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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년 3월 12일] 마르코 8:31-38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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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 수: 3059, 2006-03-13 08:36:06(2006-03-13)
  • 오늘 읽은 복음 성경말씀은 3년에 걸친 예수님의 공생애가 마무리에 돌입한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예수님에게 남은 최후의 과업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예루살렘과는 정반대의 방향인 북쪽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이유는 변화산에 올라가시기 위함입니다.

    변화산상에서 있었던 일은 다음 장인 9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그 모습이 해와 같이 눈부시게 변화됨과 동시에 하늘에서 내려온 두 사람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나눈 대화의 내용이 루가복음 9장 31에 나와 있습니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께서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그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죽음에 관하여”, 개역성경으로 “예수님의 별세할 것”, 원어로는 ‘엑소도스’의 의미를 가진 단어로 죄로부터의 탈출을 뜻합니다.

    구약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수님은 대화하시면서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죄 없으신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의 제물 되어 돌아가시는 것 이외에는 달리 다른 방법이 없음을 재확인하고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임을 확인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곧바로 갈릴리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십자가의 길, 대장정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으로 향하시던 길에 필립보의 가이샤리아라라는 마을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필립보의 가이샤리아는 본래 이스라엘 최북방 헬몬산 기슭 해발 345미터 지점에 위치한, 머리 위로는 헬몬산의 만년설이 올려다 보이는 작고 아름다운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헤롯대왕의 아들 필립보가 그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로마황제의 칭호인 가이샤리아에 자신의 이름을 덧붙여 갸이샤리아 필리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에 속한 영토 내에는 로마황제의 이름이나 칭호를 붙인 도시가 여럿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나 아무 도시에나 황제의 이름을 붙일 수 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도시의 규모가 황제의 위용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 도시의 가장 중심이나 도시 높은 곳에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이 자리 잡고 있어야 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지상의 신이었습니다. 명목상의 신이 아니라, 신전에서 인간의 경배를 받는 실질적인 신으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분봉왕 헤롯 필립이 건설한 도시에 황제의 칭호가 붙었다는 것은 이 두 조건이 충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필리보의 가이샤리아는 한 마디로 신으로 군림하는 황제의 신전이 인간을 압도하는 황제의 도시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의도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질문과 대답이 황제의 도시에서 진행된 것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황제가 신으로 경배되고 화려한 위용을 갖춘 황제의 도시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당신이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라고 대답합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로마 황제가 아니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갈릴리 목수 출신인 예수님 당신이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혁명적인 고백입니다.

    동일한 장면이 나오는 마태오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의 대답에 흐뭇해하시며 칭찬하셨습니다.
    마태오 16:17-18,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 예수님은 자신이 가야하는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마르코 8:31, “그 때에 비로소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하게 하셨던 것이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외에는 인간을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기에 예수님은 첫 번째 수난 예고 말씀을 ‘명백하게’(32절), 드러내 놓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황제의 도시에서 신으로 군림하는 로마황제가 구원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구원자 그리스도라고 대답을 했던 베드로가 지금은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하는 주님 앞에 나서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고 있는 것입니다. 원어의 뜻으로는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바른 대답을 하여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가 왜 지금은 펄쩍 뛰며 예수님의 말씀에 반대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살펴봐야 합니다. 다음 장 마르코 9장 33절-34절의 말씀을 봅시다.

    33-34절, “그들은 가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께서는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에게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길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야에 대한 생각이 문제였습니다.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죽는 자가 아니라,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주권과 다윗 왕권을 회복할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다린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아로 왕위에 오르면 ‘나는 영의정으로 하고 너는 좌의정을 할 것이다.’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왜 네가 영의정이고 내가 좌의정이어야 하느냐’, ‘내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다투기도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수난예고를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온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을 알지 못했고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고 싶어 하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십니다.
    33절, “그러자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시며 꾸짖으셨다.”

    사탄은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가로 막는 자입니다.
    그가 아무리 훌륭한 믿음의 고백을 했던 수제자 베드로일지라도 자신의 생각, 야망, 욕심에 사로잡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많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사탄의 도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이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기를 원하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이란 예수를 이용해 자기 야망 실현하고자 하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행하는 일들입니다.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34절,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자기 생각, 자기 야망, 자기 욕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기중심적인 삶은 사라지고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믿음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38절,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절개 없다.’는 말은 ‘음란하다’라는 뜻입니다. 결혼한 사람이 성적으로 부정한 짓을 하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우리 주 하느님을 거역하고 다른 의뢰자를 찾는 상황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죄 많은 이 세대’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자 하느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그래서 영적으로 간음을 자행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부끄럽다’는 말은 ‘거역한다. 불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욕심, 자기 생각, 자기중심적인 죄 된 삶의 태도로 인해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며 거역하는 것입니다.

    사순 2주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너희는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

    우리가 사람의 일이 아닌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함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주님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유일한 구원자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람의 일이 아닌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십시오.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거역하지 말고 오직 순종함으로 이 땅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십시오.

    하지만 실상 많은 신자들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일상의 삶 속에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대단히 힘들어하고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씀 자체를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짐으로 여기고 고통스러워하거나, 아예 말씀대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체념해 바리기도 합니다.

    이것이 말씀대로 살아야 할 대부분의 신자들이 당면하고 있는 심각한 딜레마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신자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공통적으로 어떤 피해의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하느님만을 위한 것이요. 그로 인해 인간은 끊임없이 희생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피해의식입니다.

    그리고 그 피해의식의 깊은 곳에는 내 욕심과 내 야망을 이루고 싶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 피해의식의 허구성과 자기중심적인 죄된 태도를 처리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앙의 성숙에 이를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하느님만의 유익을 위한 것일까요?       일방적으로 하느님께만 득이 되고 나에게는 손해가 되는 일일까요?
    내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하느님께 무슨 불이익이라고 돌아가는 것일까요?

    욥기 35:6-7, “당신이 실수했다고 하여 그것이 하느님께 손해라도 될 것이란 말이오? 당신의 죄가 아무리 많다고 하여도 하느님께는 그것이 대단한 일도 아니오. 당신이 죄 없다고 한들 그것이 하느님께 무슨 덕이 되겠소?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무슨 혜택이라도 바라신단 말이오?”

    내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기 때문에 하느님이 비로소 창조주 하느님이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께 흠집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본래 나의 삶과는 상관없이 창조주시오, 전능자시며, 거룩하고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왜?’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유익되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당신과 당신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순종의 삶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신명기 10:12-13, “이제, 너 이스라엘아! 야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너희 하느님 야훼를 경외하고 그가 보여주신 길만 따라가며 그를 사랑하는 것이요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쏟아 그를 섬기는 것이 아니냐?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야훼의 계명과 규정을 지키는 것이 아니냐? 이것이 너희가 잘되는 길이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개역성경)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십자가에 오르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부활도 없고 죄사함도 없고 영원한생명도 없어 삶의 가치가 없어집니다.

    고전 15:17-19,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순종으로 십자가를 통해서 가장 위대한 축복인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무릇 주님을 믿는 신자라면 모두 진리의 향기를 풍기는 제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마땅히 지고가야 할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부부는 진정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상대방이 먼저 양보해 주기를 요구합니다.
    주님은 남편은 죽기까지 사랑하고 아내는 순종하라고 하십니다(에페 5:24-25).

    모든 부모는 자식이 진리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정작 부모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자식 앞에서 진의 본이 되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정신으로 자녀를 훈계하고 양육하라고 하십니다(에페 6:5)

    모든 자식들은 효자효녀란 소리를 듣기 원합니다. 그러나 나이 든 부모에게 자식의 도리를 다하는 자식은 흔치 않습니다.
    주님은 부모님께 공경하고 순종하라고 했습니다(십계명, 에페소 6:1-2).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비난의 대상이 되어진지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모든 교회와 교인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말 새로워지자고 외칩니다. 그러나 각자가 자신의 일터 속에서 크리스쳔답게 신앙의 양심을 쫓아 살려 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느님을 칭송하게 하라고 하십니다(마태오 5:13-14).

    서로 사랑하자고 힘주어 외칩니다. 그러나 항상 상대가 먼저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주기만을 기다립니다.
    주님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3:34).

    봉사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자기 눈앞에 이익에 관한 한 단돈 100원도 손해 보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로 행동으로 진실 되게 사랑하라고 하십니다(요한1서 3:18).

    사람으로부터 상처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자신의 언행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합니다.  
    주님은 심판 날이 오면 우리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들을 낱낱이 해명해야 될 것이라고 합니다(마태 12:36).
    누가 자신의 삶 속에서 진리와 성령과 전도의 열매를 거두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열매가 맺어지기 위한 필수과정인 먼저 썩어지는 밀알이 되기를 거부합니다.
    주님은 썩어지는 밀알 되어 열매 맺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2:24).

    누구나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물질의 축복도 부어주시길 원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십일조와 베풀고 나누는 삶은 살아가지 않습니다.
    주님은 온전하게 열의 하나를 바치고 베푸는 삶, 나누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말라기 3:10, 루가 6:38).

    날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함께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려 하지는 않습니다. 이 이중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이라면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

    오늘 제1독서 말씀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직 하느님만을 신뢰함으로 주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우리가 본받아야하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림을 하나 보고 마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입니다.

    시선이 맨 처음 가 닿는 곳은 칼을 쥐고 있었던 아브라함의 오른 손과 그의 얼굴입니다. 큰 그림으로 자세히 보면, 아브라함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습니다. 이 눈물은 그의 고뇌를 대변합니다.
    반면, 칼을 쥐고 있던 그의 오른손은 하느님을 향한 그의 순종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문자 그대로 ‘눈물을 머금고’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합니다.
    오직 전능하신 창조주의 말씀이기에, 신실하신 하느님의 뜻을 믿기에.

    오른 손과 대각으로 대칭을 이루는 왼손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왼손은 이삭의 눈을 가리며 고개를 뒤로 젖히게 누릅니다. 역설적으로 아들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른 손은 천사의 제지로 칼을 떨어뜨렸지만, 왼 손은 하나님의 뜻을 다 듣기 전에는 결코 뗄 수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이삭의 얼굴을 내려 누릅니다.

    아브라함의 왼손이 인간의 순종을 말한다면, 천사의 왼손은 위를 향하여 천사가 지금 하느님의 뜻을 계시하고 있다고 알리고 있습니다.

    천사의 왼 손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人身供養)을 중지할 것과 아브라함의 하느님은 인간의 괴로움을 즐기는 가학적인 하느님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제사가 아니라 인간의 순종을 보기 원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에서도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브라함처럼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합시다.

    “사람의 일이 아닌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제가 되게 하소서.”

    “나의 생각, 나의 욕심,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매일 나를 죽이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하느님을 부정하는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나의 구원자 주님을 자랑스러워 하며 주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살아가는 순종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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