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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밀양 속으로
  •  <밀양> 속으로


    # 들어가며

     

    2007년은 한국교회의 괄목할만한 부흥의 계기가 된 1907년 대부흥을 기념하는 해이기도 하지만, 한국교회의 굴욕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국교회를 힘들게 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던 해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기독교 기업을 자처했던 이랜드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대응에서 비롯되는 “기독교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안팎으로 직면해야 했던 경험과 분당의 모 교회의 아프가니스탄선교와 관련하여 애끓는 시간을 보내면서 안팎으로 대면해야 했던 교회의 복음 선포와 관련한 자기성찰의 기회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과 최근에 개봉되어 천만 명에 육박하는 관람자를 내면서 기독교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제기했던 영화 “밀양”이 제기하는 심각한 질문을 피해갈 수 없었다는데서 우리 모두는 힘들었고 또한 안타까웠다. 과연 기독교는 이 시대를 향하여 구원의 종교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인가? 실로 고난당하는 이 세상을 향한 의미 있는 외침을 외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특별히 제60회 칸 영화제에서 배우 전도연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감독 이창동이 만든 영화, “밀양”은 우리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영화적인 면에서도 깔끔하고 매끄러운 작품성을 가진 작품이기도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영화에서 그려내는 기독교의 모습이 현실의 기독교를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달리 말하여, 영화상으로 현실의 기독교를 비틀지 않았다는데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현금 교회의 대예배 일상, 기도회의 일상, 유행하는 치유집회의 일상, 교회의 저변에 뿌리박고 있는 구역예배의 일상과 같은 것이 전혀 과장됨이 없이 영화에 반영되고 있다는데서 적어도 감독이 작품을 연출하는 과정에서 경험적인 기독교를 “비틀고” 있다는 인상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밀양”은 현실의 기독교를 적나라하게 사실주의적인 관점에서 묘사하고 있다. 이런 작품의 성격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영화 “밀양”이 “제기하는” 물음을 피해갈 수 없다.

     

    물론 이 영화의 전반적인 주제는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다. 정의로운 하나님께서 과연 살아계시고 또한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며 섭리하시는(pro-video or provide) 분이라면, 어떻게 이 세상에 이와 같은 악이 발생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신정론의 핵심적인 관심사다. 영화상으로 보자면, 과연 하나님께서 실재하신다면, 어떻게 무고한 한 아이가, 적어도 아빠를 교통사고로 잃은 불행의 한복판에 있는 아이이며, 또한 남편을 잃은 과부의 남은 유일한 희망인 그 아이가 그렇게 무의미하게, 그리고 일상적인 삶의 관계에서 보호받아야 할 바로 그 대상에 의해서 그렇게 무참하게 죽을 수 있는 것인지 하는 궁극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영화 “밀양” 인터넷 사이트의 게시판에 오른 글이 이 핵심을 평범하지만 확연하게 보여준다.

     

    “평소 배우 전도연의 연기를 좋아하는 난 비로소 추석의 끝자락에서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작은 화면 속 거대한 밀양을 마주하게 되었다.

    가끔씩 찾아오는 시련과 고통은 언제나 왜 그리 나쁘게 살지 않은 내게 일어났을까? 하고 반문하게 된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구원이란 무엇이며 종교를 통해 우린 실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가끔씩 종교에 의지하고픈 난 내 삶을 통해 끊임없이 반문하고 답을 구하고 싶었던 그 무엇이 밀양에 고스란히 있지 아니한가?”

    과연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에 대하여 기독교의 하나님은 적절하게 응답하실 수 있는 분인지, 서울 하늘 아래 수놓은 것처럼 빨갛게 타오르는 십자가를 내건 교회가 섬기는 하나님은 과연 이런 문제에 대하여 뭐라고 답변하실 수 있는지를 이 영화는 사뭇 진지하게 묻고 있다.

     

     

    # 영화 엿보기

     

    이런 큰 밑그림을 장식하는 세부적인 담론이 세 명의 인상적인 인물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아이를 잃은 엄마인 “신애”와 그 아이를 살해한 살인범 “도섭”과 그리고 그 엄마를 위로하며 살인범에 대하여 적개심을 내보이는 한 인물인 “종찬”이 바로 그들이다. 특별히 이들이 기독교라는 배경 속에서 이 엄청난 문제와 관련된다. 망자(亡子)의 한을 가진 한 여인인 신애가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마침내 기독교에 입문하고, 유괴 및 살인을 저지른 자인 도섭도 감옥에서 회심하여 신앙을 가지게 되며, 그들 양자 사이에 선 인물인 종찬도 교회를 가까이 하는 사람이 된다. 비극적인 한 사건을 계기로 그들이 모두 기독교 혹은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게 됨으로써 현실의 기독교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중요한 매개로 영화상에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특별히 주목할 부분은 신애가 기독교에 입문하는 과정과 기독인으로서 삶을 형성하는 과정에 대한 내용이다. 삶의 희망이었던 아들 “준”의 납치 및 살해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에 이미 신애는 독실한 장로로서 약국을 운영하는 한 신앙인의 가족으로부터 지극히 통상적인 교회 소개를 받게 된다. 신애는 어느 정도의 기독교에 대한 대중적인 이해를 이들을 통하여 접하게 된다. 그러나 신애가 교회에 혹은 기독교에 입문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아들의 죽음에서 오는 주체할 수 없는 절망감과 그 아들과 함께 했던 빈 시간들을 메울 수 없는 신애의 실존적인 공허와 허무의 빈자리를 파고드는 교회의 한 집회 문구를 통해서 마련된다. 신애는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개 문구가 내걸린 교회당으로 발걸음을 옮겨놓는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대중적인 교회당이었다. 그곳에는“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라는 복음성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으며, 상한 마음을 가진 자를 위로하는 설교자의 지극히“대중적” 설교가 진행 중이었다. 교회당의 뒷좌석에 앉은 신애는 설교 때문인지, 아니면 분위기에서 오는 감정적인 공감대가 누선(淚腺)을 자극한 때문인지, 꺼억 꺼억 소리 내어 울며 자신의 한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주체할 수 없는 실존의 아픔이 울음소리와 함께 교회당을 메운다. 그렇게 신애는 소위 교회의 일원이 된다.

     

    신애는 극중의 설정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구체적인 정황 때문인지 아들을 잃기 전 자신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소개했던 약국을 경영하는 장로부부가 출석하는 교회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누구나 그런 것처럼 소위 대예배에 참여하고, 구역예배를 드리는 통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간다. 자못 그 모습이 진지하고 심각할 정도이다. 예의 그런 모임에서는 고난과 삶의 위기에 대한 나눔이 이루어지고, 신애 역시 자신의 비극적인 사건을 성도들의 위로와 더불어 잊어가기 시작하고, 어느 쯤엔가 자신의 인생에 비극을 가져온 살인자를 용서하고픈 충동에 사로잡힌다. 교회의 담임목사와 성도 몇몇의 조언을 들으며, 바로 그 용서의 일을 마침내 감행한다. 유괴 및 살인으로 인해 옥살이를 하던 도섭과 신애는 창백한 유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 그녀의 손에는 들에서 꺾어온 들꽃이 한줌 들려 있다. 도섭에게 용서의 증표로 줄 요량이다.

     

    극적인 반전이 여기에서 일어난다. 도섭과 마주한 신애는 자신의 의중을 조심스럽게 드러낸다. 아들을 죽인 당신의 죄를 용서하러 왔노라고 힘겹게 말을 건넨다. 이 때, 도섭의 입에서 한편 반가운 말이 쏟아져 나왔다. 옥살이를 하면서, 자신이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자신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노라고. 그래서 매일 평안한 가운데 살고 있다고. 그리고 신애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고. 감독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있다는 그 도섭의 표정을 정말 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안하게 그려낸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무감정한 신”(apathetic God)을 보는 듯하다. 감정적인 동요가 전혀 관찰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자로서 단장(斷腸)의 아픔 가운데서 고민하며 자신을 추슬러온 신애를 향한 애틋하고 미안한 감정이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마치 존재의 축이 신께만 닿아 있는 듯 그는 평안하기만 한 것이다. 이것이 신애를 미치게 만든다. 도대체 당사자인 “내”가 도섭을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그를 대신 용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신애가 도섭을 향하여 품게 되는 애끓는 질문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런 도섭을 자신을 대신하여 용서하시는 그 신(神)은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심각한 질문으로 구체화된다.

     

    이 반전을 통하여 신애의 삶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그동안 다녔던 교회 출석도 중단할 뿐만 아니라, 그 교회를 출석하며 구역예배를 통하여 자신을 위로하였던 그 장로를 성적(性的)으로 유혹하는가 하면, 송림(松林)에서 한 목회자가 인도하는 기도집회가 진행 중인 와중에 가수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라는 대중가요를 음향시설을 통하여 내보내어, 기독교적인 선포와 행위는 거짓된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까지 한다. 교회의 기도라든지 설교라든지 하는 것이 하등 자신의 궁극적인 고민에 대하여 응답할 수 없는 허무한 이야기요, 거짓된 이야기라는 태도를 견지한다. 도섭을 만난이후 이런 파행적인 모습이 반복되면서, 동시에 죽은 준과 함께 했던 기억의 파편들이 되살아나면서, 신애는 거의 정신이상의 상태까지 내몰린다. 급기야 정신병원에서 치료받는 신세가 된다.

     

    감독이 그려내고자 하는 구원의 상은 종찬이라는 캐릭터를 통하여 형상화된다.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오는 과정에 신애의 인생에 개입하면서, 신애가 아들을 잃는 과정, 교인으로서 입문하여 생활하는 과정, 옥살이를 하는 도섭을 방문하여 대면하는 순간, 그 이후의 파행적인 갈등의 순간, 정신병동에서의 과정과 퇴원, 그리고 다시 옛 집으로 돌아온 신애의 머리를 잘라주는 과정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종찬이다. 비록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특별히 신앙에 헌신된 인물도 아니다. 단순히 신애를 마음에 품고 신애가 있는 곳에 함께 있기 위해서, 교회에 출석하고, 주차봉사도 하며, 노방전도단의 일원이 되기도 하는 지극히 속물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항상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이 따뜻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신애 곁에 남는다. 어쩌면 감독은 바로 그 캐릭터를 통해서 진정한 구원의 삶을 제시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하여 구원은 저 멀리 있는 어떤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것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주변 사람에게서, 혹은 이 땅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것이라는 강력한 암시를 전달하고 있다. 주인공인 신애는 끝내 도섭을 용서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아들을 죽인 도섭의 딸도 용서하지 않는다. 삶과 관련한 자신의 몫을 끝까지 놓지 않는 모습에서, 그리고 그 현실의 고통과 고민은 인간 그 자신의 주체적인 결단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은 죽었다(Der Gott ist tot)고 외쳤던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 Nietzsche)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사실, 신은 죽을 수 없는 분이다. 신이 죽을 수 있다면 신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니체는 불가능한 명제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가 신의 죽음을 존재론적인 것으로 선언하였을까? 그것은 오히려 근현대 서구 지성사의 문맥에서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근현대 서구 지성사는 본질과 존재, 형상과 그림자, 창조주와 피조물, 신과 인간과 같은 이분법에 의해서 삶을 설명하곤 하였다. 달리 말하여, 인간과 세계를 설명하려고 할 때, 신을 중심에 두고 행하는 것과 신을 제거하고 인간과 세계를 중심으로 행하는 두 긴장의 축을 활용하였다. 니체는 바로 신이 없는 인간이 주체인, 세계가 주체인, 현실이 주체인 그런 삶을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과 함께 선택한 것이다. 삶에서 신을 제거함으로써 바로 그 삶을 개척해 나가는 핵심에 인간이 있게 되는 것이며, 그 인간은 매순간 직면하게 되는 모든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삶을 창조적으로 형성하기 위해서 주체적으로 결단하는 존재로서 끊임없이 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향하여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러한 인간상을 니체가 제안한 것이다. 그는 그 원칙에 끝내 충실하였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삶을 신에게 의탁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결정하는 최후의 수단이 자살인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비록 기독교적인 배경을 염두에 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영화 “밀양”은 니체적인 사상 기조와 맞닿아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 비밀스러운 빛이 하늘로부터 어둡고 더러운 시궁창으로 스며드는 장면을 끝으로 영화가 끝나지만, 그 빛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것은 바로 종찬이라는 인물이며, 따라서 기독교조차도 종찬이 일관성 있게 지향하고 있는 바로 그 인간성 괜찮은 종교로만 족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전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 신학적인 영화 읽기

     

    사실 영화 “밀양”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요 인물들을 보면서, 이들이 과연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질문을 갖게 되었다. 특별히 신애라는 인물에 주목하게 된다. 영화의 청중이 보기에 신애는 정확히 교회의 교인이다. 주일 대예배에 참석하고 구역예배에도 꼬박꼬박 출석한다. 현금 한국교회의 기준에서 보자면, 표준적인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외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도섭을 용서하기 위한 만남을 전환점으로 하여 급진적으로 변하는 신애의 모습에서, 비록 감독의 영화상의 반전이기도 하겠지만, 과연 그가 기독교의 근본을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달리 표현하면, 한 분 중보자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죽으셨고, 우리의 의와 생명을 위하여 부활하신 분이시다. 바로 그 죽음이 나의 죽음이며, 바

    로 그 부활이 나의 부활이어서, 그 중보자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함으로써 주어지는 은총이 용서, 즉 “칭의”의 은혜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주어지는 기독교적 칭의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율법과의 관계를 해명해야 한다. 원칙상 율법은 십계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고장 난 인간이며, 하나님의 형상은 지혜와 의와 거룩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인 지혜와 의와 거룩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인간이다. 히브리인들의 세계에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능력을 의미하고, 의는 그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능력을 의미하며, 거룩은 그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능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이 고장 났다는 것은 더 이상 인간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형성하며, 그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요구로서 십계명은 온전하게 지켜질 수 없는 내용일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청소년을 위한 웨스트민스터신앙교육서”의 관점을 채용하는 것이 유익하다. 이 신앙고백서는 인간의 죄를 세 구별된 관점에서 파악한다. 첫째는 “행동”이다. 말인즉 실제로 우상 숭배하였는지, 안식일을 범하였는지, 간음하였는지, 살인하였는지, 도적질하였는지 등등을 기준으로 죄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상당히 당당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상대적인 선을 주장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째 기준인 “언어생활”을 적용할 때, 조금 난감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행동에 있어서 어느 정도 당당한 사람도 언어생활을 기준으로 제시할 경우, 당황스러울 수 있다. 인간의 언어생활은 사소한 선의의 거짓말(little white lies)을 비롯하여, 거짓증거와 중상과 모함과 욕설 등등으로 그 모습을 구체화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혀라고 하는 것이 통제하기 여간 힘든 것이 아니어서 인간은 이런 오류에 의식, 무의식적으로 빠지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외가 없지는 않겠지만 거의 어떤 인간도 이 기준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설령 행동과 언어생활에서 비교적 당당한 사람도 마지막 셋째 기준인 마음과 생각이라는 관점 앞에서는 주저앉게 될 것이다. 비록 행동에서는 간음하거나 혹은 살인하지 않았을지라도, 혹은 언어생활에 절제가 있어서 범죄하지 않을 수 있을지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생각을 통제하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여, 여인을 보고 구체적인 음욕을 품은 경우, 혹은 마음으로 지독하게 이해당사자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경우, 혹은 마음에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좋은 어떤 것을 가진 사람, 혹은 사물을 향하여 탐심을 품는 경우, 이미 간음한 것이요, 이미 살인한 것이요, 이미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는 게 성경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죄에 빠지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은 이것이 바로 마음의 궁극적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어서 마음에서 이러한 것이 간헐적으로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오는 바, 바로 그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주께서 감찰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이 분명하게 제시하는 이 세 가지 기준을 적용하여 율법을 읽어나간다면, 과연 누가 율법을 제안하신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겠는가?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마음의 표현으로서 이 율법 앞에서 정죄당하지 않을 인간이 과연 누구이겠는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바로 이 율법 앞에서 무력해진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마음과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길 수 없는 존재여서 율법의 정죄로 인하여 죄인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되며, 그 죄의 결과인 죽음을 상속하지 않을 수 없는 죄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율법 앞에 선 인간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궁극적인 자기 모습인 것이다.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선언이다. 성경은 이 죄의 보편적인 현상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 1:24-32)

     

    바로 이 사실에 직면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 이 어찌할 수 없는 죄에 직면하여서야 비로소 그리스도야말로 바로 이 죄의 궁극적인 절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나에게 의와 생명을 가져오시기 위하여 부활하셨다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메시지가 살아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 문맥에서 인간에게 구원자가 된다. 바로 이 일을 행하신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을 통하여, 바로 이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의 은총, 즉 죄의 궁극적인 책임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경험을 실존적으로 가진 자가 그리스도인이다.

     

    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신애가 이런 사실에 실존적으로 맞닥트린 경험이 있는가?” 달리 말하여, 옥살이 하고 있는 도섭을 대면하였을 때, 혹은 그를 방문하여 용서하려는 마음의 생각을 굳혔을 때, 과연 신애 자신은 앞에서 우리가 전개했던 그런 관점에서 자신을 파악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신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진정한 칭의 경험이 있었다면, 달리 표현하여, 우리가 아직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먼저, 혹은 조건 없이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실존적인 이해가 형성되어 있었더라면, 도섭의 말을 듣고 신애의 고민과 좌절이 그토록 깊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여, 자신 역시 도섭 못지않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교회를 떠나고, 장로를 유혹하고, 교회의 메시지를 향하여, “거짓말이야!”라고 규정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비록 신애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요, 신자들과 교제를 나누고, 그 신앙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신을 규정하였지만, 과연 그런 행위들을 넘어서 기독교의 근본 메시지의 중심에 다가선 인물이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아들을 잃은 슬픔, 즉 자신의 존재의 기반 혹은 근거라고 할 수 있는, 혹은 동양적인 삶의 정황에서 자신의 미래의 기업일 수 있는 아들을 잃었다는 점에서 신애가 당하고 있는 그 고난의 깊이를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가능한 한 충분히 공감하고, 충분히 그 고난의 한복판에 다가서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냉철한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 우리가 영화 “밀양”에서 분석해야 하는 인물이 도섭이라는 캐릭터다. 어떤 의미에서 도섭은 왜곡된 신앙인의 정형화된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영화상에서 볼 때, 비록 유괴 및 살인이라는 악독한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런 심각한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용서가 자신에게 제공될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그 동요되지 않는 고요한 표정과 또박또박 내뱉는 그의 말을 고려할 때,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용서받은 자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달리 표현하면, 신애가 도달하지 못한 기독교의 중심인 칭의에 도달한 사람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에서 청중은 불편함을 느낀다. 일반 청중의 불편함은 차치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뭔가 불편함을 느낀다. 달리 말하여, 하나님께서 그러한 죄인조차도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는 분명한 진리를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조차도 도섭의 모습에서 어떤 불편함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지나치게 고요하고 무감정한 그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상대방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않는 “무감정한” 태도 때문일 것이다. 과연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칭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에게서 “지나치게 평안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제럴드 브레이(Gerald Bray)의 다음과 같은 말을 참고함이 유익할 것이다.

     

    “때때로 모멸적으로 ‘값싼 은혜’라고 일컬어지는 사유 과정을 통해서 입으로 하는 회개가 죄를 없이하는 데 충분하며, 잘못을 고백하면 하나님은 자기들에게 어떠한 처벌도 가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는다. 이 과정은 자동적이며 고통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상생활의 흐름에 약간의 동요와 불편함을 초래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진상(眞相)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결코 경험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 사랑과 부딪혔었더라면,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위해서 지불해야 할 무거운 형벌이 있음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그 형벌을 짊어지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확실하게 하나님의 진노를 발하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비참함과 우리가 마지막으로 맛보게 될 것들로부터 우리를 건져내 주신 그 사랑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예수님도 당신의 제자들을 향하여,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3:34-35). 예수님께서 어떻게 제자들을 사랑하셨는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사랑하셨다. 목숨을 취할 수도 있고, 내어놓을 수도 있는 자인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자원하여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내어놓은 것이다. 자발적인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으며, 자기 백성을 향한 뿌리 깊은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동시에 이 사랑은 사랑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자들을 향하여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에서 그 진정한 의미가 돋보인다. 바울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여전히 죄인일 때, 아직도 연약할 때, 제공된 사랑이다. 이것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의미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삶의 태도인 것이다. 이런 사랑의 대상이었던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삶의 능력을 찾을 수 없는 도섭의 무감정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칭의의 은총의 심장에 실존적으로 도달하지 못한 모습을 보게 된다. 문제는 이런 모습이 혹 현실의 기독교인의 모습일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학습을 통하여 알고 있지만, 그 교리의 구조를 뚫고 들어가 그것이 드러내고자 하는 핵심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사랑을 교리화하려는 교조주의적인 도섭의 모습에서 현실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간과할 수 없는 마지막 인물이 있다. 지극히 속물적인 종찬이 바로 그이다. 좋게 말하면 속칭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지향하는 신앙의 본질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도, 노총각으로서 마음에 둔 신애 때문이고, 노방전도의 일원이 된 것도 신애 때문이며, 교회에서 주차관리를 하는 것도 신애에게 잘 보이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지극히 속물적인 행동일 뿐이다. 어찌 보면 교회의 문화에 크게 부대끼지 않으면서 그 문화의 한 구성요소가 되어가는 지극히 문화적인 기독교인이라고 평할 수 있다. 성경도 읽고, 찬송도 부르지만, 그에게 있어서 그런 행동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라든가 혹은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어찌 보면, 그것이 혹여 불경이라든가 혹은 찬불가라고 하더라도 신애가 곁에 있다면 언제든지 읽고 부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영화상에서 그는 신애를 향하여 그런 속물적인 동기에서 차츰 벗어나 진정한 인간적인 사랑에로 옮겨진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해낼 수 있는 그런 사랑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그를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의 중심 주제인 하나님의 인간성(humanity)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좋은 인간성을 가진 문화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애를 통하여 그려진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나 종찬을 통해서 묘사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나 도섭을 통해서 형상화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이들을 통하여 영화 속에 극화(劇畫)된 기독교가 과연 진정한 기독교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밀양”이라는 영화에서 의도적인 기독교 비틀기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달리 말하여, 현실의 기독교를 가능한 한 있는 모습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의 기독교를 향한 비판적인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다는 것이다. 비록 이 영화가 현실의 기독교를 고발하려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또한 이 영화의 원작인 『벌레이야기』의 원저자인 이청준이 자신이 쓴 이 소설의 배경이 “광주 민중 항쟁”이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밀양에 형상화된 기독교의 모습을 비판적인 눈으로 검토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를 통하여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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