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이웃사랑 - 김규항 블로그에서 퍼옴
  • 패트릭
    조회 수: 1145, 2008-12-22 12:40:55(2008-12-22)
  • 28 그런데 율사 하나가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께서 그들에게 훌륭히 대답하시는 것을 보고는 다가와서 그분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은 어떤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렇습니다. '들어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인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네 온 마음으로, 네 온 영혼으로, 네 온 정신으로, 네 온 힘으로 너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31 둘째는 이렇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 계명들보다 더 큰 계명은 달리 없습니다." 32 그러자 율사는 예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훌륭하십니다, 선생님! 옳게 말씀하셨으니, 과연 주님은 한 분이시고 그 밖에 다른 주님은 없습니다. 33 그리고 온 마음으로, 온 슬기로, 온 힘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나 친교제사보다 더 낫습니다." 34 예수께서는 그가 현명하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당신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더 이상 질문하지 못했다. (마가 12:28~34)

    예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지만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라 해도 마음의 귀가 열린 사람은 아무 편견 없이 대했다. 예수는 이 율법학자와 이례적으로 보일 만큼 정중하고 진지한 태도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다. '계명'이란 하느님이 인간에게 명령한 혹은 당부한 삶의 방식이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실존적 질문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이 계명이다. 예수는 그 계명의 첫째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 말한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건 무엇인가? 종교적 제의나 예배 따위를 통해 하느님을 받들어 모시는 것? 다른 종교나 신을 무시하고 오로지 내 하느님을 주장하는 것?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게 뭔가를 말하기 전에 하느님이 누군가, 하느님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말해야 한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기 전까지 사람들에게 하늘은 땅과 분리된 범접할 수 없는 초월의 세계였고 하느님은 그곳을 상징했다. 하느님은 하늘에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늘이란 일정한 방향을 가지거나 어떤 분할된 공간이 아닌 단지 지구의 대기권이거나 외기일 뿐이라는 걸 안다. 하느님은 하늘에 있다고도 땅에 있다고도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모든 물리적 제한을 초월해 모든 곳에 동시에 있다고 말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예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을 비롯 기독교를 중심으로 역사를 이어 온 서양세계에서 하느님은 우리 삶과 우리가 사는 세계의 외곽에서 절대적 힘으로 우리의 삶과 우리가 사는 세계를 마음대로 관장하는 존재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런 존재라면, 우리 눈앞에 일어나는 수많은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은 그가 자행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의 묵인 아래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양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하느님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세속적인 탐욕에 초탈하여 진지하고 근원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누구보다 종교적일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 무신론을 선택한다. 오히려 현실적인 욕망과 이기심에 가득한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강퍅하게 주장하며 '주님, 주님' 부르짖곤 한다. 과연 하느님은 이런 정신적 참극을 벌이게 하는 그런 존재일까? 하느님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성서는 첫머리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창세기 1:27) 물론 여기에서 '모습'은 눈, 코, 입 같은 외적인 생김새를 말하는 게 아니라 본성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사람은 하느님의 본성을 담아 지어졌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선 우리에게 지나치게 익숙해진 서양식 신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동양 정신에서 특히 한국의 민간 사상과 종교에서 나타나는 신관은 우리에게 하느님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소중한 실마리를 준다. 하느님은 우리 삶과 세계의 외곽에서 우리를 절대적 힘으로 관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 '본디의 나'로 살아 있는 하느님인 것이다. 우리 눈앞에 일어나는 수많은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을 자행하거나 외면하는 분이 아니라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 속에서 함께 고통 받는 분인 것이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이런저런 종교적 형식에 기대어 나를 초월적인 상태로 끌어올리는 행위가 아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지금 내 삶을 지배하는 온갖 부질없는 집착과 욕망들을 씻어내고 내 본디 모습으로, 하느님의 모습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돈이나 권력 명예나 세속적인 성공 따위에 대한 사랑을 나에 대한 사랑으로 착각하는 삶을 끝내고 나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이다. 하느님은 내 안에 존재하며 또한 모든 내 안에 존재한다. 내 아내에게도 내 자식에게도 내 부하나 노예에게도, '내'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 모든 낯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은 존재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건 나를 사랑하는 일이자 동시에 모든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자선이나 적선은 실은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과는 다르다. 나와 내 식구가 충분히 먹고살면서 여력이 되는 대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은 끝없이 더 가지려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에 비추어 선량한 행동임에 틀림없지만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아니다. 돈을 많이 벌어 그 돈으로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생각 역시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아니다.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예수의 말 그대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을 경계 지어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의 경계를 없애는 것이다. 내 것의 일부를 이웃에게 주는 게 아니라 '내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내 것과 남의 것의 철저한 분리, 즉 엄격한 사유재산 제도를 기본 정신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예수의 이웃사랑과 적대적인 사회체제가 틀림없다. 자본주의를 지지하며 예수의 이웃사랑을 실천한다는 건 모순된 일이다. 예수의 이웃사랑은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태도와 함께 할 수밖에 없다. 대개의 사람들은 여전히 사회주의가 반 예수적인 경향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맑스 이래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건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독교라는 종교 체제가 현실에서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지배체제의 앞잡이였거나 지배체제 자체였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기독교와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는데 그들이 굳이 예수를 기독교에서 분리시켜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어쨌거나 자본주의가 예수의 이웃사랑과 적대적인 사회체제이며, 그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사회주의의 기본 정신이 예수의 이웃사랑에 닿아 있다는 건 분명하다. 예수의 이웃사랑은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댓글 2

  • Profile

    강인구 ^o^

    2008.12.23 10:04

    나에게도 나름대로 신론이나 신학, 또는 객관적인 관점에서 기독교가... 혹은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이래야 하는 것 아냐? 혹은 살아가면서 그렇게 이중적인 모습으로 그 분 앞에 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이런 비판을 쏟아 내고 스스로 그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있었읍니다.
    그러나 30 중반에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이란 것이 누구나 인정하는 객관적 정의 아래 허용되거나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 분과 나의 친밀하고도 주관적인 교제와 교통 가운데 생겨나는 고백이며... 그 고백이 모두 다 다를 수 있지만 또한 하나도 그 분 앞에서 틀린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예를 들면 포도원의 비유처럼 먼저 와서 일한 사람이나 문 닫기 얼마 전에 들어와서 일이라고는 하는둥 마는둥 한 사람이나 같은 삯을 받는다는 불합리함... 거기에다가 그렇게 삯을 주는 것은 내 맘이지 너희들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믿지않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런 말들을 타산지석으로 하여 삶의 경계로 삼을 수는 있지만... 최소한 믿는 사람들끼리는 지금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믿음의 분량과 방향에 대해 인정해 주고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서로 북돋아 주는 그런 관계 안에 있기를 우리 주님께서 원하지 않으실까 생각합니다.
    말이 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은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신앙은 우리와 그 분의 관계에서 출발한다는 것이고... 그 출발점의 모습이 모두 다 다를 뿐만 아니라... 그 분께 돌아가는 여정도 똑같은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 과정가운데 어쩌면 조금 편협하거나 배타적인 모습이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전적으로 ‘틀렸다’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어쩌면 옳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틀렸다’라고 말하기 전에 ‘여기까지 왔네? 참 잘했고 수고했어~ 이제 이 방향에 대해서도 우리 함께 생각해 보자구... 자~ 힘내고~’ 라고 말해줄 수 있다면...

    자타가 공인하는 B급 좌파 김규항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합니다....
  • 패트릭

    2008.12.24 09:19

    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인가?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할 때도 성경적 지식을 가지고 써 내려가는 그의 글을 읽을 때면 그 속에서 다시 한 번 주님의 뜻을 묻게되곤 합니다. 지금의 저로서는 '타산지석'이 맞겠지요. 나하고 주님과의 관계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받아들이면 그게 제일이겠지요. 한 번 만났봤는데 그리 친절한 사람은 아니더라고요^^.(사족) 아! 저희 셀에서는 오늘 밴드 공연을 준비했습니다. 그리 거창하진 않지만 예쁘게 봐주셔요.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3107 김장환 엘리야 1145 2008-04-04
3106 이주현 1145 2008-06-28
3105 김장환 엘리야 1145 2008-07-10
3104 김장환 엘리야 1145 2008-07-15
3103 전미카엘 1145 2008-09-06
3102 리도스 1145 2008-10-06
3101 김장환 엘리야 1145 2008-10-07
3100 김진현애다 1145 2008-10-15
3099 강인구 ^o^ 1145 2008-11-17
3098 니니안 1145 2008-12-21
패트릭 1145 2008-12-22
3096 니니안 1145 2009-01-07
3095 이필근 1145 2009-02-03
3094 강인구 ^o^ 1145 2009-03-09
3093 강인구 ^o^ 1145 2009-03-30
3092 손진욱 1145 2009-11-18
3091 전미카엘 1145 2009-12-29
3090 명 마리 1145 2010-01-14
3089 김동화(훌) 1145 2010-03-16
3088 ♬♪강인구 1145 2010-04-07
태그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