 것이 아니라 순수한 동기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성에 근거한다. 삭개오의 경우는 이런 봉헌의 자세와 액수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가르쳐 주고 있다(눅 19:1-8).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 구원을 받았고 너무나 감사해서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헌납하기로 결심한다(십의 일이 아니라 절반이다!). 그리고 자신의 부정직한 재산에 대한 회개의 의미로 토색한 자들에게 네 배의 보상을 약속한다. 여기서 우리는 삭개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이 경제적인 손실을 입힌 자들에게 보상하는 마음이 진정한 봉헌의 자세이다. 즉 봉헌은 바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동기가 중요하다.

    그리고 눅 18:9-14에 나타난 바리새인과 세리가 드린 기도의 비교에서처럼 우리는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는 외적인 행위 자체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신앙이 전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눅 18:9-14에서처럼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는 외적인 행위 자체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신앙이 전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봉헌은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드려서는 안 된다. 죽음의 형벌로 끝난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보면 남을 의식하는 봉헌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가를 볼 수 있다(행 5). 벌을 받을까 봐 손해를 볼까 봐 혹은 복을 받지 못할까 봐 드리는 봉헌은 잘못된 봉헌이다. 생색을 내며 드리거나 분위기를 따라 드리는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은 사실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겠지만 실지로 잘 지켜지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바울서신의 봉헌

    바울서신에서 봉헌에 관한 내용은 주로 흉년으로 고생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복음의 축복에 빚진 자의 입장에 서 있는 이방 교회들이 도와야 하는 특정한 상황에서 다루어지는 고로 주로 구제봉헌을 말하고 있다. 고전 16:1-5의 내용은 흉년 때문에 가난해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고린도 교회가 봉헌에 동참해 줄 것에 관한 내용이다. 바울은 3절에서 너희의 “카리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는 것이라 말한다. 여기서 “charis”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개념보다는 고린도 교인들의 “호의나 선물”의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charis는 “자선행위”로도 번역이 가능함, 고후 8:4, 6, 7, 19).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자신이 갈라디아 교회에 명한 것 같이 이 구제활동에 참여하라고 명령한다. 즉 이방 교회들이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는 것은 사도적 명령에 근거한 것이다(“명한 것 같이” 고후 16:1).

    이방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야 할 당위성은 예루살렘교회의 중요성 때문이기도 하지만(롬 15:27) 근본적으로 교회의 봉헌은 또한 빈곤한 교회들을 위해 분배되어야 한다. 이렇게 봉헌을 통해 재물을 나누는 것에 대하여 바울은 “다른 사람들은 평안케 하고 너희는 곤고케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고후 8:13). 이것이 복음의 원리이다. 나눔은 우리를 부유하게 하려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고 가난한 자가 되신 것과 같은 행동이다(고후 8:9).

    사도바울은 또한 미리 모아두었다가 매주 첫날 봉헌하라는 봉헌방식을 말하고 있다. 이는 봉헌이 급작스럽게 행해지기보다는 미리 준비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고전 16:1). 이에 따라 목회자는 성도들이 어떤 집회나 예배 때 갑자기 감정에 휩싸여 순간적으로 봉헌을 결단하게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집회의 분위기에 따라 봉헌을 작정하고 감정이 식은 후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길게 보면 그는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되고 교회에 반감을 품게 된다. 기독교인들은 은혜를 감성적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이성과 합리성에 근거하여 바른 결단을 내려야 하며 그렇게 하도록 목회자는 성도들을 도와야 한다.

    고후 8:1-5에 보면 마게도니아 교회는 핍박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극심하게 가난한 교회였다. 그러나 그들은 구제를 성도를 섬기는 일“(diakonia)로 이해하며 구제사역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바울에게 간절하게 청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핍박과 가난이 그들에게 힘에 지나도록 풍성한 연보를 하게 만들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려진 이 봉헌은 예루살렘에서 온 복음의 축복에 대한 감사예물이었다.

    고후 9:11-12에서 바울은 구제봉헌을 봉사의 직무(leitourgia)라 표현한다. 이 단어는 유대인들에게 성전제의에 대한 봉사나 회당예배의 봉사에도 적용되었다. 즉 교회의 봉헌은 “물질봉사”인 것이다. 이 봉헌은 다른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 “하는 것이며 고린도 교인들이 넘치도록 풍성하게 봉헌한 이유는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인한 것 때문이었다(9:12). 감사로 인한 후한 봉헌은 분명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고후 9:13).

    사도바울은 봉헌에 있어 자발적이고(고전 8:8) 계획하는 자세를 요구한다(고전 16:1). 또한,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과(고후 9:10-11) 즐겨내는 자세(고후 9:7)를 요구한다. 빌립보 교회가 그에게 봉헌한 것에 대해 바울은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표현한다(빌 4:18). 여기서 그들이 복음의 일꾼을 도운 것은 결국 하나님께 드린 것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고린도 교인의 봉헌은 먼저 주께 바쳐지고 동시에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역자들에게 주어졌다(고후 8:5). 본문에 따르면 봉헌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동역자들의 재정적 필요를 채우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봉헌을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는 것”이라 했다(고후 8:8). 그리스도와 형제사랑은 지갑을 여는 것으로 증명된다.

    나가는 말

    신약에서 봉헌의 동기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순수한 감사함이다.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복은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하는데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눔의 풍성함에 있다. 부자도 나눔에 가난할 수가 있고 가난한 이도 나눔에 풍성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나눔에 부자가 되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다.

    교인들은 검소하게 살며 남을 위한 씀씀이를 크게 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섬기는 삶, 특히 소외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훈련을 해야 한다. 교회도 “힘에 지나치게” 풍성한 연보로 소외된 이웃과 빈곤에 처한 하나님의 교회들을 도와야 할 것이다. 결국, 나눔에 풍성한 교회가 가장 성경의 봉헌관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라고 말하고 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화려한 건물, 찬란한 고가의 음향 시설, 아름다운 꽃꽂이, 고급 인테리어보다는 검소한 모습에 영성을 깃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것에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고 근본적으로 나눔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당신은 제자인가?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수입을 요구하신다. 소유권은 주님께 있다. 나는 청지기일 뿐이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에 힘썼다.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은 하나님, 예수님뿐만 아니라 사도의 부탁이다(갈 2:10).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 돈을 사랑하지 마라! 즐겁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힘에 겹도록 풍성하게 봉헌을 해라. 당신의 재산과 수입은 하나님의 일꾼들과 소외된 이웃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행 20:35).

댓글 0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69 김장환엘리야 2182 2014-03-04
168 김장환엘리야 2250 2014-03-04
167 김장환엘리야 2724 2014-03-04
166 김장환엘리야 4699 2014-03-04
165 김장환엘리야 3529 2014-03-04
164 김장환엘리야 3065 2014-01-14
163 김장환엘리야 2879 2014-01-04
162 김장환엘리야 4697 2013-12-19
김장환엘리야 4269 2013-08-12
160 김장환엘리야 3774 2013-08-12
태그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