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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월 15일 희년실천주일
  • 2013년 희년실천주일 설교문 루가 4:16-19

    하느님의 기업(基業, 땅) 복귀시키라

    1. 만물은 하느님의 것

    성경이 선포하는 첫 번째 메시지는 이 우주 삼라만상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인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주와 역사의 주인은 창조주 하느님뿐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혼돈과 공허뿐인 흑암 속에서 만물을 창조해내셨습니다(창1:1). 혼돈 속에 질서를 부여하셨고, 흑암 속에 광명을 주셨습니다. 또한 공허 속에 아름다운 것과, 참된 것과, 가치 있는 것들을 채워 넣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땅의 짐승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들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을 관리할 자로 인간을 내셨습니다.

    만물이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므로 하느님께 속하였고, 하느님께로 돌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하느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아, 결국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피조물 중에 그 어느 것도 영원토록 소유할 수가 없는 관리자일 뿐이며, 청지기요, 하느님의 종에 불과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청지기에 비유한 말씀이 많이 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이 다 주인이신 하느님의 소유요, 우리들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훈련받게 하기 위하여 잠시 동안 맡기신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 생명과 건강도 하느님께서 내게 맡기신 바요, 내 가족과 내 재산도 하느님께서 내게 맡기신 바요, 내 직업, 내 지위, 내 권한, 내 기회들이 다, 우리 주인 되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에게 잠시잠간 맡겨 주신 것입니다. 아멘이십니까?

    2. 토지는 하느님의 것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것 가운데 성경이 가장 특별히 다루는 것 중 하나가 토지입니다. 토지는 절대적인 삶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토지 위에다 집을 짓고 살아가며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며, 먹고 살기 때문에 땅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땅은 생명 있는 것들의 근거인 동시에, 생명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가 생명이기에 피를 먹지 못하게 규정하신 하느님께서는, 땅도 개인이 소유할 수 없고 영원토록 하느님께 속한 것임을 명시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25장 23절에서 하느님은 말씀하시기를, “땅은 아주 팔아 넘기는 것이 아니다.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 하셨습니다.

    모든 땅이 하느님의 것이지만, 특별히 가나안은 구원의 역사를 착수하신 하느님께서 제일 먼저 사용하시기로 선택한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구원역사의 장자백성인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그의 고향 우르에서 불러내실 때에 가나안을 가리키시면서 그곳을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갈 땅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미 여러 이방백성들이 진을 치고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전쟁을 치르고서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호전성과 민족적 우월감에 관심을 집중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주목할 곳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그 치열한 전쟁 끝에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 땅을 분배하신 일에 주목해야 합니다.

    지파별로, 가문별로 그리고 나중에는 매 가정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기업’을 분배합니다. 이때 하느님의 백성들은 ‘부동산 소유’ 개념이 없었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기업’만이 존재했습니다.

    하느님의 기업 가운데 내가 어느 지파의 분깃을 맡았나, 그리고 우리 지파의 분깃 가운데 내가 어느 가문의 분깃을 맡았나, 그리고 우리 가문의 분깃 가운데 내가 어느 집안의 분깃을 맡아 관리하고 있는가라는 개념으로 땅을 취급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자기 집안에 맡겨진 하느님의 기업을 잘 관리할 영광스런 책임이 하느님의 백성 모두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복음 5장 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가 하느님의 기업인 땅을 맡아서 관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기업은 이스라엘이 모든 열방 가운데 정의와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하느님의 나라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하느님의 선교에 가장 핵심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땅을 ‘받는’ 일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땅이 ‘하느님의 기업’이라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3. 안식일 - 안식년 - 희년

    하느님께서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실 때부터 안식일을 두셨습니다. 안식일이나 안식년은 안식 곧 ‘쉬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쉼을 통해서 창조된 본 모습을 회복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일하는 동안에, 살아가는 동안에 몸과 마음이 상하고 피곤해집니다. 또한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몸도 쉬고 마음도 쉬는 가운데 창조된 우리의 본 모습을 회복합니다.

    쉬게 하면 회복되도록 하느님께서는 만물 속에 안식의 장치를 이미 두셨습니다. 그래서 매 7년마다는 토지도 쉬게 함으로써, 토지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게 해 주셨고, 특별히 7년이 일곱 번째 돌아가고 난 다음의 해를 복된 해라고 해서 ‘희년’으로 정하셨습니다.

    희년은 안식기간 중의 안식기간으로서, 종으로 팔리었던 사람은 자유인이 되고, 빚을 갚기 위해서 빚 대신 넘겨주었던 하느님의 기업인 땅도 원 관리인에게 반환하는 법을 세우신 것입니다.

    빚을 갚지 못해서 빚 대신 맡겼던 땅을 도로 차지하게 된다는 것은 토지사유제도 속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법제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세우신 법은 분명합니다. 토지는 사유화해서 멋대로 사고 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나봇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이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하느님의 기업인 땅, 곧 좋은 포도원이 있어서 화를 당합니다. 욕심꾸러기 아합 왕이 그 포도원을 탐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봇은 그 포도원이 하느님의 기업의 땅이기 때문에 줄 수 없노라고 거절하지만 왕후 이세벨의 농간으로 그만 나봇은 끝까지 하느님의 기업인 포도원을 지키려다가 목숨까지 빼앗기고 맙니다.

     

    4. 토지정의 실천에 실패한 기독교

    우리 자신을 돌아 봅시다. 우리는 하느님의 기업의 땅을 맡아 관리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기업’과는 상관없이 부동산으로 이득을 탐하는 자입니까?

    기독교 국가를 자부하던 미국이 흑인에게도 땅을 주자고 남북전쟁을 벌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을 그친 후에 흑인들에게 땅을 주지 않았습니다.

    영국과 독일과 프랑스 같이 기독교 국가라고 볼 수 있는 나라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쳐들어가서 그 모든 나라 국민들을 식민지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호주는 원주민들을 멸종시키고 세운 나라이고, 남미의 모든 나라들이 원주민들의 정체성을 말살하면서 땅을 빼앗은 나라들이 아닙니까? 르완다는 백인들에게서 배운 대로 땅 뺏기 인종청소를 했던 나라입니다.

    이러고도 그들 나라가 하느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을 줄 압니까?

    기독교가 ‘정의’라는 단어는 사용해 왔지만 성경이 외치는 하느님의 공의는 말하지 않았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그리도 강조하던 사도 바울로께서도 공의를 실천하는 문제에 있어서만은 단호했습니다.

    필립비 3장 18-19절을 보십시오. ‘18 내가 벌써 여러 번 여러분에게 일러 준 것을 지금 또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바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 있읍니다. 19 그들의 최후는 멸망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뱃속을 하느님으로 삼고 자기네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며 세상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들입니다.’

    많은 땅을 소유하고서 막강한 지주로 행세하던 중세기 교회는 하느님의 법, 곧 토지공개념에 입각한 법을 들고 나온 무슬림들에게 삽시간에 패했습니다.

    그래서 중동과 북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 국민들을 무슬림이 되게 하였습니다. 더구나 ‘십자군’이라는 이름을 앞세운 군대가 저들을 치러 갔었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천추만대에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이 점점 교회를 외면하고 있으니까 현대교회들은 무슨 새로운 탈출구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 돌아가면 됩니다. 하느님의 법을 완성하시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이 시대에서 하느님의 법이 실천되고 성취되도록 교회는 힘써야 합니다. 십자가와 희년의 온전한 복음을 외치면 되는 것입니다.

    토지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 곧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땅만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시편 82편 8절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개역성경으로 읽어보면 “모든 열방이 주님의 기업이라”라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온 세계의 모든 땅이 다 하느님의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경제체제가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관계없이 세상의 모든 땅은 인간이 사유할 수가 없습니다. 땅은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땅은 투기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애당초 투자의 대상도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는 세계 앞에 모든 땅을 하느님의 기업으로 환원할 것을 선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교회가 이것을 깨닫도록 얼마나 오랜 세월을 기다려 오셨는지 모릅니다.

    5. 우리가 기념할 희년

    레위기의 희년법을 따라서 유대인들이 지켜오던 희년은, 그 해의 칠월, 곧 양력으로는 9월 중순 경에서 10월 중순에 이르는 달의 십일일이었습니다. 그 날은 속죄일로도 지켰는데 뿔 나팔을 큰 소리로 사방에 붊으로써 전국에 희년을 선포하였습니다.

    레위기 25장 10절은 ‘오십 년이 되는 이 해를 너희는 거룩한 해로 정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킬 해이다. 저마다 제 소유지를 찾아 자기 지파에게로 돌아 가야 한다.’ 했습니다.

    개역성경으로는 ‘기업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로부터 관리하도록 위임받은 땅을 떠나 살았으면 다시 돌아가라는 말씀이고, 기업의 땅이 친족과 일가들이 한데 모여 살아야 할 장소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희년을 지키러 고향을 찾게 되면 하느님께서 자기 가문과 자기 가족에게 위탁하신 하느님의 기업을 점검합니다. 땅의 관리 책임이 얼마나 성실하게 되고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팔았던 땅이 있었으면, 회복시켜야 하고, 남에게 빌린 땅, 빚 대신 맡았던 땅이 있으면 원래의 관리권자에게 반환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희년에 우선적으로 실천했던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추석이 이 희년법을 따라, 우리가 맡은 땅을 하느님의 기업으로 환원시키는 계절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희년법이 시행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는 땅이 없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부동산 투기를 하는 자들로 인해서 가난한 사람의 가계부가 옥죄는 일도 없게 될 것입니다.

    이 희년법이 시행될 수만 있다면, 세계경제는 소수의 토지소유자들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희년법이 시행될 수만 있다면, 세상에는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에 대결과 투쟁이 없어지고, 역사에 유례없는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의 복음 루가복음 4장 16절 이하에 보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던 때에, 이사야서 61장 1절 이하에 예언하신 말씀, 곧,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이 희년의 예언을 읽으시고는 이것이 주님을 통해서 성취됨을 천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희년의 주인은 우리 주님이시고, 희년의 혜택은 죄 많은 우리 인간들이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야말로 교회는 깨어서 이 세상에 하느님의 질서 곧, 희년의 법을 실현시켜야 할 때입니다.

    6. 희년실천은 우리의 소망

    이제 교회는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하느님의 말씀의 일부를 임의로 경홀히 여기는 과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근간으로 세계경제에 새로운 질서를 주어야 합니다.

    성경적 토지법은 세상에 새 빛, 새 소망을 줄 것입니다. 이미 믿음의 선각자들, 특별히 100여 년 전에 ‘진보와 빈곤’이라는 저서를 펴냄으로써 성서적 토지제도의 현대적 실현을 부르짖다가 죽은 ‘헨리 조지(Henry George)’ 같은 분들은 바로 이 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헨리 조지의 뜻을 좇아서 레오 톨스토이는 그의 만년에 자신의 땅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그의 작품들을 통하여 토지공개념을 계몽하고자 애썼습니다.

    또한 헨리 조지가 주창한 성경적 토지법을 통해서 세계 속에 새 시대를 맞아들이고자, 같은 비전을 꿈꾸며 강원도 태백에서 예수원을 설립한 고 대천덕 신부는 희년운동을 일으키고, 2002년에 작고하고 말았습니다.

    이미 성경적 토지제도는 많은 나라에서 성공리에 실험되어 왔고 또한 부분적으로나마 사회제도에 적용되고 있는 나라들이 타이완, 홍콩, 싱가폴 같은 나라들입니다. 이를 통해서 그들 나라들은 빈부 격차를 좁혀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앞선 나라들입니까?

    성경적 토지제도의 관점에 입각해서, 우리는 시장 친화적 토지공개념을 도입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정책으로 불로소득에 과세하고 노력소득에 면세하는 패키지형 세제개혁과 토지공공임대제를 시행함으로써 하느님의 토지법으로 정의를 이룩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더 나아가서 노동의 산물은 보장해 주며, 토지에서 나는 이익은 모두가 함께 나누는 방식을 취하여 토지에 대한 모두의 권리를 보장하는 가장 유효적절한 수단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조국의 통일을 간절히 바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두 가지 경제체제로 나뉘어 있는 남북한은 이제 통일된 국가로의 체제전환을 준비해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이 시대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희년토지법을 제정해 두셨습니다.

    한국교회는 한반도에서 이 희년토지법을 성공적으로 실험-실천할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 가운데 영국에서 노예제도를 폐지시켰던 위대한 신앙인 윌리암 윌버포스 같은 통일 조국에 성경적 토제제도를 입법화하는 지도자가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여러분 모두 온전한 복음 - 성경 진리로 무장하여 우리나라에 하느님의 정의와 공의,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고 희년을 선포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지금도 비진리 위에 서 있는 나라들과, 그 나라들 속에서 도탄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는 구원의 복음과 함께 복된 희년의 법을 우리는 들고 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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