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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 11월 6일] 루가 15:11-24 아버지의 사랑!
  • 청지기
    조회 수: 2171, 2005-11-07 08:19:14(2005-11-07)
  • 성경을 보면 오늘 본문의 제목이 ‘잃었던 아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잘 들어보면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제목이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야기는 한 부유한 농장에서 시작됩니다. 농장의 주인은 아주 부유한 재산가였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찾아와 자기에게 돌아올 몫의 재산을 미리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이것은 고대 사회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로, 사실상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죽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이 요구되는 당시 사회에서는 심각한 반역의 행위였던 것이죠.

    당시 사회 관습이라면 아버지는 그 자식을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호통을 치고 때리거나 그 보다 더한 벌을 내릴 수 도 있었을 터인데, 성경의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요청을 들어주고 그가 기대하는 만큼의 재산을 넘겨주었습니다.

    당시 법으로 따져보면, 장자는 언제나 두 몫을 받게 돼있기 때문에(신 21:17) 아버지 재산의 1/3를 받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서 자기 몫을 챙겨 마음껏 즐기고 살고 싶은 둘째 아들의 모습 속에서 아버지와 형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과 이기심만을 관철시키는 죄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재산 상속이 임종 직전에 이루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둘째 아들은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 서둘러 자기 몫을 챙긴 것입니다.

    오늘날도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상식을 넘는 “자기 몫 챙기기”에 급급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이렇듯 둘째 아들의 모습은 우리 인간의 자화상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은 우리의 깊은 죄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보면, 누가 가르쳐 주기 않아도 움켜쥡니다. 한 손에 사탕을 들었어도 남이 가진 것을 보면, 그 사탕을 빼앗아 또 다른 한 손에 또 움켜쥐고 싶어 합니다. 이 깊은 욕심에서 나오는 이기적인 행동은 둘째 아들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게 합니다.

    13절,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 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갔다.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처분할 수도 없는 재산을 불과 며칠 안에 다 처분하고 그 돈을 거두어 들여서는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외지로 떠나가 버립니다. 떠날 때의 포부야 이것을 밑천으로 삼아 내 인생을 멋지게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일 것입니다.
    하지만 현명한 판단력이나 자기 절제가 없는 둘째 아들은 "돈 잘 쓰는 사람"으로 인정이나 받고, 자기가 가진 돈 때문에 사람들이 건네주는 아첨하는 말에 자만심이나 커 졌을 뿐,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있는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고 자기 욕심에 이끌려 아버지를 떠나 자기 멋대로 마음껏 산 삶은 비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가진 것이 다 떨어졌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고장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서는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돈 있을 때는 그렇게 많던 친구들? 알거지가 되니까 의지할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하는 수없이 유다인의 자존심도 세우지 못하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더부살이로 연명하는 종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유다인이라면 차마 할 수 없는 가장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둘째 아들은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돼지의 음식으로 쓰는 쥐엄나무 열매라도 먹고 배를 채워보고 싶었지만,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보다 더 비참한 인생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자 아버지의 아들이었던 그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살아가는 비참한 노예의 신세가 된 것입니다.

    성경은 둘째 아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실존을 보게 합니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고 만물을 다스리며 살아가야하는 우리 인간이 돈과 욕심의 노예가 되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며 먹어도 마셔도 움켜쥐어도 만족이 없는 공허한 인생을 살고 있는 인생 말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둘째 아들처럼 인생의 바닥을 지날 때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립니다. 자기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버틸 건덕 지라고 있으면 정신을 차리지 않습니다.
    바닥을 칠 때야 비로소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생각을 갖게 됩니다. 실제 그런 인생을 살아온 분들이 이 자리에도 계십니다.

    스스로 겸비하여 주님께 돌아오면 좋으련만, 우리의 교만과 죄성은 그렇게 호락호락 우리를 놓아주지 않나봅니다.

    17절-18절-19절 말씀들이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그려줍니다.  

    17절, 제 정신을 차립니다. 욕심과 이기심의 죄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었었는데 본래의 자기로 돌아온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과 지금 자기의 비참함을 바로 보게 됩니다.

    18절,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습니다. 진정한 회개가 일어납니다. 아버지를 등지고 떠났던 인생을 돌이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19절, 떠날 때는 자기 권리를 주장했는데 이제는 아무런 자기  주장도 없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찌 하리까?”

    좌절하고 포기하면 기회가 사라지지만, 깨닫고 돌아서면 새 출발을 위한 축복의 기회가 옵니다. 결국 회개는 기회를 가져왔습니다. 지금 당신에게는 탕자인 둘째 아들처럼 뉘우치고 돌이켜야하는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제 아들의 욕심과 이기심의 죄로 인해 끊어졌던 관계가 아버지의 주도하에 그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20절을 보면 아버지의 주도적인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20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 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는 매일같이 마을 입구까지 나와 혹 오늘이라도 아들이 돌아올까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들이 어떤 모습으로 오던지 돌아오기만 하면 그를 따스하게 안아줄 생각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이 온 것입니다. 돼지 여물 구정물 냄새가 나는 누더기 옷을 입은 거지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그 사람이 바로 자기의 둘째 아들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에게 오기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양반은 비가와도 뛰지 않는다고요? 달려가는 것이 유대 남자의 체면을 깍아내는 일이지만, 체면 따위는 필요 없었습니다.
    “상거가 아직 먼데”(개역성경), ”But while he was still a long way off(NIV)”  아버지는 옷자락을 치껴 올리고 아들을 향해 달려간 것입니다. 와락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내 아들아! 돌아와서 고맙다.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고맙다 아들아! 사랑한다. 아들아!"

    목을 끌어안는다는 것은 자식으로 받아들인다는 행위입니다. 입을 맞추는 친밀한 사랑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관계의 손상은 아들의 주도로 일어났지만, 관계의 회복은 실상 아버지의 주도적인 행동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버지는 더 나아가 눈물을 떨구며 용서를 구하는 아들을 위해 하인들에게 구정물 냄새나는 아들의 옷을 벗기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라고 명령하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신을 신겨주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라고 말합니다.

    집안에서 제일 좋은 옷은 아버지의 옷이었을 것입니다. 반지에는 가족의 인장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유복한 가정의 아들로 다시 복위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종들은 신을 신지 않고 주인의 신발을 운반하고 끈을 매 주는데, 아버지는 아들에게 신을 신겨주며 "아니, 나는 너를 종으로 받지 않겠다. 나는 너를 아들로만 다시 받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유다인들은 가장 귀한 손님이 왔을 때만 송아지를 잡습니다. 송아지 고기가 제일 맛있다면서요.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에게는 가장 귀한 손님인 것입니다.

    옷자락을 치켜들고 아들에게로 달려가는 아버지, 역겨운 돼지 우리의 냄새가 나더라도 껴안고 입 맞추시는 아버지,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며 신을 신겨주시는 아버지. 살진 송아지를 잡아 온 마을 사람들과 함께 기쁨의 잔치를 벌이시는 아버지. 이 분이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할렐루야!

    돌아온 아들에 대한 기쁨의 잔치는 아들로서의 권리 회복을 동네 사람들과 종들, 그리고 탕자 자신에게 선포하는 자리였습니다.  만약 회복된 관계를 공식적으로 선포하지 않는다면 탕자는 돌아왔다 할지라도 사람들의 비웃음과 자책감 속에서 괴로워할 것입니다.
    잔치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나타나는 것으로 이 비유 말씀의 핵심이며 복음의 진수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회복된 아들의 신분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아주 중요한 진리입니다.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면 그 축복을 확인하고 누려야 합니다.

    이사야 12:2-3,
    “진정 하느님은 나의 구원이십니다. 내가 당신을 의지하니,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야훼는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이십니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떤 처지와 환경에서도 범사에 감사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떠나 죄의 노예로 비참하게 살아가던 인생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진 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오늘 추수감사주일로 예배하면서 이 어려운 인생살이에서 뭘 감사한단 말인가 불평하던 입술이 있으시다면 이 구원의 은총을 다시 한번 새기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함으로 나가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동구 밖에 나와 아들을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는 이내 체면 따위는 뒤로 한 채 아들을 향해 뛰어가 껴안고 입 맞추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  
    멸시와 조롱 속에 십자가를 지시고 보혈을 흘리신 예수님 !  
    그래서 누구든지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 !  

    로마서 5장 8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할렐루야 !

    오늘 다시 한번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 존귀한 하느님의 자녀의 신분을 회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저 20절 초반의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는 말씀처럼 지금까지의 삶에서 돌이켜 하느님께도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한 1장 12절에서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단순한 일이지만,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입니다.

    어떤 전도자가 석탄광 속에 들어가서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광부들에게 하느님의 값없는 구원을 가르쳐 전도하였습니다. 일할 시간이 되어 전도자는 탄광을 나오면서 광부에게 아까 한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광부가 “값이 너무 헐해서 그런 종교는 믿어지지가 않소.” 하고 대답했습니다. 전도자는 그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승강기 앞에 서서 이제 이 탄광을 나가려면 어떻게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거야 타고 올라가면 그만이지요.”
    “위까지 올라가는데 한참 걸립니까?”
    “한 3분밖에 안 걸립니다.”
    “그럼 나는 애쓸 필요가 없군요.”
    “맞습니다. 당신은 그냥 타고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처음에 이 탄광을 파고 이만한 장치를 한 사람은 힘도 들고 돈도 많이 들었겠네요.”
    “그거야 그렇지요. 이 지상에서 500m 아래에 있지요. 사장이 돈 쓴 거야 말할 수 없지요.”
    “네, 옳은 말씀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하느님 말씀에 그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했는데, 당신은 ‘너무 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멸망과 사망의 굴에서 당신들을 구원해 내시는 하느님은 독생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막대한 비용을 들였답니다.”

    우리를 위해 독생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느님,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 시간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히브리 9장 12절에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 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 받을 길을 마련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요한 14 : 6,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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