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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천덕신부님 1주기를 맞이하며!
  • 조회 수: 1857, 2003-07-31 18:58:11(2003-07-31)
  • 십자가지는 삶(고 대천덕 신부님 1주기를 추모하면서-하루일과)

    * 이 글은 안동교회의 유데레사 부제님이 부산교구 홈페이지에 쓰신 글로
    교우님들과 함께 읽고자 우리 홈페이지에 옮겨 보았습니다.

    8월 6일은 고 대천덕 신부님 소천1주기 되는 날입니다.
    제가 예수원에 있는 동안 뵌 신부님을 기억하며 쓴 글입니다.

      오전 6시에 있는 아침 기도시간보다 한 시간여 이른 새벽 미명에 모두들 잠들었을즈음인 4시45분쯤에 대신부님께서 기상하십니다. 그리고 성경책을 봅니다. 그리고 아침 기상 종소리가 열번씩 세 번 쳐지면서 재인 사모님과 함께 나사렛 예배실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예배실 왼쪽 벽의 긴의자에 두 분이 나란히 앉아 예배를 드리시는 모습은 우리의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예수원 예배는 둥그런 원형으로 둘러앉아서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삼종이 울리고 성공회 성가를 부른 다음 공도문의 예배문을 교독한 후 시편 한 장, 구약 한 장, 신약 한 장을 읽은 후 함께 은혜를 나누기도 하고 질문과 답변을 주고 받는 이 예배를 대신부님은 가장 흥미로워 하셨지요. 가장 강조하시던 말씀 '의와 공의'에 대해서 "의(義), 그냥 의(Righteousness) 아니고 공의(Justice),입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토지법을 이땅에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지주이기 때문에 공의라는 말 안쓰고 의, 애매하게 그냥 의라고 했어요. 킹제임스 번역에 이렇게 했어요. 오늘날 교회에 그 영향 그대로 들어왔어요"  그냥 지나치실 때가 없이 언제나 말씀하시던 의와 공의, 아마 예수원이 생겨지던 때부터 외치셨고 마지막까지 말씀하셨지요.  신부님은 외국에 나가셨다가 전날 귀원하시든지, 새벽 기차로 도착 30분 전에 귀원하셔도 조도에 어김없이 나타나셨습니다. 젊은 사람들인 우리에게 늘 도전을 주시곤 하셨지요. . 식사 후 사무실에서 8시까지 잠깐 휴식시간을 갖고 나서 일상업무를 시작하십니다. 국내와 해외에서 보내오는 우편물들, 선교사님들의 기도편지, 상담편지, 강의요청, 인터뷰요청, 원고청탁을 비롯해서 평생하셔야 할 일로 여겼던 우리나라의 '보통사람들이 보는 성경' 번역작업 같은 신부님 책상 위에는 파일철과 처리해야할 서류들이 쌓여있기 일쑤입니다. 국내외에서 일 년간 약 1,500여 종류의 우편물을 종이 한 장도 거의 버리지 않고 알파벳 순서대로 파일에 분류하시는데 예수원 초기부터 보관되어 있습니다. 들어온 우편물마다 예수원 기도편지와 그에 따른 첨부를 해서 답장을 보냅니다. 헌금하신 분에 대해서는 5단계의 체크를 하게 되는데 헌금자 명단에 올리고 편지인지 카드인지 책인지 체크하고 헌금액, 답장을 보냈는지까지 좀 까다로운 작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일이었지요. 신부님께 상담해 온 편지는 영어로 번역해 보시거나 읽어드리고 메모하시기도 하면서 그 유명한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상담편지 가운데 고민이 있거나 복잡한 문제를 질문한 이들에게 두 가지 성경구절을 들어, 어떤 때는 하나씩 들어서 답변해 주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요한 복음 7장 17절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야고보서 1장 5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지혜를 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늘 말씀하셨습니다.
      가끔씩 식사시간에 신부님께 직접 강의 요청을 하는 분들이 있었는데 알아보니 제가 알기에 신부님이 안가시면 좋을 것 같다고 여겨져서 신부님을 위해서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신부님께 상대방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말씀 드린 적이 두 번 있었습니다. 열심히 말씀드리는 저에게 신부님은 "테레사 자매님, 제가 가기로 했습니다.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만약 강의를 취소했더라면 얼마나 복잡해졌을까 생각하며 설령 당신이 손해를 본다손 치더라도 약속을 지키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그 후 생각 되었구요. 또 그런 비슷한 경우에 저는 정보를 드리며 이런데도 가시겠느냐는 뉘앙스를 전달할 때 신부님께서는 듣고 난 후, 저를 바라보시며 빙그레 웃으시고 아무런 말씀도 없이 들어가셔서 저는 참 무안해지면서 '어 뭔가 다르네' 생각했었지요.

      2000년 안식년을 앞두고 왼쪽 고관절 통증이 너무나 심하셔서 뼈를 교정하신다는 어떤 형제님이 살펴보고 엑스레이는 찍어보셨냐고 여쭤보니까 십여 년 전에 다치셨는데 아직까지 한번도 찍어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다음날 신부님을 모시고 태백의 한 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 촬영을 하셨습니다. 고관절 뼈에 금이 갔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염증이 생겨서 윗 부분과 엉겨붙어있다는 것이었죠. 왜 이런 일이 있을까 의아할 정도로 심한 상태셨습니다. 십여 년 전에 예수원 뒷산에 올라가셨다가 바위에서인지 구르셨는데 아마 그때 다치셨던 거 같다고... 통증이 얼마나 심하셨는지 타이레놀 하루 6알 기준치 이외에도 다른 진통제를 더 드셔야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신부님의 얼굴에 그 미소는 변함없으셨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심한 통증을 겪고 있다고는 전혀 눈치채지도 못하고 알지 못했었습니다. 30여년간 사용하신 딱딱한 나무침대, 신부님 키와 똑같은 길이로 보였던 그 침대에서 다리 밑에 쿠션을 받치신 채 잠을 잘 못 주무셨다고 하시는, 미안함이 역력한 모습의 신부님을 뵈었죠. 의사선생님의 인공관절 교체수술을 들으시고 미국에 들어가셔서 수술하시고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비스듬했던 어깨가 바로 되셨다고 자랑이 대단하셨습니다.  
      99년 심장병으로 세브란스병원에 두 달간 입원하셨다가 오셨을 때 주치의이셨던 닥터 린튼 박사님의 고단백음식 섭취에 대해 단단히 주의를 받으셨습니다. 저도 린튼 선생님으로부터 전화상으로 직접 주의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던 바, 양질의 영양섭취를 위해 의회와 주방장 등 관련있는 형제, 자매들은 머리를 짜내며 고심했었습니다. 일단 1호실에서 식사하시도록 하고 식사는 몇 자매들이 순번제로 돌아가며 섬겨드렸습니다. 의회의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갖다드리면 신부님의 표정이 그다지 밝은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조심조심 그러다가 얼마쯤 그러다가 신부님이 이제 그만 가져오라고 공동식사 하시겠다고 선언을 하셨습니다. 운신을 하실만 하니까 불편한 심기를 토로하시는 것이었지요. 이때부터는 말려도 소용없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공동식사에 신부님께서 나오셔서 그 자리에 앉으셔서 밝아지는 표정을 또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부님 밥공기에 고기를 깔고 그 위에 밥을 얹어드렸는데 그 고기는 옆 자리 형제 자매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시며 몇 점만 드실 뿐이었습니다. 정말 자신에 대해 엄격하고 타협하지 않으시는 분이셨습니다. 처음의 마음가짐을 흩뜨리시지 않기로 하나님과 약속을 하셨다면 끝까지 그 약속을 지켜나가시는 것이었겠고, 예수원 공동체의 설립자로서 십자가지기를 각오하신 자신과의 다짐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모습이었다고 기억합니다. .
      오전 10시가 되면 신부님께서는 정오12시 10분전까지 쉬는 시간으로 1호실 침실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는 12시 대도 시간에 늦지않고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원 주일 점심은 라면정식입니다. 주일에 라면드시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쓰러지시던 주일 2002년 5월19일에도 피곤이 역력한 모습으로 대도를 마치고 점심이 라면이 아니라니까 라면을 하나 달라고 하시더니 들어가셔서 드시겠다고 갖고 들어가셨지요.
      점심 드신 후 오후 1시부터 2시나 2시 30분까지는 사무실에 다리를 받쳐주는 의자에 몸을 누이시고 개인대도를 드리시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과이지요.  보여달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보여주시며 설명을 하셨습니다. 개인 면담을 요청하면 주로 오후 2시30분부터 30분간 면담을 하시는 편이셨지요.
    오후 4시30분까지 사무실에서 일하시다가 1호실로 올라가십니다. 사무업무는 이것으로 마치시는 셈이죠. 4시30분부터 저녁식사 시간 전까지는 1호실 티타임 시간입니다. 티타임은 원래 재인 사모님과 신부님, 부부의 대화시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루 중의 대화, 공동체 가족들, 손님 가운데 누구, 예수원 비젼, 사역, 대화의 주제는 다양합니다. 이 시간에 손님들이나 가족들도 참석해서 두 분만 티타임을 갖는 경우가 흔하지 않았다고 기억합니다. 재인 사모님은 티타임에 차와 쿠키, 과일 등을 보기좋게 그릇에 담아서 손수 접대하시죠. 부담스러워 일어나서 도와드리려고 하면 이건 나의 일이라고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손사래를 치십니다. 티타임은 신부님 집안의 풍습이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신부님 어머니께서 오후 4시에 자녀들과 함께 대화하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 재인 사모님에게 한국어 통역하시는 모습은 50년이상 동역자로서 동지로서 신뢰와 진실로 하나된 부부의 모습을 보게 되지요. 어떤 날 티타임 시간에 지원자들이 초대되어서 저도 들어갔던 적이 있는데 재인 사모님의 제안으로 게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옆에 앉은 사람과 둘씩 짝이 되어 상대방에 관한 정보를 세 가지씩 돌아가며 말하는 것이었는데 저는 신부님과 짝이 되어 제가 질문하기를 "성경에 바울, 베드로, 바나바, 모세라는 인물이 있는데 신부님은 누구를 닮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신부님은 주저없이"모세"라고 하셨습니다. 돌아가며 발표를 할 때 제가 그 얘기를 했더니 사모님께서 "모세가 80세에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셔서 다함께 한바탕 웃었습니다.
      6시 식사시간에는 사모님도 함께 공동식사를 하십니다. 식사 후에는 저녁예배 전까지 그날 도착한 우편물과 신문을 보시죠. 저녁예배 후에는 내일 부칠 편지를 정리하시고 10시 취침에 들어가시는 것이 대신부님의 하루 일과입니다.  
      예수원에 들어와서 2년 정도 지난 후 어떤 예배시간에 "난 아직 대 신부님의 사상을 잘 모른다.."하며 일반적인 관행대로 말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몇일 후 신부님께서 제게 "나의 사상은 없습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이것이 저의 사상입니다."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신학은 배우는 것이다" 이 말씀은 많은 생각을 하게합니다. 성경을 배우고, 하느님을 배우고, 사람을 알아야한다는 것이죠.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은 신학자들의 사상을 가르친다. 교회 목회는 사람을 섬기는 것인데 신학자의 이론으로 어떻게 사람들을 알 수 있겠느냐, 참 안타까워하시며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1998년 겨울, 사제서품 50주년 되던 날에 작은 축하행사를 가졌습니다. 이제까지 50년 동안 주의 종으로서 성직자로서 자신에게 지침이 되신 것을 여쭤보았을 때 "인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일 미사 중, 죄의 고백 시간(예수원에서는 공중고백을 함)에 신부님은 거의 매주 죄를 고백하셨습니다. 한번은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고 하시는 신부님의 고백을 들으면서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나올 뻔 했었습니다. 지금 제가 성직자로서 신부님의 자신을 열어놓으셨던 모습은 큰 도전이 됩니다.  사역자로서, 목회자로서, 교사로서 제게는 신부님의 삶이 귀한 모델이 되고 있어 참 감사합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미소로 반겨주시던 신부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또알게 되었습니다.
      1호실에서 사무실로 통하는 계단은 반나선형의 여섯 개의 아주 좁은 돌계단입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이 계단을 오르내리시기를 30년이상 하셨을 두 분, 제가 이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급한 일이 있어도 천천히 올라가거나, 내려가야 하고, 화나는 일이 있어도 마음을 차분하게 가다듬어야 다닐 수 있는 계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슬퍼도, 기뻐도, 몸이 아파도, 기운이 없어도 이 계단은 온 정신을 집중해서 마음을 가다듬어야 다닐 수 있는 계단입니다. 저는 영성훈련을 시키는 계단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두 분이 계단을 밟으실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분의 마음과 정신을 느끼게 하는 계단입니다.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에는 마지막 계단에서 물이 솟아나와 졸졸졸 흐르기도 하지요.
      1호실 작은 침실의 딱딱하고 작은 나무침대는 한 겨울에도 온기가 너무 없어 춥습니다. 30여년 동안 예수원에는 몇번의 건축으로 새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95년 나사렛, 99년 쥬빌리 등 그러나 두 분의 방은 언제나 1호실이었습니다. 작년 겨울  연로하신 신부님께서 다리에 힘이 없으시어 사무실로 내려가시다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첫째 계단으로 떨어지시며 그 공간에 쳐박히듯이 구부러진 적이 있었는데 겨우 겨우 일어나실 수 있었다고 사모님께 전해들으며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신부님께 미안한 듯 말씀 드리면서 보았던 다리는 보라와 짙푸른 빛으로 칠해놓은 듯했었지요.
      
      편리함을 쫒아가지 않고 불편이나 고통에 처할지라도 처음의 마음을 끝까지 지키신 대 신부님의 삶을 보며 우리에게 자신을 주신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쓰러지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 지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예수원이 십자가 지기를 배우는 장소로서 예수원을 세우신 설립자로서 말입니다. 지금 제게 천국이 멀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신부님께서 거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댓글 1

  • 김장환

    2003.07.31 19:04

    대천덕신부님, 대신부님, 큰신부님, 그리운 신부님, 천국에서 만날 그 날을 기다리며 대신부님이 꿈꾸던 교회, 예수님의 꿈 속에 있던 교회, 그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기도하며 노동하며, 노동하며 기도하며 오직 성령의 은혜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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