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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퍼온글, 기독교 인물로 기억되는 김활란 주요한의 친일행적

  • 친일작품하면 우선 떠오르는 분야는 당연 문학이나 예술작품이다. 이같은 작품들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의 사상과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인구 1/5의 신도를 자랑하고 있는 개신교의 통합찬송가에도 친일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친일파가 만든 찬송가가 각 교회마다 애창되고 있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일부 찬송가에서는 이들을 독립운동을 한 작가처럼 해설하고 있다. '노래로 부르는 나의 신앙고백'이라는 찬송가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이는 반드시 청산되어야 할 일제잔재 중 하나다.

    문제의 찬송가는 304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과 461장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다. 이 두 찬송가는 각각 친일행적을 한 인물로 잘 알려진 주요한과 김활란이 작사했다. 찬송가 전체 600여곡 중 비교적 많이 불려지는 곡에 속한다.

    친일의 길 걸은 여성지도자의 대명사 '김활란'

      
    ▲ 김활란 전 이화여대 총장  


    강정숙(영남대 강사. 여성학)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 쓴 <김활란, 친일의 길 걸은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라는 논문에 따르면 김활란은 일제하에서는 '여성박사 1호, 전문학교의 유일한 여성교장, YWCA 창립자' 등 수식어와 함께 교육·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혀 왔다.

    8·15 이후에는 이화여대 총장과 배화학원·국제대학 등 여러 학교의 이사장직을 맡았으며, 사회단체로는 YWCA·한국여성단체협의회·대한부인회·주부클럽연합회 등 여성단체를 설립하고 회장 등의 임원직을 역임했다.

    또한 정부 수립 직후에는 유엔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 6·25 때는 공보처장, 1965~70년에는 대한민국 순회대사, 한국아시아반공연맹 이사 등 정치·외교활동도 했다. 이러한 활동 결과 정부로부터 1963년에는 대한민국장 포상을 받았고 1970년 사망한 후에는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을 받은 인물이다.

    이처럼 한국 교육·기독교계 여성지도자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는 김활란이 친일행위를 시작한 것은 일제가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 건설을 위해 민족말살정책·황민화정책을 시행하여 내선일체를 내세우던 1930년대 후반이다.

    강 연구원은 김활란의 본격적인 친일행위 시작을 "1936년 말 총독부 사회교육과가 '가정의 개선과 부인교화운동의 촉진'을 목적으로 주최한 사회교화간담회에 참석하면서부터"라고 쓰고 있다. 그 뒤 김활란은 1937년 조선부인문제연구회 결성, 애국금차회 발기인 참여,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00명 처녀들로 '총후 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했다.

    1939년 이화전문학교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히는 것에 앞장섰으며, 1941년 말에는 야마기 카쓰란(天城活蘭)으로 창씨하고 학병·징병 권유에 앞장섰다. 또한 부인궐기촉구 강연, 결전부인대 강연, 방송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정책을 미화하고 내선일체·황민화시책을 선전하며 일반여성이나 여학생들에게 '어머니나 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학병 동원에 대한 이해를 촉구했다. 이후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라는 글을 <신시대>(1942. 12)에 싣는 등 징병참여 독려글을 계속 게재했다.

    이러한 징병제 권유활동에 대해 김활란의 측근자였던 김옥길은 <김활란 박사 소묘>에서는 그가 1944년경 악성안질에 걸려 실명할 우려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남의 귀한 아들들을 사지(死地)로 나가라고 했으니, 장님이 되어도 억울할 것 없지… 당연한 형벌"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많은 친일행적으로 반민족행위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김활란이 작사한 찬송가 461장 가사는 이렇다.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불 때/ 만경창파 망망한 바다에/ 외로운 배 한 척이 떠나가니/ 아 위태하구나 위태하구나(1절)
    비바람이 무섭게 몰아치고/ 그 놀란 물 큰 파도 일 때에/ 저 뱃사공 어쩔줄 몰라하니/ 아 가련하구나 가련하구나(2절) <이하 3·4·5절 생략>

    이에 대해 <해설찬송가>에서는 작사자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김활란(1899~1970)은 인천 태생의 여성 지도자. 교육가. 이화여전 재학시 그녀는 이화전도단을 구성 전국을 순회하며 복음과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 경찰들은 전도 활동을 금지시키고 말았다. 여기에 울분을 느낀 그녀는 조국의 운명을 만경창파의 배 한척으로 비유하는 동시에 나라의 운명을 주님의 자비로운 손길에 부탁하는 본 시를 작시하기에 이르렀다."

    이 내용만 보면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람으로 오해하기 쉬운 해설이 아닐 수 없다. 또 김활란이 실제 '울분'을 표현한 것인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사실여부를 떠나 친일행적에 대한 아무런 언급 없이 '항일'로만 환치시켜 설명하고 애창하는 것은 모순이 분명하다.


    김활란이 <신시대>에 기고한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1942. 12)'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그러나 반도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감격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  




    대표적 친일문학 작가 '주요한'

      
    ▲ 주요한 전 시인  


    주요한은 한국최초의 본격적인 근대 자유시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불놀이'로 잘 알려진 작가다.

    민족문학사연구소 김윤태 연구원의 '주요한, 대동아공영의 꿈 읊조린 어릿광대'라는 글에 따르면, 그는 김동인·전영택 등과 함께 <창조>를 창간하면서, 문학활동을 통해 민족운동에 관여하고자 했다. 1925년 대학졸업 후 귀국하여 <동아일보>에 입사하고 이듬해 학예부장으로 취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광수가 이끄는 수양동우회의 중요 멤버로 활약했다. 수양동우회는 안창호가 설립한 '흥사단'의 국내단체다.

    그는 한때 <동아일보> <조선일보>등 언론계에 종사하면서 수양동우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기어코자 했다. 그러나 일제는 1937년 6월 6일 해산령을 거부하던 수양동우회에 대해 일제 검거를 시작했다. 150명의 피검자 가운데 2명이 옥사하고, '화수분'의 작가 전영택, 작곡가 현재명과 홍난파 등 18명이 전향 성명을 발표했다(1938.6.29). 이 사건과 함께 그도 역시 친일의 대열로 들어서게 된다.

    김 연구원은 그가 공식적으로 친일행위를 시작한 것은 "1938년 12월 수양동우회를 대표하여 국방헌금조로 4000원을 종로경찰서에 기탁하면서부터"라고 말하고 있다.

    이광수에 버금가는 화려한 친일 문필활동을 한 주요한의 창씨명은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다. 그는 1941년 12월 14일 조선임전보국단에서 개최한 미영타도강연대회에서 '루즈벨트여 답하라'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면서 "반도의 2400만은 혼연일체가 되어 대동아성전의 용사되기를 맹세하고 있다"고 외쳐댔다.

    1943년에는 '약의 시대'라는 글에서 "출진 학도의 구두소리는 아시아 부흥의 진군이 되고 조선의 일본적 재생의 새벽종소리가 될 것"이라며 학병 출전을 권유했다.

    그의 대표적인 친일작품이며 1944년 4월 25일 제5회 조선예술문학상 수상시집인 <손에 손을>(手に手を)(박문서관. 1943. 7)에서는 '오늘에서랴 우리를 / 부르시는 높으신 뜻을 / 서로 전하여 말하며 / 눈물 흘리는 것을(1절)'이라고 적고 있다.

    이 시처럼 조국의 젊은이들을 전장의 사지로 몰고가려는 일제의 만행에 대해 오히려 눈물 흘리며 감사하고 있는 내용은 '아침햇발', '파갑폭뢰(破甲爆雷)', '대군에게', '댕기', '첫피' 등의 시에도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다. 그밖에도 그는 '임전조선', '최저생활의 실천', '직장, 도장, 전장', '나서라 지상명령이다', '징병령 실시와 조선청년' 등의 수많은 시국논설을 통하여 내선일체의 완성, 황국신민으로서의 임무 완수, 자발적인 성전참여 독려 등을 부르짖었다.

    이러한 대표적 친일작가 주요한이 지은 찬송가는 304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이다. 이 곡의 가사는 이렇다.

    어머니의 넓은 사랑 귀하고도 귀하다/ 그 사랑이 언제든지 나를 감싸줍니다/
    내가 울 때 어머니는 주께 기도드리고/ 내가 기뻐 웃을때에 찬송부르십니다.(1절)
    온유하고 겸손하며 올바르고 굳세게/ 어머니의 뜻 받들어 보람있게 살리다/ 풍파많은 세상에서 선한싸움 싸우다/ 생명시내 흐르는 곳 길이 함께 살리라(4절)

    또한 찬송가의 해설에는 "주요한(1900~1979)은 시인이며 언론인·정치인, 젊었을 때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했으며 후에는 시인으로 문예 동인지 <창조>에 '불놀이'란 시를 발표하였다"며 "본 찬송시는 1967년 한국 찬송가 위원회로부터 어머니날 찬송가를 의뢰받고 특별히 쓴 것으로 자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 어머니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특별히 부각시키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이 해설도 김활란의 해설과 마찬가지로 주요한을 독립운동가로 착각하기 알맞은 해설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대표적인 친일파들이 작사한 곡들이 여전히 예배에 사용되고 있고, 또 그들의 생각을 빌어 일천만명의 개신교인들이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친일청산의 사각지대에 놓인 종교계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한다.

    찬송가이고 종교의 문제니 그냥 넘어가야 할까? 아니다. 삭제해야 한다. 더불어 기독교의 과거 친일행적에 대해서도 사과하고, 더 세밀히 연구해서 왜곡되어 있는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 그게 참 기독교정신을 구현하는 길이다. 그것이 나라와 민족의 역사 속에서 진리의 편에 서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이라 감히 장담한다.


    주요한이 지원병 출신으로 죽은 이인석 상등병에게 바친 <첫피>(1941.3)  


    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목껏 부르고/ 대륙의 풀밭에/ 피를 부르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 피는 뿜어서/ 누런 흙 우에/ 검게 엉기인다/ 형아!아우야!

    이 피는/ 너들의 피다/ 너들의 뜨거운 피가/ 2천3백만 너들의 피가/ 내 몸을 통해서/ 흐르는 것이다/ 역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뿌려지는 피다/ 반도의 무리가/ 님께 바친/ 처음의 피다.

    나는 내 피에/ 고개를 숙이어/ 절한다/ 그것은/ 너들의 피기 까닭에/ 장차 내 뒤를 따라올/ 백과 천과 만의/ 너들의/ 뜨거운 피기 때문에/ 아아/ 간다/ 나는/ 너보다 앞서서/ 한자욱 앞서서/ 만세, 만세.  



댓글 1

  • Profile

    김바우로

    2004.08.16 18:33

    음... 광복절을 맞이하여 올리신 글인가요...?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http://minjok.or.kr/ <-- 여기를 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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