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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의 최후 심판대 앞에 서는 그날: 믿음이 아니라 행위로 심판하신다! - 이민규교수
  • [하나님의 최후 심판대 앞에 서는 그날: 믿음이 아니라 행위로 심판하신다!]

    믿음은 구원의 원인적 측면, 행위는 구원의 결과적 측면

    우리는 모두 언젠가 하나님의 최후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그때에도 오직 믿음과 은혜가 구원의 기준일까? 아니면 그날은 믿음으로 받은 성령의 부어짐과 은혜에 대한 충성된 청지기의 삶으로 구원의 운명을 확인하는 자리일까?

    종말은 최후 심판을 향하여 가는 여정이다. 현대인들은 대체로 최후 심판하면 부정적인 느낌을 받는다. 행위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이고 아무도 행위에 대하여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말의 행위심판이란 구원받기에 아무 자격이 없는 자가 믿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맺음의 능력인 성령을 선물 받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 성화의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최후 심판대에서 확인되는 장면이다.

    오늘날 “안일한 믿음주의”(easy believism)에 익숙한 기독교인들은 오직 은혜와 믿음만을 구원의 기준으로 좋아하지 행위와 성화가 최후심판 때 구원의 결정적인 기준이 되고 있다는 말을 몹시 불편하게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구원의 조건에 믿음과 은혜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성화와 행위에 관한 내용도 그 이상 강조하고 있다. 신약은 그리스도인들도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마 25:14-30; 눅 19:12-27; 고전 3:12-15; 고후 5:10; 참고 롬 14:10; 벧전 1:7; 계 20:1). 사도 바울은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넉넉하게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라고 하지만(롬 8장) 동시에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구원에 대한 운명이 달라지는 행위심판을 언급하고 있다 (고후 5:10-11).

    주시해야 할 사실은 성경에사 수많은 최후 심판에 대한 본문들이 있지만 단 한 군데에서도 믿음을 구원의 기준으로 언급되지 않고 오직 행위(성화, 열매)만이 구원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직 믿음만을 칭의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바울서신에서도 최후심판의 기준은 오직 행위밖엔 없다.

    과거의 개신교 학자들은 구원을 위해 믿음/은혜/칭의의 원칙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종말론적 행위심판의 논리를 무시하기도 하였지만(캐제만, 불트만 등) 그간의 많은 연구를 통해 현재 성서학은 은혜와 행위심판의 두 주제가 바울서신에서도 구약과 유대문헌, 그리고 다른 신약성서들(특히 복음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요한계시록 등)과 마찬가지로 상호보안관계로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최후 심판

    구약에서 “주의 날”은 주로 역사 속의 심판 사건이지 최후 종말의 날은 이니다(사 13:6, 9; 렘 46:10; 겔 30:23; 열 1:15; 2:1, 11, 31; 3:14; 암 5:18; 옵 15; 습 1:14-16; 슥 14)). 그라나 신약에서 “주의 날”은 종말론적인 최후 심판의 의미로 사용된다. 신약은 이날을 마지막 날, 그리스도의 날,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이라고 부른다(요 6:39; 롬 2:5; 고전 1:8; 5:5; 엡 4:30; 살후 1:5-10). 이날 그간 성도들을 괴롭힌 자들은 괴로움을 당하고 믿지 않고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살후 1:6-10). 교회를 핍박한 자들에 대한 형벌은 복음이 정당하다는 것에 관한 입증이다. 성도가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모든 선한 뜻과 믿음의 행위를 완성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시는 길이다(살후 1:10-12 참조 벧후 3:7-13).

    종말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불안과 공포가 아니라 흠 없는 경건함으로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는 것이다(벧후 3:14). 여기서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쓴다는 것은 표현은 거룩한 삶과 경건한 행실을 힘써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라는 뜻이다. 이는 진리의 길(2:2), 그리고 의의 길(2:21)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올바르게 살아갈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최후 심판은 왜 늦어질까? 이 천 년 전에도 최후 심판의 날이 더디 오는 것 같았다.
    하나님의 시간을 재는 척도는 우리와 다르다. 하나님에게 하루는 천 년 같고 천 년은 하루 같다(벧후 3:8). 본문은 최후심판이 늦어지는 표면적인 이유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때문이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벧후 3:9).

    최후 심판의 날은 앞당길 수 있을까? 베드로 후서는 성도들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을 살면 그날이 앞당겨진다고 한다(벧후 3:11-12, 이 의미는 특히 다양한 영어성경이나 새변역을 참조하라).

    새번역

    “...여러분은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벧후 3:11-12)

    공동번역 개정판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심판날을 기다릴 뿐 아니라 그 날이 속히 오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벧후 3:11-12)

    인류 최후의 날은 모든 것에 대한 공정한 판결과 기쁨의 구원이 완성되는 심판의 날이다. 이날 선택된 자들은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모아져(막 13:26-27) 영생을 얻지만 (마 25:34, 46), 불법을 행하는 자들도 모아져 풀무 불(마 13:41-42), 영원한 불(마 25:41, 46), 지옥에 던져지는 참혹한 사건들이 일어난다(마 10:28; 5:29; 23:33; 눅 12:5).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고후 5:10-11).

    바울서신에서도 행위에 따른 심판 사상은(고후 510절)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가르침에 대한 모순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 구원의 참된 의도를 지키기 위함이다(롬3:7-8 6:1 참조). 하나님의 선물로 구원을 얻는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롬2:16; 14:10 참조). 양면가치를 보여주는 은혜의 구원과 행위에 따른 심판은 결코 역설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벧전 1:18-19)에는 은사에 대한 책임(마 25:14-30)과 복음의 청지기 직(눅 3:12-14),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삶(엡 5:10; 골 1:1)을 위한 노력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계속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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