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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성공회 공도문 약사
  • 청지기
    조회 수: 3511, 2003-08-11 19:02:14(2003-08-11)
  • 장창경 신부

    1. 한국성공회의 공도문의 역사를 보면 그 시작부터가 다른 성공회의 공도문과는 조금 다른 틀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성공회의 선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2. 일반적으로 성공회는 영국의 국교라는 특수한 위치 때문에 해외선교가 시작될 때 그것은 외국 거주 영국민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편의가 그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점차 해외로 영국의 관심과 영향이 증대하면서 곳곳에서 선교활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선교과정을 일반적으로 구분해 보면 영국의 정치적 영향과 함께 이와 관련된 영국인들이 가면 후에 그들과 가족들을 위해 선교사가 들어가고 또 이들의 선교적 요청에 의해서 여러 선교 단체가 들어가고 그리고 선교가 확장되므로서 후에 주교가 들어가는  그런 형태였다. 그러나 한국선교의 과정은 이런 일반적인 패턴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모델을 따른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3. 중국과 일본거주 선교사들로부터 한국선교요청을 받고 이를 결정하자 곧바로 취한 행동이 '주교가 없는 곳에는 교회를 가질 수 없다'는 초대교회의 전통을 따라 영국에서 한국 주교를 서품하는 일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일을 위해 참여한 선교단체가 앵글로 가톨릭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 SPG 뿐이었다고 하는 것은 한국성공회가 어떠한 신앙으로 시작하며 어떤 기도서를 가지게 되는가를 명확히 규정하는 사건이라 말할 수가 있다.

    4. 이것이 가능했던 주원인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한국의 개화가 늦었기 때문에 적어도 그 때까지는 한국에 선교를 시작한 선교단체나 성공회가 존재하지 않았고 기타 다른 단체들도 아직은 한국에 대한 관심이 덜했던 시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가지 이유는 옥스퍼드 운동과 웨슬레의 복음주의 운동 등의 여파로 영국성공회 내에 벌어지기 시작한 다양성의 극대화가 때로는 교회의 골칫거리이기도 했기 때문에 적어도 한국만은 단일한 신앙적 선교를 시도해보려던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5. 이러한 의도가 훗날에 한국에 들어오게 되는 영국 이외의 그리고 가톨릭주의 노선을 따르지 않는 기타 선교사들을 배척하고 금했던 주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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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략한 한국성공회 공도문의 변천사

    1) 1908년 공도문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아마도 하나의 책으로 나온 것으로 최초의 것으로 보인다. 이 공도문의 특징은 1662년 영국공도문을 번역했으나 축성경만은 1549년 것을 채택했다.
    어찌보면 1637년 스코틀랜드 기도서의 영향을 받은 1928년의 미국공도문이 예전적으로 상당한 찬사를 받으며 등장했는데 이미 한국성공회에서는 미국공도문과 같은 기도서를 이때부터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만도는 조만도 후송(지금의 특도 자리)에 여왕을 위한 기도 대신 황제와 황실을 위한 기도가 있고 미사에도 당일 본기도 전에 황제와 국민을 위한 기도가 들어있다.
    또한 성가 가사까지 포함된 아주 단순한 양식의 조만도가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성경 책이 귀하던 그 시절 독서가 없이 조만도를 드리기 위한 배려라고 보인다.
    조만도는 聖言(성경소구), 죄의 고백, 주기도로 시작하며, 성경은 2과를 보며 송가는 조도가 찬송천주송가와 사가리아송가를 사용했다.
    오주성체보혈지례(성찬례 혹은 성제례라고도 불린다고 표시되어있다)는 私誦(성호경과 준비기도 그리고 사제를 위한 기도) 후에 주의기도 정심축문, 십계명, 계명요약과 기리에3번과 계응과 축문, 황제와 백성을 위한 기도로 시작하고 나머지부분은 1662년과 같다.
    특이한 점은 현재 보관된 공도문이 훼손되어 있어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니게야 신경 대신 사도신경만이 수록되어 있는 것 같은데 이 부분을 대체해서 붙인 것을 보면 실제로 사용은 니게야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2) 1912년 공도문
    조만도 시작시 성언이나 특도등 사제가 하는 기도는 인쇄하지 않고 제목만 표기되고 있으며 공도문 표지에 임시통용이라는 문구가 들어있어서 그때의 시대적 상황에 따른 고려가 보이고 있다.
    식민지 치하라서 황제를 위한 기도가 생략되고 단지 국민을 위한 기도만 있는 것 외에는 동일한 양식이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조만도 주기도 후의 계응에는 그 때까지도 지금의 "주여, 우리나라을 구원하소서"가 "우리 황제를 구원하소서"로 되어 있는 점이다. 그 시대의 교회의 고민을 볼 수가 있는 대목이다.

    3) 1939년 공도문
    65년 기도서의 전신으로 이전 기도서와 달리 미사와 조만도 및 많은 예식이 1662년 공도문보다 더욱 가톨릭적인 구조와 형태를 띄게 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조만도에 聖言이나 죄의 고백이 생략되고 성호경, 주기도, 성모송(공도문에 공식적으로 성모송이 언급되는 것은 한국성공회의 당시 가톨릭적 경향을 알게한다)으로 시작하며 축문후 인사와 계응 다음에 별세기원송 추가되었다.
    조도에 독서가 하나로 되고 찬송천주송가가 부록으로 생략된다. 이는 영국의 많은 교회가 주일예배로 조도드리는 습관이 한국에서는 단지 주중의 성무일도로 확실히 격하시키고 있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미사는 당시 영국 고교회가 사용하던 앵글로 가톨릭 미사를 번역해 사용했다. 이 예문은 종교개혁 이전에 영국에서 쓰던 라틴미사를 1549년, 1662년 공도문과 접목한 것으로 라틴미사의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공도문의 모든 내용이 함께 들어있는 그런 예식이다. 처음부터 한국성공회는 고교회 의식을 지켰지만 이때부터 공도문 상에서도 더욱 확고한 앵글로 가톨릭 정신을 반영하게 된다. 아마도 이 시절부터 영국에서 일기 시작한 로마교회와의 일치 운동과 예전신학의 부흥이 한국성공회에 더욱 반영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루브릭 안에서지만 미사라는 용어가 보이며 공식적인 용어는 성체성사라고 되어있었다.

    4) 1965년 공도문
    조만도는 시작시 성호경, 주기도, 성모송에 대한 언급이 사라지므로 더 단순화되었으며, 미사는 39년과 동일하지만 단지 사제의 사사기도가 루브릭으로 편집되었으며 당시 수시 예식으로 편집된 기타예식과 시편등을 모두 함께 수록함으로서 최초의 완전한 공도문 형태가 된다. 이때부터 미사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기도서에서 쓰기 시작하고 있다. 20세기 들어서면서 개신교 안에서도 예전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예전복귀 운동이 일어나면서 1979년의 미국공도문이 비록 똑같지는 않더라도 65년 공도문의 유형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면 성공회 코뮤니온 안에서는 가장 빠르게 보편적 예전을 수용한 기도서라고 평가할 수가 있겠다. 적어도 한국공도문의 역사에서 본다면 최초로 완전한 공도문으로 아직도 이를 대체할 기도서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문장의 엄숙함과 작품성도 높은 한국성공회의 표준적인 예식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5) 1973년 시험미사예문
    단순화를 꾀하여 기리에로 시작하고 독서에 구약이 포함되고 신경은 니게야, 사도신경 수록되었으며, 신자들의 기도는 82년 1양식, 죄의고백은 82년 권중문과 65년 고백문으로 구성된 바티칸 이후의 로마예식과 같은 양식이다.
    성찬기도는 로마예식 축성경을 1양식으로, 1549년 축성경이 2양식으로, 아직 출처를 확인하지 못했으나 한국 정교회의 축성경이 3양식으로 편집되고 끝영광송 전 전구 부분에 세례견진자나 혼인 또는 별세미사를 위한 기도를 선택적으로 추가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때부터 예식문을 너무 쉽게, 나름대로 우리 상황에 맞게 구조를 편집하려는 시도가 보이기 시작하며 이때의 작업에 대한 기록들이 전혀 남지 않아 있지 않다. 구미의 예전작업이 변화가 있는 곳마다 모든 작업의 근거와 출처, 신학적 배경 등을 밝히며 신중하게 진행되는데 반해 우리는 그 인적자원의 결여로 몇몇 사람들의 토론과 합의을 위주로 하는 공도문 작업이 진행된 것 같다. 또한 다른나라들이 수정판을 내놓은 후부터 치밀하게 공도문 작업을 진행해 나가는 것을 보면 우리는 전문가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공도문 작업을 너무 쉽게 파격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6) 1982년 미사예문
    73년 예문을 보완해서 재편집되고 의회와 주교원의 인가를 받은 최초의 새예문으로, 정심경으로 시작하며 사도신경은 생략되고, 대도문 양식이 3양식으로늘어나고, 십계명과 죄의 고백이 80년 영국공도문을 번역 사용했으며 축성경 제정사를 "행하시오" 문장을 "행하라"로 수정했다. 이때의 재미있는 현상 중에 하나로 성체성사에 대한 신학적인 대립이 결국 제정사 본문에 반영되었는데 성체축성에서는 "기념"을 보혈축성에서는 "기억"이라는 단어를 쓴 희한한 문장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65년 미사에 비해 너무 단순화된 것이 거부반응을 부르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 간결성과 단순한 구조로 모든 교회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조만도, 시편등의 작업은 속히 이루어 지지가 않아서 미사를 제외한 모든 예식은 65년 공도문을 사용하다가 94년 새편집 공도문에서 독서본문을 삭제하고 미사는 82년 미사예문으로 대체해서 출판했다. 이 와중에 조만도의 주기도문만을 미사에 있는 현대문으로 바꾸는 바람에 73년 예문에서 쓰이고 일상기도서에서 주교의 인준으로 수록되었던 73년 미사예문의 사도신경은 잊혀지게 되었다.

    7) 1992년 의안공도문
    82년 미사예문의 후속으로 조만도와 공동번역성경의 시편을 정리한 성시전편등이 마련되고 있었지만 그 진도가 너무 늦었다. 결국 공도문 개정의 요구가 거세지면서 1992년 79년 미국공도문을 번역하고 앞의 조만도와 시편을 수록한 대전 윤주교님의 의안공도문이 전국의회에 제출되었다. 그러나 그 수고에 비해서 다듬어지지 못한 거친 문장과 미국공도문을 그대로 번역했다는 거부감으로 결국 의회는 이를 시험용으로 쓰는 것을 부결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수정작업을 하기로 의회가 결의했으나 대전 윤주교님의 불참으로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를 못했다. 후에 이재정 신부을 포함한 새 공도문 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전면적으로 새로운 양상으로 99년 시험예문이 나왔다.

    8) 1999년 시험공도문
    우여곡절 끝에 99년 공도문이 나와서 의회에서 2년동안 시험예식으로 써보기로 했으나 역시 상당한 거부를 불러왔다. 첫 번째 이유는 너무 새로운 문체와 형식 그리고 신학적으로 파격적인 진보성으로 인한 거부감이고 두 번째는 한 교단의 가장 중요한 신학과 예배를 결정하는 공도문이라고 보기에 그 문체나 구성이 정리되지 못하고 미완성인 채로 올라 온 것이라 생각되고 있다. 또한 새공도문이 가진 변화가 과연 새 세대를 위한 사목과 관련이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최소한 82년 예문은 65년에 비해 파격적인 단순성으로 나름대로 새로운 계층을 위해 기여한 바가 많았지만 99년 기도서는 이런 실제적인 그리고 필요한 변화를 주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을 더 주고 있지 않은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공도문이란 말 그대로 교회의 모든 공동체가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함께 쓸 수 있는 기도서가 되는 것 이것이 그 어떤 당위성보다 우선된다는 사실을 예전 위원회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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