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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나안 성도에 대하여]
  • [가나안 성도에 대하여]

     

    A. <접근유형 3>

    가나안성도에 대한 이슈가 제기되고 그 사안에 대한 다양한 고민과 방향들을 모색하는 가운데 있다.

    ...

    첫째는 전통적 시각에서 "종교적역량강화" 이다. “우리 때는 기도를 많이 했는데 요즘은 기도를 하지 않아” “전도대가 없어” 라는 식으로 기도와 전도의 역량문제로 보려고 한다. 더 공동체성을 강화시켜가는 방식을 택한다. 이러한 역량강화의 접근 자체가 그간 양적성장의 프레임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았다. 그 해결로 종교적 방식인 기도와 말씀,공동체 결속력, 혹은 프로그램의 방식이 대안으로 제시되어왔다. 가나안 성도 문제를 양적 성장의 회복문제로 볼 것인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두번째는 "교회개혁적 접근"이다. 주로 윤리적 회복과 구조적 갱신이다. 민주적 절차와 건강성을 담보한 리스트에 얼만큼 접근하느냐에 따라 대안이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중요한 측면을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정의에 민감하며 시대이슈에도 저항적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구조와 윤리적 갱신의 회복으로 교회의 가나안 성도 이슈를 따라잡을 것인가? 유기적 관계성의 헛점이 여전히 존재한다. 역시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세번째 미션얼적 접근이다. 주께 부름받아 보냄받은 현장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에 참여하는 일상회복의 방식이다. 관계에 환대적이며 대상의 고민에서 고민한다. 직장과 가정등 현장에서의 삶이 중시된다. 외피는 종교적 형태가 아니라도 그 내용을 영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접근성을 지닌다. 일상적인 미시적 접근에 더 용이하다. 하지만, 정치적, 사회적 위기와 거시적인 국면안에서 저항력이 드러나지 않을때 가나안성도들의 무관심이 생겨날 수 있다.

     

    혹시, 이러한 입장 어디선가 살아갈때에 이미 원인이 파악됐고 열심을 더 지녀야 한다고 여겨야 할까? 원인에 대한 나의 이해가 여전히 지금도 유효한가? 혹은 이후로도 유효한 접근성을 지니고 있는가? 의심해야 한다. 본질을 고민하면서 총체성은 늘 의심해야 하는 배우는 자의 의무일터...

     

    B. <다원적 접근>

    교회성장에 몰두하는 혼합주의, 이원론, 게토화, 성장주의, 승리주의, 지도자의 도덕성 실추, 대형교회문제 등이 줄기차게 제기되어 왔고 그것 중 하나라도 틀린 이야기는 없다. 그런 지점들이 적당하게 협력하면서 사실상 거기에 견디지 못한 성도들의 이탈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계층으로는 젊은층이 많고 그러면서 기존 제도권에 대한 회의를 가진 이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점들은 교회의 종교적 구조가 바르게 개혁되지 않아서로 모든 원인을 돌릴 위험이 있다.

     

    16세기 종교 개혁의 모든 진행은 구교내의 신학적, 윤리적, 구조적 문제에서만 파악하고 개혁의 지점을 해석해야 할까?

    당시, 종교적 지점에서 구교의 부정과 더불어 시민들의 정치, 사회적 억압에서의 탈출구로서 과거로 돌아가고픈 인문운동의 갈증 상황에서의 종교개혁의 촉발이라는점도 고려해야 한다. 세속역사와 교회사의 메커니즘이 동시에 고려된 섭리를 공감하지 않은채 단지, 종교개혁을 구교와 개신교의 양진영에서만 살필 것은 아니다. 구교의 부정과 결핍에서만 종교개혁의 이슈를 가져올 수도 없다. 그 시대의 교회가 맞닥뜨린 기존사상, 리더십, 체계와 구조, 윤리등의 부당함, 억압, 부담의 지점들을 교회내의 차원에서만 살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나온 사회의 역사적, 생태적 이해를 포함한 다원적 접근이 필요하겠다. 모색의 과정을 단지 교회내부에서의 경험이 풍부한 목회자, 혹은 설교자에게서 묻고 답하는 것은 중요하나 총체적인 사안을 보여주기는 부족하다. 안팎에서 서로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지점을 상호 대화하는 방식이 좋겠다. 학문에서는 신학과 더불어 인문/정치/경제/일상의 소소한 지점들까지 각자의 입장을 소통하고 상호 배워갈 필요성이 여기에서 생긴다.

     

    C. <가려진 고민 3>

    최근에 들어서 더 짚어봐야 하는 부분을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혼합주의나 이원화를 추구하지 않고 승리주의 대형화 물량주의에 편승하지 않는 공동체라도 가나안 성도는 발생한다. 더군다나 가나안성도 논의가 위와 같은 성격을 지니지 않는 공동체에서 조차 잘 논의되지 못한다. 이 이슈를 접근하면서 가려져 있지만, 꼭 고민해야 할 몇 3가지를 생각해 본다.

     

    1. 제3 정체성에 대한 접근

    제3의 정체성에 대한 접근이다. 흑/백이 아닌 회색의 지점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보려는 시각의 존중이 필요하다. 교회가 윤리적 부패와 구조적 억압을 민주적 방식으로 잘 하면 된다는 것에 대한 한계가 이 지점이다. 요한의 니고데모와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전통적 입장에서 영적 질문을 갖되 공개적 태도로 전환하기를 고려하면서 신중한 이들이다. 이러한 부류는 백이라고 하기도 흑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어느 유형을 이것으로 분류하는 것이 회색이냐는 복잡할 수 있지만, 우선 백과 흑의 논리로만 형성될 수 없는 제3의 독립적인 신앙적 사회적 기질을 갖는 유형이 있다. 자기가 몸담은 공동체의 윤리적 부정이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해내는 것으로만 선택하는 정체성이 아닌 것이다. 회색을 전부 타협내지 세속화로 볼 것이냐? 아니면 전통적인 입장에서 백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의 지점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자기만의 일정한 유형을 형성해가는 독립적 유형으로 볼 수도 있다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2. 생태적 환경에 대한 관점

    인간 개인의 신학적 신앙적 질문은 공동 혹은 공공의 이슈와 떨어질 수 없는 생태적 환경에 대한 이해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우리가 16,17세기의 유럽의 신앙고백과 신조들을 보면서 그것에 대한 관념적 이해를 넘어 우리 사회의 실천적 지점으로 가기 어려운 이유는 그 당시의 고백에 대한 이해력과 깊이가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우리시대와 한국사회 현실에 대한 통전적 이해나 그 사이에서 어떤 시각과 행동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들을 익히는 과정이 결핍됐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앉아서 고전들에 대하여 지식의 전달로서 복음적 행위까지 설명하려는 선생들의 모습 속에 대사회적 국면 안에서 자신이 속한 마을과 도시 안에서 이웃과 부대끼는 상황에서의 고민이란 매우 약화될 수 밖에 없다. 그만큼 배운 지식과 더불어 그것을 전달한 이들의 통로가 사회생태계 안에서의 실천적 행동으로서의 실존적 고민에서 떨어진 방식으로 익히고 배워온 거다.

     

    3. 자기 진영의 한계성

    과연 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 그리고 세계현실을 하나의 전통적 사상의 발전으로만 해석하려는 것이 맞는 것일까? 신학의 단일한 전통을 더 발전해가는 방식으로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혹은 그 안의 방법에서 조직이냐 성경이냐의 로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혹은 젊은 지성을 타겟으로 한 스캔들로 가능한가? 아니면 보다 대중적인 이해에서 접근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가? 파라처지의 문제제기와 대안이 일방적으로 쏟아질 때 그러한 시간이 장기화 되면 결국 로컬처치의 기반들이 도전을 받는 것을 넘어 외면당하진 않을까?

    개인의 신학적 전통, 경험, 기질, 관계는 분명히 어느 한편의 무게중심을 갖을 수 밖에 없는게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 발전시키는 발식으로 방식으로 전개해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상과 방식들과의 관용과 조화 속에 이뤄갈 것인가 하는 점들이 여전히 이슈로 나눠질 것이다. 자기진영의 한계를 계속 조화로운 선택들과 동시에 고민하지 않는다면 장기화될 때 어느 한 부분이 붕괴될 것이고 그것의 책임에서 자유로운 답변 이란게 원래 붕괴됐어야했다는 식이 되는 것은 오히려 무책임에 가깝지 않을까?

     

    D. <가나안성도들 - 사고, 패턴, 유형, 구조>

    위의 가려진 고민은 단순한 차원이 아니라 보다 다원적 차원의 공감과 이해를 필요로 한다. 첫째는 사상적 기반이 어떠한가 라는 것이다. 둘째는 기존에 대한 부당함인가? 새판에 대한 갈증인가? 플렛폼에 대한 이슈이며... 셋째는 그 사람에 대한 소통에 대한 고만인데, 가나안 성도들에 대한 유형이해와 접근하는 이들의 소통과정은 둘 다 고려해야 한다. 넷째, 로컬처치과 파라처치의 관계성이다. 이후 이 부분을 더 발전시켜갈 생각이지만, 개론적 차원에서 제기해본다.

     

    1. 사고 -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모더니즘은 체계적, 획일적, 가시적, 권위적, 일원적, 안전감의 특징을 갖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된 것이다. 위의 특징들이 갖는 부적절함, 부당함, 거북함, 부담감, 스트레스 등이 맞물려 수평적, 개방적, 소통, 비획일성, 느슨함, 비가시적, 다원적인 특징의 관성으로 작용한다. 20,30대는 대개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40대를 중후반 이후의 세대 87년 체제의 기간을 지나간 이들은 그 사이에 끼어 있고 50대가 넘으면 대개 모더니즘에 기반하는 경우가 현실이다. 가나안 성도의 이슈도 현실을 냉철하게 따져보고 학습해서 논리적인 이해를 갖기 보다는 모더니즘으로 원인을 분석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것에 익숙한 세대가 있다. 반대로 모더니즘의 방식에 일단 부담감을 표하고 새로움에 대한 기저만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사고에 젖기도 한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대안을 말하기 전에 가나안 성도의 사고체계와 그들과 소통하는 이들이 어느 지점의 패턴에 익숙한가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2. 구/신패턴 - 기존의 갈등인가? 일종의 새판의 추구인가?

    대개가 가나안 성도의 상당수는 기존 공동체와 현상에 대한 저항, 부당성, 부담으로 작동한 경우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최근에 상황을 보면, 꼭 기존의 부정적 상황에 대한 반동이 아니라도 시대의 변화와 다원적인 정치 경제 상황속에서 일종의 새로운 영적, 사회적, 관계적 갈망이 생겨난 부분이 존재한다. 좀더 대안적이고 자연친화적 삶을 추구하는 유형과 자기철학에 의하여 일정한 공동체로부터 이탈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패턴이 나타난다. 이러한 경우는 사실상 윤리나 구조의 문제를 껴안고서 떠난 이들보다 함께하는 과정이 더 복잡하고 더 어려울 수 있다. 크게 볼때에 이 둘은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3. 유형 - 유형 이해 & 소통이해

    그들의 기반을 이해할 때 유형을 분류해보는 것은 이해의 확장을 가져온다. 우선, 가나안 성도의 유형은 단순하지 않다. 흔히 말하듯이 대형교회, 지도자들의 윤리, 성장주의, 승리주의에 대한 폐단, 제도권에 대한 거북함 등이 있을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더 다양한 분류가 가능하다. 먼저 그들에 대한 어느 지점에서 가나안 성도가 발생했는지 단순한 분류보다는 복잡한 분류에 익숙해져야 할 때다. 또 섣부른 대안을 제시하기에 앞서 개별 유형에 대한 접근도 단순하게 접근하려는 유혹을 피해야 한다. 또한 소통의 문제 대해서 단기간 보다는 장기간 소통을 처음부터 의도해야 한다. 유형과 더불어 소통의 다원적 공감을 갖지 못하면 오히려 더 장기적으로 잃어버릴 가능성도 발생한다.

     

    4. 구조 - 파라처치 & 로컬처치

    선교단체 출신의 로컬처치에 속한 젊은 계층들에게 한정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파라처치의 자유스러움, 원심적 접근, 사회적이슈에 대한 소통의 공통분모에서 자란 세대는 더 다양한 계층이 공존하고 대사회 이슈보다 개인적 관계에서의 책임이 확장되고, 이슈에 비하여 관계적 상황이 훨씬 더 발생하는 로컬처치의 상황들에서 파라처치의 대한 로망이 있다. 더군다나 로컬처치의 생태적 환경을 이해하거나 그 역할을 배우기 전에 이미 파라처치의 입장에서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자리잡을 때 공감은 상당히 저하된다. 이러한 점에서 파라처치의 기능상 로컬처치를 견제할 수도 있겠으나 긴 안목에서 볼 때 어떤 협력인지는 더 고민해야 한다. 기존에서 로컬이 파라처치를 지원하는 방식에 대하여 로컬처치가 바르게 응대하지 못하고, 무시하거나, 로컬 자체가 휘청거리는 현 시점에서 그 대안으로 이제는 파라처치가 로컬의 지적, 정서적 기반을 대체하고 혹은 그 구조 들어와 다시 판을 짜는데 일조하는것이 당장은 빠른 해결같지만, 어떤 식으로 전체 생태계를 고려하는 것이 마을과 지역내의 로컬처치에도 실제적인 대안이 될지는 더 고민이 필요하다. 특히 대형교회안으로 전문적인 세미나나 활동들로 오는 것이야 협력이 되지만 대개의 지역의 작은공동체 안에 어떤 방식으로 협력해야 할지는 보다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이 지점이 현재 가나안 성도문제를 다루는 파라처치과 로컬처치의 상호소통이 있어야 한다.

     

    E. 유형분류
    <가나안 성도의 10가지 유형>

    몇 달 전 포스팅은 8가지 유형이었는데 몇분의 아이디어에 따라 2가지 유형을 추가했습니다. 도움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1. 귀족형
    지식층, 맘에 맞는 곳 찾아 수평이동, 30대주요, 지적만족 중요, 의미충족중시, 주중모임으로 만족하기도 함, 젊은층이 다수, 세미나 찾아다님, 신학도서 많음, 강연중심의 신앙생활, 교회중심 봉사 소극적, 개별 스타일을 존중하는 공동체 찾음, 지나친 관심 부담 ,과거 선교단체에서 활발했으나 기존교회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음

    2. 힐링형
    기존의 관계에서 상처 많음, 40대이상이 주류, 환대하는 공동체를 찾음, 관계가 중요함, 소속에 대한 갈증이 있음, 좋은 사람들이 많은 것 선호, 지성적 설교나 교리중심의 분위기 부담, 따뜻한 모임 분위기 선호, 말씀이 치유나 용서 회복원함, 운동이나 문화적 친교에 관심 많음, 종교적인 상처인 이들은 보다 세밀한 지도원함.

    3.리더형
    지도자였던 경험이 있음, 신학전공자들이 많음, 뒤에서 조용이 예배드리고 가는 스타일, 부르심에 대한 고민이 큼, 이대로 살기 싫은 내면의 충동이 있음, 뭔가 사역적 돌파구를 찾으려함, 바빠도 교회중심의 일을 원함, 손해를 감수, 과거와 상관없이 편하게 머물 수 있는 공동체를 찾음. 자신이 궁금한 신학적 질문에 대하여 공감대 필요

    4. 바람형
    쉽게 왔다갔다 하는 형. 기준이 너무 명확해서 옮겨다님. 언제든 올 수 있고 언제든 갈 수 있다. 두발을 담근적이 없다. 대체로 대형규모에 포진, 최근에 작은규모에도 나타남, 현실에 대한 비판, 잘 돌파하지 못함, 사소한 인간관계에 예민함, 돈문제 민감 , 정의감 많음, 현실의 책임회피, 거리를 가진 친교

    5. 은둔형
    일주일 예배한번 참여원함, 다른 모든 상황에서 너무 깊게 들어오는 것 거부, 노터치, 내면에 자기만의 골이 있음, 귀차니즘의 유형 은근히 종종, 예민한 성격, 우울증 , 언제라도 잠수가능. 묵상과 내면적 관계중시하는 공동체 찾음, 행사중심 의 공동체 싫어함. 수도원적 영성에 일반생황의 이해가 따르는 공동체 필요. 쉬어야겠다 맘 먹으면 장기간 쉼.

    6. 이상형
    자기기준 명확, 도덕적. 종교적 잣대에 의해 예배와 모임 사역의 기준이 높음, 이상적이지만 자신은 깊이 현신하기 어려워함, 상대를 찌르는데 익숙. 수준이 안맞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음. 비판은 있지만, 대안을 자신이 감당하기는 거부함. 대화하면 주변이 상처를 받는형. 슬럼 형성, 자기이해 필요한 공동체를 찾아 유랑 그러나 없음. 따뜻한 시각 필요. 상황과 상대방 이해결핍. 부족을 채워주는 이상공동체를 늘 동경하면서 살아감. 순수한 이상주의자, 이상과 현실의 갭에 대한 이해 부족.

    7. 소수형
    성, 장애, 인종, 사회적 소수자의 배경을 지닌 분들. 공감하지 못한 상황민감, 상대의 선입관이나 편견이 보일때 정착하지 못함. 이해하는 지도자를 만나나 이내 주변인들에 대한 실망, 늘 사람을 찾지만 충족안됨. 공감과 이해 평범한 관계필요. 지속적 동행갈망, 밀착할 수 있는 모임추구, 겉이 아니라 속이 따뜻한 공동체 필요, 환대의 기본적 분위기 중요. 친구 필요.

    8. 전원형
    도시에서 시골로 귀농, 귀촌하는 경우에서 발생, 최근에 증가, 쉼에 대한 추구많음, 사람들과 얽히는 것 어려워함, 시골의 혁신학교 혹은 대안형 교육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나타남, 60이 이후 조기은퇴 후 시골로 귀촌, 유기농 식단과 전원풍의 마을 선호, 가족형 단위로서 지나친 공동체 형성 지양, 시골교회가 도시의 수준에서 맞지 않는다고 여기는 수수사례, 시스템에서 자유로움 추구, 그간 얽혀있는 도시교회의 밀착에서 벗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짐, 원주민들과의 문화적 갈등에서 해결 안되는 경우.

    9. 전통형
    과거의 전통을 잘 알고 있음, 종교와 일상의 이원적 시각이 자연스러움, 관습을 기준으로 삼음, 과거의 리더십을 낫게 평가, 옛것의 소중함이 현대보다 중함, 변화의 낯설음, 젊은 세대와의 소통에 어려워함, 교리에 익숙함과 중시, 수평적. 개방적 소통부담감, 사도신경과 주기도문등이 교회선택에 중요한 항목, 성가대의 고전곡 중시, ccm 불편, 찬송가 익숙, 예배형식중요.

    10. 복합형
    자기의 무게 중심은 있지만, 현재 몇가지 유형이 동시에 작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나이가 어릴수록 복합적인 상황이 더 많다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경우 균형을 매우 중요시 합니다. 특히, 지도자의 독단이나 카리스마의 페단을 심각하게 겪은 사람들은 균형에 매우 민감한 방응을 보입니다. 목회자의 개인적 영성보다 공동체의 객관적 지표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러한 유형은 매우 신중하게 선택하며 주변의 평가를 중요시 합니다. 역으로 그 공동체의 내밀한 진가를 놓칠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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