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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6월 미국에 가서 신세지고 온 김동진 요한 신부님... 신문 기사
  • http://m.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4149  뉴스 M이 만난 사람 ■ LA 한인타운 인종 차별(?)의 현장    라티노 일용직 노동자와 한인 홈리스 돕는    김요한 신부 ■  2014.08.15 양재영 jyyang@newsm.com  세계 3위 대도시인 LA. 그 안에 자리 잡은 한인타운은 1972년 즈음에 올림픽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1980년 LA 시의회로부터 코리아타운(Korea Town)이라는 공식적 이름을 얻었다.  이곳엔 의사, 변호사 등의 고수입을 뽐내는 전문직으로부터 식당, 식료품점, 술집 등의 다양한 영업점에서 일하는 비정규직까지, 윌셔 블러버드를 따라 늘어선 고층 사무용 건물부터, 6,70년대 이미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허름한 건물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과 건물들로 채워진 공간이다. 그 곳에 30만 가까운 한인들이 거주하고, 일하고 있고, 만여명의 라티노(Latino)들이 일자리를 잡기 위해 삼삼오오 흩어져 일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곳에 50여명의 한인 노숙자가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을 위해 ‘셀터’(Shelter)를 운영하고 있는 성 요한 성공회 교회(St. John Episcopal Church) 김요한 신부를 만나 반 나절정도 그의 일상을 들여다보았다.  “라티노들의 대부(?)”  오전 11시. 노르만디(Normandie Ave.)와 9가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성 마리아 교회(St. Mary's Episcopal Church)에 약속한 김요한 신부는 나타나지 않았다. 30분 쯤 지났을까, 백 여년 된 교회 건물에서 배어나오는 쾌쾌한 냄새가 무뎌질 즈음, 검은 옷에, 홀쭉한 키의 김 신부가 두 개의 주전자를 들고 나타난다. 투박한 전라도 사투리에 툴툴거리는 듯한 말투가 듣는 이로 하여금 기분 상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친숙한 느낌을 준다.  “2000년부터 했으니까, 한 15년 정도 됐지. 예전엔 주전자 들고, 라면 들고 이 주변을 돌아다니면 됐는데, 법이 바뀌어서 이 교회로 모아서 라면을 줘야 돼.”  김 신부는 15년 이상 한인타운 주변에 모여 일자리를 기다리는 라티노들을 위해 점심으로 라면을 대접하고, 양말과 셔츠를 나누어 주고 있다. 차를 타고 준비한 유인물을 삼삼오오 흩어져 있는 라티노들에게 나눠주며 ‘교회에 와서 라면 먹고 가라’하니, 다 알고 있다는 듯 한국말로 ‘감사합니다’를 말하고 떠난다. 돈도 없는 성공회 신부가 어디에서 돈이 생겨 이런 일을 해왔을까?  “그 때 그 때 도와주는 분이 계셨어. 지금은 어느 분이 매달 750 달러를 기부해줘서 하고 있고. 예전에 한 백 명 정도 됐는데, 요즘은 경기가 어려워선지 30명 정도 와서 라면 먹고, 양말, 티셔츠를 받아가지. 한 15년 하니까, 다들 알아. 내가 저들의 ‘대부’ 격이지. 한인들이 저들을 너무 무시하고, 기피하는데, 조심해야 돼. 흑인 폭동처럼 라티노 폭동이 일어난다면 한인들 많이 힘들거야."  “한인 타운 최후의 보루, 김 신부 쉘터(Shelter)"  성 마리아 교회로부터 5분 정도 떨어진 곳, 깨끗한 외형의 아파트 건물 일층에 한인 노숙자들을 위한 쉘터가 있다. 정문 옆 쪽문이 있어, 10여명의 노년 남성들이 오고가는 데 유용하다. ‘신부님 사는 아파트보다 더 좋은 것 같은데요?’라는 농담에 씩 웃기만 한다.  “2009년 우리 교회(성 요한 성공회 교회)에서 노숙인들을 위해 음식을 나눠주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대열에 한국 사람이 있는 거야. 그래서 물어봤지. 왜 여기 있냐고? 사업 실패한 후 가정 잃고 길거리로 나왔는데, 자살하기 전에 밥이나 한 끼 먹으려 왔다는 거야. 좀 놀랐어. ‘당신 같은 사람이 한인 타운에 많이 있냐?’고 물었더니, 한 20명 정도 된다는 거야. 한인 타운에 한국 사람이 20명 정도 노숙자로 있다는 거지. 수치스럽더라고. 그래서 바로 집을 알아봤지. 싼 가격에 방 8개 얻어서 잠을 재웠는데, 건물이 노후하다는 이유로 퇴거 명령을 받고 나와서 헤매다 이곳을 찾았지.”  복층 구조로 된 아파트 안에 3개의 방이 있고, 그곳에 십 여명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깨끗한 부엌에 깔끔하게 칠해진 페인트와 라미네이트 바닥, 한 눈에 봐도 렌트비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렌트비 2,200에 공과금 포함, 한 3천정도 들지. 기왕 들어와 있으니 편안하게 지내라고 각 방에 컴퓨터 놓고 인터넷 깔아놓고 하니 돈이 좀 많이 들어. (‘신부님, 돈 많으세요?’라고 물으니) 매달마다 스트레스지. 그래도 그달 그달 잘 넘어가. 아는 사람들 만나면 용돈도 뜯어내고, 뭐 그렇게 가는 거지.”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히 이야기하지만, 고정적 후원도 없이 매달 3천 달러 정도를 쉘터인들을 위해 모금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그의 표정은 말하고 있었다.  [사진] 쉘터 앞 작은 마당 © 뉴스 M  작은 마당에 삼삼오오 모여 신문도 보고, 담배도 피우며 대화를 나누는 쉘터인들을 보며, 문득 그들은 김 신부가 사역하는 교회에 다니는지 궁금했다.   “우리 쉘터는 완전 자유야. 특히 종교의 자유. 불교든 천주교든 상관없어. 이곳은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모든 게 자유야.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지. 이곳에 한 50명 정도가 오고갔는데, 모두들 길에서 잘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 차나 도박장에서 잘 정도면 오지 말라고 해. 여기 오는 사람들은 늙고, 신분도 불안하고, 그래서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인데, 그래도 그 중 20명 정도가 취직을 해나갔어. 한국이나 타주로 간 사람도 있고.”  흔히 있을 법한 예배나 교육도 없는,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있는 쉘터. 하지만 그 곳의 사람 모두가 김 신부 교회에 다닌단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있는 홈리스를 위한 교회 행사에 대부분의 셀터인들이 자원봉사에 나가기도 한다. 완전한 자유가 주는 편안함이 전도의 가장 큰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최후의 보루에도 희망은 있는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 사는지 궁금했다. 김 신부가 제공하는 쌀, 김치, 계란으로만 먹고 살수는 없을 터, ‘담배 값이라도 벌려면 뭔가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 아파트 매니저가 우리들이 조용하고 깨끗하게 사는 것을 보고, 아파트 앞 청소를 맡기기도 했어. 과거엔 중고물품을 거리에서 팔기도 했고. 가장 큰 수입원은 카지노에서 주는 티켓이야. 카지노에 가면 10달러짜리 티켓을 주는 데, 게임을 해야 현금화할 수 있지. 둘이 조가 되어서 한 쪽에 몰아주는 식으로 게임을 한 후 현금을 받고, 버스비 등을 제외하면 한 4달러 정도 벌지. 그게 저들에게 가장 큰 수입이야.”  이곳으로 몰려오는 이들 중 한국 대기업 출신이나, 명문대 출신도 있었다고 한다. 큰 사업을 하던 이도 있었고, 견실한 직장 생활을 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을 몰락시킨 것은 사업실패, 마약 등도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도박이었다.  “도박으로 대기업에서 쫓겨난 후 이곳까지 오게 된 사람이 있었지. 일도 잘하고, 똑똑해서 자바시장에 취직시켜줬는데, 얼마 후 돈을 훔쳐 달아났더군. 도박 때문이었지. 그 사람 결국 이곳으로 다시 왔어.”  도박은 무섭다. 불편한 자동차 안에서 쪽잠을 잔다 해도, 숙박을 책임지는 자동차를 팔고 카지노 바닥에 쪼그리고 자는 한이 있어도, 한 게임만 할 수 있다면 다 내팽개치고 달려가도록 하는 게 도박이다. 한인 타운 최후의 보루에는 이런 이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김 신부는 그들을 위해 최후의 시설을 제공하는 것이다.  “처음엔 많이들 싸웠어. 갱단 출신도 있고 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참 착하데, 간혹 못된 인간들이 들어와 시끄럽게 만들기도 했지. 지금은 그런 사람 없어 아주 조용하고 좋지.”  김 요한 신부가 속한 성공회의 주교는 이 시설에 대해 알고 있는 지 궁금했다. 개신교 내 가장 진보적 교단이라 할 수 있는 성공회가 홈리스들을 위한 시설을 외면할 것 같진 않았다.  “아주 싫어했지. 인종차별주의라고. 왜 유독 한국인들만 보호하느냐는 불만이었지. 주교가 와서 시설을 둘러보고는 눈감아 주겠다고 하더군. 그 정도면 아주 감사하지. 그래도 후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세금(Tax) 보고서는 교회에서 발행해주고 있어.”  김 신부는 혹시 이 기사를 본 후 후원해주겠다는 단체나 개인이 있으면 후원 받겠냐는 질문에 ‘땡큐(Thank you)지’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후원해주고 이런 저런 간섭을 할 거라면 노 땡큐야.’라고 전제를 단다.  셀터에 거주하시는 분이 손님 접대용으로 빨간 비빔냉면을 손수 만들어 주셨다. 너무 맛있어 보여 사진 한 장 찍은 후 잠시 생각해 봤다. ‘최후의 보루에도 희망은 있다!’  간섭 않고 후원해줄 개인이나 단체의 후원 문의는 323) 244-8810로 하면 된다.  [사진] 쉘터에 거주하는 분이 만들어주신 비빔국수 © 뉴스 M
    뉴스 M이 만난 사람
    ■ LA 한인타운 인종 차별(?)의 현장
    라티노 일용직 노동자와 한인 홈리스 돕는...
    김요한 신부 ■

    2014.08.15


    세계 3위 대도시인 LA. 그 안에 자리 잡은 한인타운은 1972년 즈음에 올림픽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1980년 LA 시의회로부터 코리아타운(Korea Town)이라는 공식적 이름을 얻었다.

    이곳엔 의사, 변호사 등의 고수입을 뽐내는 전문직으로부터 식당, 식료품점, 술집 등의 다양한 영업점에서 일하는 비정규직까지, 윌셔 블러버드를 따라 늘어선 고층 사무용 건물부터, 6,70년대 이미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허름한 건물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과 건물들로 채워진 공간이다. 그 곳에 30만 가까운 한인들이 거주하고, 일하고 있고, 만여명의 라티노(Latino)들이 일자리를 잡기 위해 삼삼오오 흩어져 일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곳에 50여명의 한인 노숙자가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을 위해 ‘셀터’(Shelter)를 운영하고 있는 성 요한 성공회 교회(St. John Episcopal Church) 김요한 신부를 만나 반 나절정도 그의 일상을 들여다보았다.

    “라티노들의 대부(?)”

    오전 11시. 노르만디(Normandie Ave.)와 9가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성 마리아 교회(St. Mary's Episcopal Church)에 약속한 김요한 신부는 나타나지 않았다. 30분 쯤 지났을까, 백 여년 된 교회 건물에서 배어나오는 쾌쾌한 냄새가 무뎌질 즈음, 검은 옷에, 홀쭉한 키의 김 신부가 두 개의 주전자를 들고 나타난다. 투박한 전라도 사투리에 툴툴거리는 듯한 말투가 듣는 이로 하여금 기분 상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친숙한 느낌을 준다.

    “2000년부터 했으니까, 한 15년 정도 됐지. 예전엔 주전자 들고, 라면 들고 이 주변을 돌아다니면 됐는데, 법이 바뀌어서 이 교회로 모아서 라면을 줘야 돼.”

    김 신부는 15년 이상 한인타운 주변에 모여 일자리를 기다리는 라티노들을 위해 점심으로 라면을 대접하고, 양말과 셔츠를 나누어 주고 있다. 차를 타고 준비한 유인물을 삼삼오오 흩어져 있는 라티노들에게 나눠주며 ‘교회에 와서 라면 먹고 가라’하니, 다 알고 있다는 듯 한국말로 ‘감사합니다’를 말하고 떠난다. 돈도 없는 성공회 신부가 어디에서 돈이 생겨 이런 일을 해왔을까?

    “그 때 그 때 도와주는 분이 계셨어. 지금은 어느 분이 매달 750 달러를 기부해줘서 하고 있고. 예전에 한 백 명 정도 됐는데, 요즘은 경기가 어려워선지 30명 정도 와서 라면 먹고, 양말, 티셔츠를 받아가지. 한 15년 하니까, 다들 알아. 내가 저들의 ‘대부’ 격이지. 한인들이 저들을 너무 무시하고, 기피하는데, 조심해야 돼. 흑인 폭동처럼 라티노 폭동이 일어난다면 한인들 많이 힘들거야."

    “한인 타운 최후의 보루, 김 신부 쉘터(Shelter)"

    성 마리아 교회로부터 5분 정도 떨어진 곳, 깨끗한 외형의 아파트 건물 일층에 한인 노숙자들을 위한 쉘터가 있다. 정문 옆 쪽문이 있어, 10여명의 노년 남성들이 오고가는 데 유용하다. ‘신부님 사는 아파트보다 더 좋은 것 같은데요?’라는 농담에 씩 웃기만 한다.

    “2009년 우리 교회(성 요한 성공회 교회)에서 노숙인들을 위해 음식을 나눠주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대열에 한국 사람이 있는 거야. 그래서 물어봤지. 왜 여기 있냐고? 사업 실패한 후 가정 잃고 길거리로 나왔는데, 자살하기 전에 밥이나 한 끼 먹으려 왔다는 거야. 좀 놀랐어. ‘당신 같은 사람이 한인 타운에 많이 있냐?’고 물었더니, 한 20명 정도 된다는 거야. 한인 타운에 한국 사람이 20명 정도 노숙자로 있다는 거지. 수치스럽더라고. 그래서 바로 집을 알아봤지. 싼 가격에 방 8개 얻어서 잠을 재웠는데, 건물이 노후하다는 이유로 퇴거 명령을 받고 나와서 헤매다 이곳을 찾았지.”

    복층 구조로 된 아파트 안에 3개의 방이 있고, 그곳에 십 여명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깨끗한 부엌에 깔끔하게 칠해진 페인트와 라미네이트 바닥, 한 눈에 봐도 렌트비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렌트비 2,200에 공과금 포함, 한 3천정도 들지. 기왕 들어와 있으니 편안하게 지내라고 각 방에 컴퓨터 놓고 인터넷 깔아놓고 하니 돈이 좀 많이 들어. (‘신부님, 돈 많으세요?’라고 물으니) 매달마다 스트레스지. 그래도 그달 그달 잘 넘어가. 아는 사람들 만나면 용돈도 뜯어내고, 뭐 그렇게 가는 거지.”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히 이야기하지만, 고정적 후원도 없이 매달 3천 달러 정도를 쉘터인들을 위해 모금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그의 표정은 말하고 있었다.

    [사진] 쉘터 앞 작은 마당 © 뉴스 M

    작은 마당에 삼삼오오 모여 신문도 보고, 담배도 피우며 대화를 나누는 쉘터인들을 보며, 문득 그들은 김 신부가 사역하는 교회에 다니는지 궁금했다.

    “우리 쉘터는 완전 자유야. 특히 종교의 자유. 불교든 천주교든 상관없어. 이곳은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모든 게 자유야.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지. 이곳에 한 50명 정도가 오고갔는데, 모두들 길에서 잘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 차나 도박장에서 잘 정도면 오지 말라고 해. 여기 오는 사람들은 늙고, 신분도 불안하고, 그래서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인데, 그래도 그 중 20명 정도가 취직을 해나갔어. 한국이나 타주로 간 사람도 있고.”

    흔히 있을 법한 예배나 교육도 없는,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있는 쉘터. 하지만 그 곳의 사람 모두가 김 신부 교회에 다닌단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있는 홈리스를 위한 교회 행사에 대부분의 셀터인들이 자원봉사에 나가기도 한다. 완전한 자유가 주는 편안함이 전도의 가장 큰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최후의 보루에도 희망은 있는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 사는지 궁금했다. 김 신부가 제공하는 쌀, 김치, 계란으로만 먹고 살수는 없을 터, ‘담배 값이라도 벌려면 뭔가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 아파트 매니저가 우리들이 조용하고 깨끗하게 사는 것을 보고, 아파트 앞 청소를 맡기기도 했어. 과거엔 중고물품을 거리에서 팔기도 했고. 가장 큰 수입원은 카지노에서 주는 티켓이야. 카지노에 가면 10달러짜리 티켓을 주는 데, 게임을 해야 현금화할 수 있지. 둘이 조가 되어서 한 쪽에 몰아주는 식으로 게임을 한 후 현금을 받고, 버스비 등을 제외하면 한 4달러 정도 벌지. 그게 저들에게 가장 큰 수입이야.”

    이곳으로 몰려오는 이들 중 한국 대기업 출신이나, 명문대 출신도 있었다고 한다. 큰 사업을 하던 이도 있었고, 견실한 직장 생활을 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을 몰락시킨 것은 사업실패, 마약 등도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도박이었다.

    “도박으로 대기업에서 쫓겨난 후 이곳까지 오게 된 사람이 있었지. 일도 잘하고, 똑똑해서 자바시장에 취직시켜줬는데, 얼마 후 돈을 훔쳐 달아났더군. 도박 때문이었지. 그 사람 결국 이곳으로 다시 왔어.”

    도박은 무섭다. 불편한 자동차 안에서 쪽잠을 잔다 해도, 숙박을 책임지는 자동차를 팔고 카지노 바닥에 쪼그리고 자는 한이 있어도, 한 게임만 할 수 있다면 다 내팽개치고 달려가도록 하는 게 도박이다. 한인 타운 최후의 보루에는 이런 이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김 신부는 그들을 위해 최후의 시설을 제공하는 것이다.

    “처음엔 많이들 싸웠어. 갱단 출신도 있고 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참 착하데, 간혹 못된 인간들이 들어와 시끄럽게 만들기도 했지. 지금은 그런 사람 없어 아주 조용하고 좋지.”

    김 요한 신부가 속한 성공회의 주교는 이 시설에 대해 알고 있는 지 궁금했다. 개신교 내 가장 진보적 교단이라 할 수 있는 성공회가 홈리스들을 위한 시설을 외면할 것 같진 않았다.

    “아주 싫어했지. 인종차별주의라고. 왜 유독 한국인들만 보호하느냐는 불만이었지. 주교가 와서 시설을 둘러보고는 눈감아 주겠다고 하더군. 그 정도면 아주 감사하지. 그래도 후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세금(Tax) 보고서는 교회에서 발행해주고 있어.”

    김 신부는 혹시 이 기사를 본 후 후원해주겠다는 단체나 개인이 있으면 후원 받겠냐는 질문에 ‘땡큐(Thank you)지’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후원해주고 이런 저런 간섭을 할 거라면 노 땡큐야.’라고 전제를 단다.

    셀터에 거주하시는 분이 손님 접대용으로 빨간 비빔냉면을 손수 만들어 주셨다. 너무 맛있어 보여 사진 한 장 찍은 후 잠시 생각해 봤다. ‘최후의 보루에도 희망은 있다!’

    간섭 않고 후원해줄 개인이나 단체의 후원 문의는 323) 244-8810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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