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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헌금의 회복 - '회복의 목회' 중에서

  • 헌금의 회복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는 두 종류였다는 사실을 신학교에 가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는 <톰슨Ⅱ 주석성경>(기독지혜사간)이 아주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십일조는 레위인들을 봉양하거나 혹은 사회적인 구제사업을 목적으로 매년 토지소산이나 가축의 십분의 일(1/10)을 바쳐야 하는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의무다(레27:30).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에 나타난 여러 십일조 규례(신 12:5-19; 레27:30-33; 민18:21-24)를 근거로 십일조 헌납을 세 단계로 구분했다.

    첫째 십일조 - 한해의 추수가 끝나면 백성들은 먼저 모든 소출의 1/10을 구별하여 자기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들에게 주어야 했다.(민:18:21-24). 그러면 레위인들은 백성들로부터 받은 십일조에서 다시 10/1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거제로 바쳐야 했는데 이것은 곧 제사장들의 몫이 되었다(민18:26-29)이처럼 분배받은 기업 없이 성막에서 종교적 직무에만 전념하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보장해 주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쳐야 하는 십일조의 첫 단계를 '첫째 십일조'라 부른다.

    둘째 십일조/축제 십일조 - 이것은 첫째 십일조를 바친 백성들이 그 나머지 소출(10/9) 가운데서 다시 1/10을 구별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자신들이 직접 중앙 성소로 가지고 올라가는데, 한 해 동안 풍성한 축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감사 축제를 드리는 비용으로 사용되었다(신12:5-19). 이 때 중앙 성소가 너무 멀면 현물 대신 일단 현금으로 바꾸어 가지고 갔다가 성소 근처에서 다시 잔치에 필요한 예물들을 구입 할 수 있었다.(신14:24-26). 한편 이 감사잔치에는 가족과 친지는 물론 수하의 남녀종들과 성중의 레위인들까지 모두 참여하였다.

    셋째 십일조 - 안식년(제7년째인 이때에는 토지를 경작하지 않기 때문에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다)을 기준으로 제3년과 제6년째에는 위의 '둘째 십일조'로 잔치를 베푸는 대신 각 처소에서 다 모아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 나그네, 가나한 자, 고아, 과부 등을 위한 구제비로 사용하였다.(신14:28-29;신26:12).

    그리고 이 때 백성들은 자신들이 마련한 이 '둘째 십일조'를 율법대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거짓 없이 사용했노라고 하나님 앞에 맹세해야 했다 (신 26:13-15). 따라서 이 '셋째 십일조'는 따로 구별된 십일조가 아니라 '둘째 십일조'와 동일 한 것인데, 다만 용도에 있어서 다를 뿐이다. 즉 '둘째 십일조'는 안식년을 기준으로 매 1년과 2년, 그리고 4년과 5년째에 쓰는 '감사 축제용'이었고, '셋째 십일조'는 안식년을 기준으로 매 3년과 6년째에 쓰는 '이웃 구제용' 이었다.

    〈톰슨Ⅱ 주석성경>의 신명기 14장 22-29절에 대한 주석 전재.

    이것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런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를 두 번 바쳐야 했다. 의무적으로 드려지는 첫 번째 십일조는 성전의 직무를 전담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위한 경비, 요즈음의 용어를 빌린다면 교회 유지 경비로 쓰여졌다. 그 다음 감사의 의미로 드려지는 두 번째(혹은 세 번째) 십일조(요즈음 용어로 감사헌금)는 성전 유지 목적이 아닌, 이웃과의 나눔이나 구제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을 간추려 말하면, 성전에 바쳐지는 헌금 중 50%는 반드시 이웃을 위하여 사용되어야만 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바쳐지는 헌금 가운데 50%는 성전 자체를 위하여, 나머지 50% 성전 밖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명령하셨던 것이다.

    우리교회가 처음부터 헌금의 50%로 선교와 구제를 행하기로 한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으로 인간이 허세를 부리거나 인심을 쓰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저 좋아 보여서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헌금을 자기 교회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그릇된 풍토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헌금을 바르게 사용하는 헌금의 회복을 위함이었다.

    헌금의 반을 이웃에게 주고도 나머지만으로 과연 교회가 유지될 수 있느냐고 회의를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인 이상, 우리가 그 법칙을 따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결과를 책임져 주실 것을 우리는 굳게 믿었고, 지난 1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 믿음을 한 번도 저버리지 않으심으로써 당신의 말씀에 대하여 당신 자신이 신실하심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셨다.

    헌금의 50%를 이웃과 나눔에 있어서 누구와 나누어야 할 것이지, 다시 말해 선교와 구제의 대상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만약 그 대상을 일일이 우리가 찾아다녀야 했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헌금의 50%는 적은 금액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비스럽게도 처음부터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다. 우리교회는 막 생긴 교회이기에 외부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에게 얼마를 나누어주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여러 과정을 거친 후에 당회에서는. 요청해 오는 순서대로 요청한 만큼 나누어주기로 하였다.

    오직 당회원들의 인간적인 판단만으로 구제의 대상을 선정하고 금액을 결정하는 것은, 그 헌금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헌금의 50%를 순서대로 나누어주다 보면, 자칫 거짓된 자들이 우리를 속일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전혀 대두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헌금의 주인이신 주님께 맡기기로 하였다. 우리 역시 주님 앞에서 늘 거짓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 보기에 비록 문제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통하여 그 사람을 책임져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가로막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오히려 순서대로 나눔을 행하면서 당회원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매달 확보된 금액만큼만 요청이 온다는 것이었다. 그서 또한 헌금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교인 수와 헌금 액수가 계속 증가되면서 더 이상 당회가 이웃과의 나눔을 직접 주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제직회의 각 부서에 그 일을 일임하였다. 그러나 헌금의 주인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망각치 않도록 서로 노력하였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교회는 연말연시에, 교회의 이름으로 예산을 공식적으로 편성해 본적이 없다. 있다면 지난달 혹은 지난해에 대한 결산서만 있을 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교회는 기업이 아니요, 헌금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의 헌금을 허락하실지 아무도 모르는 판에 어떻게 예산을 짤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순전히 인간의 추정에 의해 예산을 편성하고 그 예산에 따라 헌금을 독려하고 집행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헌금의 주인 되었음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를 주시든,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려고 애썼을 뿐이었다. 따라서 공식적인 예산서는 없었지만, 결산만은 기업수준으로 철저하게 하였다.


    그리고 투명성을 위하여 매년 세 달마다 분기별로 전 교인들에게 결산보고서를 공개하였다. 그것이 헌금의 주인 되신 하나님과, 하나님께 헌금을 바친 교인들에 대한 의무라 생각했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하나님께 바친 헌금을 내가 직접 관리하거나, 전표에 사인을 하거나, 혹은 재정관련 서류에 결재를 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헌금을 단돈 1원이라도 만져 본 적도 없다. 재정 관리에 문외한이어서가 아니다. 작지 않은 사업을 해 보았기에 회계에 관하여는 내게도 일가견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금에 관한 한 철저하게 거리를 두었던 것은 성경말씀 때문이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 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 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6:1∼6).

    성경은 목회자의 역할을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기를 전적으로 담당하는 것' 이라 정의하고 있다. 헌금관리는 목회자의 몫이 아니다. 목회자가 헌금과 거리를 둘수록, 주님께서 주인이신 헌금의 진전한 의미는 회복된다.

    한국 교회는 헌금봉투에 헌금자의 이름을 쓰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것도 모자라 주보에 이름을 게재하기까지 한다. 어떤 교회는 예배시간에 헌금자의 이름을 호명하기도 한다. 우리도 처음에는 헌금봉투에 이름을 썼고 주보에도 올렸다. 그러나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을 밝힌다는 것은 사람에게 확인받기 위한 의미 이상일 수는 없어 보였다.

    단지 헌금봉투에 이름을 기록치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헌금이 누구의 헌금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런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일 수도 없고, 귀한 물질과 시간을 쏟아 가며 그런 무능한 하나님을 믿을 이유도 없다. 하지만 그저 내게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 이름 쓰기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성경 속에서 헌금의 참된 의미를 밝혀 주는 말씀을 만나게 되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이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2∼14).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면서 드린 기도이다. 다윗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것임을 믿는 신앙고백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제서야 우리가 봉헌 때마다 부르는 찬송가 70장의 가사가, 다윗의 이 신앙고백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니 이 예물을 주께 바치나이다. 아멘."

    모를 때는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일단 헌금의 의미를 바르게 안 다음에야 더 이상 헌금봉투에 이름을 쓸 수는 없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면서 인간의 이름을 쓴다면, 그것이야말로 헌금의 의미를 왜곡하는 짓이었다. 그래서 당회의 결의를 거쳐 199?년 1월1일부터 헌금봉투에 헌금자의 이름 쓰는 란을 아예 없애 버렸다. 전교인이 무명으로 헌금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울러 그 때부터 예배당 입구에 헌금함을 비치하고 들어가면서 봉헌토록 하였다. 그 이후로 교회 모든 헌금과 헌물 그리고 헌납은 완전 익명으로만 행해지고 있다. 누가 얼마를 하나님께 바치는지는, 그야말로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소수의 우려와는 달리 헌금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단 한 해의 예외도 없이 매년 증가하였다. 헌금의 주인은 역시 하나님이신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헌금을 강요하거나 독려하는 설교를 해 본 적이 없다. 자발성과 순수성을 결여한 헌금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봉헌일 수가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거의 모든 교회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장로나 안수 집사 혹은 권사로 임직자들에게 의무적으로 특별 헌금을 하게 한 적도 없었다. 그것은 헌금의 왜곡일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의미의 성직 매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교회의 헌금으로 성가대 지휘자나 반주자에게 사례비를 지급한 적도 없었다. 구약에서 레위인들이 생계를 보장받았던 것은, 그들은 성전 임무 외에는 세속 직업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성전에 관한 한 파트타임이 아니라 풀타임 사명자들이었던 것이다. 만약 성전이 그들의 생계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그들에게는 달리 살아갈 방도가 있을 수 없는, 전업 사명자들이었다.

    이와 같은 전업 사명자들 이외의 사람들에게 헌금으로, 봉사와 관련하여 사례비를 지급한 경우를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대가를 요구하는 봉사는 봉사일 수가 없고, 봉사를 사기 위해 지급되는 것이라면 헌금일 수가 없기에, 그것은 헌금과 봉사의 참된 의미를 동시에 지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우리교회 모든 성가대 지휘자와 반주자들이 자원 봉사자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봉사는 참된 봉사일 수가 있고, 교인들이 바치는 헌금은 진정한 봉헌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주님이셨다


댓글 1

  • 김장환 엘리야

    2008.05.21 14:53

    우리 교회에 그냥 다 적용하지는 어려워도 도전해 보고 싶은 내용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자기 건물이 없어 건물 관리 유지비가 얼마나 지출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교회는 건물 두 동 관리에 들어가는 비용이 엄청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정작 선교 구제에 더 많은 플로윙을 하지 못하는 현재적인 모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도 교구선교비(재정의 10%) 장학기금(재정의 10%) 와 그 밖의 선교구제헌금(재정의 약 10% 가까이) 등 30% 가까이 선교구제비를 책정했는데, 헌금이 예상대로 들어오지 않아 지출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어 안타깝습니다.

    이 글이 우리 교회 지제들에게 믿음의 도전이 되어 우리 교회가 건강한 주님의 교회로 회복하기를 원하는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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