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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혁전통에서 본 관상기도 - 김홍일 신부
  • 개혁전통에서 본 관상기도에 관한 연구





                                                           김홍일(성공회 사제, 선교훈련원)



         기도는 “내 사랑 안에 머무르라”(요한 15:4) 하나님 초대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며, 하나님 사랑 안에 머물면서 예수님께서 누리셨던 기쁨과 생명을 함께 나누는 일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돌과 땅이 하나인 것처럼 영혼과 하나님도 하나인데 돌을 땅의 중심부로 이끄는 것은 중력이지만 영혼은 하나님께로 이끄는 것은 사랑이라고 하였다.1) 요사이 관상기도에 대한 관심이 가톨릭전통의 교회들은 물론이고 개혁전통의 교회에서도 새롭게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개혁전통의 교회들 사이에서는 관상기도는 천주교에서 하는 낯선 기도로 치부되거나 때로는 종교 다원주의와 영합한 이교적 기도로 공격을 받기도 한다. 이 글은 먼저 개혁전통의 한국교회가 기도에 대한 좁은 이해를 넘어서 기도에 대한 보다 풍부한 전통을 회복하는 것, 특별히 기도의 관상적 차원을 회복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준비하였다. 이를 위하여 먼저 관상(contemplation)과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이와 관련된 주제들 - 다양한 기도의 유형과 단계들, 묵상(meditation)과 관상(contemplation)의 관계, 부정적 전통과 긍정적 전통과 관상 -에 대하여 살펴보고, 관상의 여러 수준과 단계들을 에블린 언더힐에 의지하여 정리하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는 개혁전통의 교회들이 어떻게 기도의 관상적인 차원을 이어 왔는지를 살펴보는 한편 오늘 날 개혁전통의 교회가 관상기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하였다.  



    1.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기도는 모든 것을 포용하시고 모든 것을 있게 해 주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존재와의 커뮤니케이션이다”.2)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소통’라고 정의하는 관점에는 그리스도교 기도의 특징이 잘 드러내고 있는데 그것은 그것이 말이든, 성찰이든, 묵상이든 하나님이라는 인격적 대상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할 때 거기에는 자신에게 집중하고 몰두하는 독백과는 다른 하나님이라는 대상이 전제되어 있으며, 그 대상과 소통하는 과정이 포함되어야 함을 의미 한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될 수 있는데 말하기, 사색하기. 귀 기울이기, 글쓰기 등이 있는가 하면 말과 언어만이 아니라 사고와 생각, 감정과 느낌으로도 진행될 수 있다. 그런가하면 걷기, 서기, 절하기, 무릎 꿇기, 팔을 들어 경배하기 등 몸과 동작으로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개혁전통에 있는 교회들에서 말로 드리는 입 기도나 침묵으로 드리는 사색과 성찰 등 묵상전통은 익숙하지만 생각을 비우는 관상기도나 몸으로 드리는 기도 등은 낯설게 느끼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종교개혁 이후 16-17세기에 걸쳐 개혁전통의 교회가 이어온 스콜라주의의 영향과 주지주의적 영향에 기인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루터와 칼빈같은 개혁자들은 신학과 영성, 윤리에 균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후 추종자들 다수가 영성과 윤리보다 신학에 집중하였던 영향으로 기도에 있어서도 주지주의적인 기도가 강하게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3)



      그리스도교가 기도에 대한 정의를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그리스도교 관상전통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우리는 기도를 말로 표현된 생각이나 감정들로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여러 가지 기도 중에 하나일 뿐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관상기도는 하나님의 순전한 선물로 여겨진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의 관계로 초대하시는 부르심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과 말, 감정을 넘어서서 하나님, 궁극적 신비에게 정신과 마음, 즉 우리의 전존재를 여는 것이다.’ 4) 이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열고 단순히 하나님 사랑 안에 머무는 관상’은 ‘대화’라는 개념으로 포괄하기 어려운 체험을 의미하며, 기도를 ‘관계’라고 정의하려는 시도는 이같은 관상의 특징을 표현하기 위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관상(contemplation)의 라틴어 어원은 이같은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관상(contemplation)은 라틴어 cum(with)과 templum(temple)의 합성어로서 ‘하나님의 성전에 함께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2. 기도의 단계들



            사람들이 맺는 관계에 여러 수준과 단계가 존재하듯이 기도 가운데서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 또한 몇 가지 수준과 단계들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5) 첫 번째 단계는 독백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아직 기도 가운데 인격적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며, 혼자 필요한 말을 쏟아 놓고 기도를 마치는 일방적 소통의 단계이다. 이 단계의 기도자는 자신이 기도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우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하여 보여주시는 응답의 체험을 생략한 채 기도를 드리게 된다.
    둘째 단계의 기도는 대화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중에 하나님께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듣기도 한다. 독백의 단계에서는 기도의 초점이 자신이지만 대화의 단계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도 안에 현존하시며, 기도하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소통과 친교가 시작된다. 이 단계에서부터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중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기 시작하며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삶과 문제들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시기 시작한다. 이 단계의 기도를 하는 사람은 기도를 체계 있게 배우고 자신에게 적합한 기도를 발견하여 꾸준히 실천하여야 한다.
    셋째 단계의 기도는 듣는 기도이다. 이 단계에서는 하나님과의 친교와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시다는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믿음이 깊어진다. 하나님께서는 기도 중에 새로운 깨달음으로, 새로운 의지를 불러일으킴으로, 충만함이나 평화, 기쁜 감정으로, 때로는 상상력이나 기억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기도자로 하여금 청원보다 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을 더욱 사모하게 한다. 이 단계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여야 하며, 기도 중에 만나는 자신의 죄나 한계들과 용기 있게 직면하여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의 자기직면은 자기초월과 성장의 열매로 나타난다.

            마지막 단계는 사랑의 단계이다. 기도가 사랑으로 승화되어 매우 단순하고, 명료해 졌을 때, 기도가 삶 그 자체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믿고, 내맡길 때, 기도를 통해 사랑을 실천하고, 나눠주고 봉헌할 때, 이러 저러한 애기로 복잡한 말들이 필요 없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며 모든 것을 이해하고 행하며 또한 모든 것을 봉헌 할 수 있을 때, 바로 여기가 기도라는 산의 정상이다.

    3. 마음과 가슴으로 드리는 기도



            기도를 몇 가지 형태로 유형화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첫째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우리가 말로 드리는 입기도(구송기도)이다. 이 기도는 기도문을 읽으면서 기도하거나 자유롭게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 찬양, 회개, 청원 등 기도자의 마음을 말이나 소리를 사용하여 드리는 기도이다. 둘째는 우리들의 생각을 사용하여 드리는 묵상기도이다. 우리의 기억, 상상, 추론, 성찰 등을 사용하여 드리는 기도이다.  셋째는 단순화된 생각과 충만한 감정으로 드리는 정감의 기도이다. 묵상기도에서는 생각의 활동이 감정에 비하여 왕성하고 크다고 할 때 정감의 기도는 생각의 활동은 단순해지고 감정이 충만한 상태에서 드리는 기도이다.  마지막으로 관상기도이다. 관상기도는 우리들의 생각과 감정 너머, 하나님 품 안에서 드리는 쉼의 기도이고 머무는 기도이다. 그러나 실재 기도체험에서 이같은 현상은 순차적으로 일어나기도 하고, 동시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하워드 L. 라이스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기도의 균형을 위하여 강조하는 네 가지 요소가 있는데 첫째는 개인기도와 공동기도의 균형, 둘째는 기도의 자발성과 훈련, 셋째는 마음과 가슴으로 드리는 기도, 넷째로 말하는 자인 동시에 듣는 자로 기도하는 것이 그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셋째 요소에서 그가 기도를 말과 언어만이 아니라 마음과 가슴의 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6)

            개혁주의 전통에 있는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관상기도를 낯설어하거나, 때로는 그것을 가톨릭교회의 기도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라이스는 개혁주의 전통에서도 기도가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단계를 넘어서 마음과 가슴을 나누는 단계로 발전되어야 함을 강조하여 왔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7) 이처럼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은 생각의 차원을 넘어서 마음과 가슴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며, 묵상과 관상은 우리의 마음과 가슴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마음과 가슴은 기도의 공간이다. 기도의 본질은 느낌으로, 언어로 드리는 것일 뿐 아니라 마음과 가슴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무엇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단순한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쉽게 가슴에 가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우리들 가슴이 오랜 세월 동안 자기방어, 자기를 치켜세우고픈 태도와 생각에 의해서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으로 덧씌워져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복잡한 생각들과 감정들이다. 은수자(Theophan)은 ‘머리는 쓰레기 더미처럼 복잡하다: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없다’고 말하였다.8) 그래서 기도드릴 때 우리는 우리의 주의를 우리의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모아야 한다. 우리가 ‘mind in heart' 라고 할 때 마음은 주의를 의미한다.

                

    4. 묵상(黙想)기도와 관상(觀想)기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묵상(meditation)과 관상(contemplation)을 구분하여 왔다. 묵상은 보통 성경과 그리스도의 삶을 숙고하기 위하여 사람의 지능, 기억, 의지 그리고 상상을 이용하여 하나님에 관하여 생각하는 기도이다. 반면 관상은 거룩한 개념마저도 너머서는 우상의 무서운 파괴요 불사름이며, 지성소의 정화이다. 하나님께서 비워놓으라고 하신 곳을 어떤 우상도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9) 요사이 관상기도를 이야기할 때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나 예수 기도처럼 거룩한 단어나 짧은 기도문을 반복하는 형태의 기도를 포함하여 이야기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향심기도나 예수 기도는 우리를 관상으로 인도하는 초입단계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의 성요한은 “묵상은 기도와 영성적 습관의 의도적인 온갖 행위와 훈련”인 반면 “관상은 고요한 형태의 묵상이며 훈련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10)

            샬렘(Shalem Institute)의 선임연구원이었던 제랄드 메이에 의하면 관상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심리학적 특성이 있다. 첫째는, 의식이 열려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묵상의 단계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하는 노력처럼 한 가지 집중하여 다른 것들을 모두 배제하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현재의 순간에 집중된다는 점이다. 기도 중에 기도하는 사람은 새소리도 듣고, 바람도 느낄 수 있으며,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에 관한 생각이 생겨날 수 있지만 그것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에 불과할 뿐 더 이상 기도하는 사람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기도 중에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 사랑 안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11) 토마스 머튼은 관상이란 “깨어 활동하며 살아있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생명 자체” 라고 하였다.12)

            그것은 심미적 통찰력 너머에, 예술과 시의 영역 저 너머에 있다. 관상은 우리의 지각, 조직, 설명, 논쟁, 대화 그리고 우리 자신까지도 뛰어넘으며 관상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떤 의미로 죽어야 한다. 그러나 그 죽음은 사실상 보다 높은 생명에로의 진입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상은 다른 모든 형태의 직관과 체험-그 직관과 체험이 예술, 철학, 신학, 전례 또는 일반적 수준의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일지라도-을 대체하고 또 폐기해 버리는 것 같다. 관상은 모든 것을 배제하지 않고 함께하며, 또 함께 해야 한다. 관상은 이 모든 것의 성취이기 때문이다.13)



    5. 묵상(黙想)기도와 묵상의 방법들



            앞서 언급하였듯이 묵상기도는 우리들의 기억, 이해력, 의지 등 정신의 힘들이 기도로 들어 올려지는 기도이다. 초기 교회에서 묵상의 재료는 성경이었다. 예수님께서도 자주 구약성경과 시편을 인용하여 기도하셨으며, 이처럼 성경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전통은 유대교와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 그리고 사막의 교부들과 수도회의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전통을 통하여 이어져 왔다.14)

            오리게네스는 ‘진리는 성경을 통하여 역사 안에 현존하며 성경은 지혜의 원천’이라고 강조하였다. 요한 크리스토퍼는 성경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편지’라고 하였다. 이처럼 성경에 대한 강조는 사막의 교부들에게는 물론이고 이후 수도회 생활에 있어서도 기도와 수행에 있어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일을 수행의 기본으로 자리 잡게 하였다. 실제로 초기 수도회에서 신입회원을 받아들일 때 암기력을 시험하였던 것은 성경을 오늘 날처럼 자유롭게 읽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성경말씀을 외워서 암송하여야만 하였고, 그래야 기도와 수행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15)

            이처럼 중세 초기까지 묵상의 주된 재료는 성경이었으며 묵상은 생각이 아니라 읽은 말씀을 조용히 중얼거리며 기도하는 과정을 의미하였다. 수도전통에서 묵상을 의미하는 meditatio는 기억된 성서본문에 대한 반복 암송을 뜻했다. 드 보궤신부에 의하면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묵상처럼 오롯이 내면적인 행위가 아니라, 입과 정신 모두를 사용하는 과정으서 암송과 같다.16)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당신이 만일 듣거나 읽는다면 그것을 먹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묵상을 한다면 방금 들었거나 읽은 것을 되새김질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17) 12세기 스콜라철학의 발전으로 묵상에 생각(cogitatio), 숙고(consideratio), 연구(studum) 같은 지성적 의미가 첨가되기 이전에 묵상은 그저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항구하게 성경말씀을 되뇌이는 것이었다.18)

            중세 후기에 이르면서 묵상의 재료는 성경에서 교부들의 문헌과 다른 영성서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였고 14세에는 영적독서를 묵상과 기도를 위한 준비를 넘어 독립적 수련으로 간주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경향은 이후 주로 예수회에 의해서 강화되고 발전되어 왔다.19)고대 교회와 수도회 중심의 묵상 방법과 비교하여 중세 후기에 일어난 새로운 묵상방법은 두 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는 대상을 생각하고 고찰하는 방법에 새로운 것을 도입한 것이고 둘째는 묵상이 하루 일과에서 정해진 시간에 행해지면서 하나의 영성수련 과정이 된 것이다.

    17세기 프랑스의 샹 슐피스는 묵상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묵상하는 사람은 먼저 ‘예수를 눈앞에’ 떠올려 그를 열렬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그 다음으로는 ‘예수를 마음속에 간직’하여 그와 함께 대화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하고, 마침내 ‘예수를 손 안에 가져’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래야한다.”고 하였다.20)

            묵상기도는 주로 우리들의 추리, 기억, 상상, 성찰 등 사고를 통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묵상기도의 방법으로는 앞서 언급한대로 중세 초기까지는 성경말씀을 통한 묵상이 지배적이었으나 이후 다양한 소재를 통한 묵상과 다양한 형태의 묵상방법들이 실천되었다.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나 예수 기도, 그리스도인의 묵상기도(Christian meditation)에서처럼 단어의 사용, 프랑스의 떼제 공동체의 찬양과 같은 짧은 챤트들의 지속적인 반복을 통한 묵상, 그리스도의 순례전통에서 비롯된 걷는 기도나 춤과 같은 동작을 통한 묵상, 영적일지쓰기를 통한 묵상,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돕는 묵상 등 다양한 형태의 묵상기도가 가능하다.  묵상은 무엇보다 사랑에 기초하며, 기도에서 우리의 주도성을 필요로 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6. 관상에 이르는 긍정과 부정(Apophatic and Kataphatic)의 전통



            한국교회에서 관상이라는 단어와 관련하여 일어나고 있는 개념적 혼란 가운데 한 가지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공존하며 발전되어 온 긍정과 부정의 전통에서 비롯되고 있다. 부정의 전통에서 바라보는 하나님은 피조세계에서 우리들이 경험하는 어떤 이미지나 상징을 넘어서는 분이시며, 모든 개념이나 이미지에 대한 부정과 무지에 의해서 만나지는 하느님이다. 반면 긍정의 전통에서 하나님은 피조물 속에 창조주 하느님의 흔적과 모습이 새겨져 있음을 믿으며, 그 유사성에 더욱 주목한다. 때문에 긍정의 전통에서는 하나님을 모든 것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믿음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  

            12세기 이후 교회사에서 부정의 전통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것은 10세기를 전후하여 발흥한 스콜라철학이 13세기에 들어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교회가 신학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스콜라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에 기인한다. 지적이고 분석적인 스콜라주의의 영향으로 교회는 신비적 진실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점차 상실하여 갔고, 교리적이고 논쟁적인 성향이 강화되어 갔다. 더욱이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거치면서는 마침내 존재의 깊은 신비의식에 대한 감각은 상실되고 그 자리를 의식적인 차원의 자아가 대체하여 갔다. 그것은 마치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 라는 복음의 선언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선언으로 대체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21)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부정의 전통을 대표하는 기도를 『무지의 구름』(The Cloudy of Unknowing)에서 긍정의 전통을 대표하는 기도를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22)

            부정의 전통을 대표하는『무지의 구름』저자는 관상에 대하여 이렇게 아래와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어떻게 그 분을 생각해야 하며 그 분은 누구인가?” 이에 대해 나는 “나도 모른다.”고 답할 수 밖에 없다. 그 질문으로 나는 나를 어두움 속, 무지의 구름 속에 데려다 놓았거니와 너 자신도 그 속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내 사랑으로 택한다. 왜 그럴까? 우리는 그 분을 얼마든지 사랑할 수는 있으나 생각할 수는 없다. 사랑을 통해서는 그 분께 그분께 다가가 그 분을 끌어안을 수는 있으나 생각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특별한 점에서 간혹 하나님의 자비와 뛰어난 가치를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그리고 그것이 기쁨이며 묵상의 정당한 부분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생각을 버리고 망각의 구름으로 덮어야 한다.23)

            향심기도는 『무지의 구름』에서 영감을 받은 트라피스트 수도자 토마스 키딩과 그의 동료들이 1960년대 말 시작한 기도운동으로 기도 중에 떠오르는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도 흘려보내며 더 깊은 현존 가운데로 나아가는 기도이다. 기도 중에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가 떠오르면 하나님을 향한 지향의 상징으로서 거룩한 단어를 떠올리며 지향을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고, 하나님 안에 단순히 머물면서, 하나님께 더 깊이 나아간다. 여기서 관상이란 기도 중에 떠오르는 모든 이미지, 생각을 넘어선 상태를 의미한다.

            반면 ’이냐시오 기도‘에서는 묵상과정을 상상이나 대화 등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기도하도록 안내한다. 그리고 기도과정에서 묵상과 관상은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묵상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에 관해 생각하며 기도하는 것이고, 관상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조금 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양쪽에 다 ‘....에 관하여 사고하는 면’도 있고 ‘느끼는 면’도 있다. 그러나 묵상기도는 주로 생각하는 기도이고 관상기도는 느끼는 것에 중점을 두는 기도이다.24)

    ‘관상’이라는 같은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기도방식에서 보이는 차이는 그 기도가 위에서 언급한 긍정의 전통과 부정의 전통, 어디에 더 가까운가에 따라서 관상기도의 방식이 다르게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7. 관상기도와 관상의 여정



    전통적인 종교적 이해에서는 의식이 영이나 영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런 이해에 따르면 의식은 개인의 뇌 기능에만 제한되지 않고 더 깊고 넓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간주된다. 의식의 영적인 차원을 다룬 고전 ‘영혼의 성’ 을 통하여 아빌라의 데레사는 의식이 어떻게 심오한 수준에서 신성과의 근원적인 접촉을 반영해주는 지를 묘사한다.  제럴드 메이는 우리의 인식은 각 사람이 개인적 인식을 넘어서 의식하는 어떤 ‘더 큰 의식’에 공통의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이 ‘더 큰 의식’은 우리를 소유하며, “그 ‘더 큰 의식’은 하나님과 같지는 않지만 어떤 때는 하나님의 본질의 한 부분으로 여기기도 한다.25) ”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인간의 의식작용은 실재 그 자체와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부터 도출한 이미지나 개념과 관계를 맺는다. 그런 점에서 관상은 묵상에서 작용하는 의식과 사고의 세계를 넘어서 하나님 자체와 관계하기 위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26)

    1) 침잠 (沈潛)

    에블린 언더힐은 관상훈련의 첫 단계를 침잠(recollection)이라고 하였다. 침잠은 주의력을 의지의 지배아래 두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성녀 데레사는 침잠은 규칙적으로 신중하게 묵상을 실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묵상은 생각과 관상 사이에 중간 지점이다. 데레사는 제자들에게 ‘나는 위대하고 기묘한 생각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라보라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분석적인 바라봄이 아니라 사랑의 응시이며 그래서 데레사는 묵상을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27)

        그러나 묵상 주제를 선택한 이후 묵상을 하는 동안 기도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가장한 모든 공격에 맞서야 한다. 분심으로 인하여 묵상이 방해를 받게 되는데 그때마다 다시 묵상 주제로 돌아가서 그것을 다시 생각하고 응시하고 붙잡아야 한다. 권태롭고 자신이 무능하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 터인데 이것 역시 거부하여야 한다. 보통 묵상을 시작하고 15분 정도는 이러한 분심거리들과 씨름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한 시간이 지나면 묵상의 주제가 생각지도 않은 의미, 아름다움, 능력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묵상이 더욱 깊어지면 외부세계로부터 오는 집요한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된다. 바깥세상의 번잡한 소음이 당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멜로디처럼 들리며, 이제 그 소음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하여 "서툴지만 번잡하고 분주함 속에 자신과 또 다른 자신의 실재를 구분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면 이미 관상생활의 초기 단계에 도달하였다는 징조이다." 28)

    2) 조명(照明)

        분주함 속에 자신과 또 다른 자신의 실재를 구분하는 능력은 새로운 자기인식의 시작인데 성 빅톨 수도원의 신비가들은 이처럼 자기 인식의 산을 오르는 것이 조명에 앞서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것은 험하고 고독한 여행, 용기와 성실성을 충분히 시험해 볼 수 있는 여행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낮은 산비탈에서 편안한 무지(無知)속에 거하면서 자신의 보다 분명한 특성들을 가지고서 적나라한 진리를 베일로 덮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29)  

    이처럼 조명의 과정은 마치 두 개의 법이 자신의 마음 안에서 싸우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던 바울로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빛 아래서 새롭게 만나는 참자아를 만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3) 정화(淨化)

        그 같은 침잠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의 번잡한 생활에 만족하기를 거부하며 영적인 우주와 교제하기를 갈망하는 존재를 발견한다. 침잠상태에 친숙해지면서 기도자의 태도를 결정하는 의식은 과거에 자신이 일상생활에서 매우 적절하다고 여겼던 의식이나 태도와 첨예하게 충돌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처럼 자신의 죄스러운 모습을 만나게 되면 기도자는 자기 전 존재를 개조하려 하지 않을 수 없으며 회심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같은 변화를 향한 갈망과 노력에서 무력한 자신을 보면서 기도자는 하나님의 도움에 의한 변화를 갈망하게 되는데 신비가들은 이 단계를 정화의 단계라고 하였다. 정화란 성품을 극적으로 재형성하는 것으로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30)

    우리들의 지성만 세상에 대한 피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견해에 동화, 연합되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 갈망, 우리의 에너지 전체가 그릇된 길로 향했고 잘못된 기계에 사용되어 왔다. 그래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지만 기도자는 여전히 습관의 속박을 받고 있으며 자유롭지 않다.

        때문에 습관과 욕망에 오염되지 않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묵상시간을 실천하는 일을 꾸준히 실천하여야 한다. 이 과정은 서로 다른 두 인격이 싸우는 과정이며, 침잠을 통하여 우리는 사람이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며, 영원을 향하여 살 수도 있고, 또 유한한 세상을 향해 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대치상황이 해소되지 않는 한 우리는 온전한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려는 사람에게는 신중한 자기-단순화, 마음과 의지의 정화가 요구된다. 이 모험에서 성공하려면 모든 힘과 결심을 동원하여야 한다.31) 이 때 중요한 것은 신비한 성품 즉 용기, 단순한 마음, 절제가 중요하다. 신비가들은 이를 위하여 집착에서의 이탈과 금욕에의 헌신을 추구하였다.

        이기심의 죽음, 사심이 없는 상태, 자비한 마음의 시각이 바로 참 지식과 만나는 조건의 비밀이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였다. 사랑과 의지를 가지고 관상적 실천을 꾸준히 할 때, 침잠에 의해서 산만한 생각이 정지되고 이탈에 의해서 산만한 욕망이 제거되었듯이 이제 흐트러진 산만한 소원, 영혼의 내향적 본능과 외향적 본능 사이에 망설임도 억제되고 해결 될 것이다. 32) 이렇게 자아는 급작스럽게 또는 점진적으로 ‘참된 지혜’를 향하게 되고, 이러한 시각의 변화는 그의 성격 전체에, 지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측면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정화’가 뜻하는 것이다.33)

    4) 관상(觀想)의 형태들

        관상의 첫 번째 형태는 엄격한 재조정, 조명의 과정을 통하여 이기적인 자아의 독재를 물리치고 보다 폭넓은 삶의 자유를 획득한다. 그로 인해 사물에 대한 확대되고 강화된 인식, 자유롭게 된 의식의 유산이라고 선언하는 것에 동참한다. 이처럼 개인이나 그룹의 실존보다 더 큰 실존의 강력한 리듬에 기꺼이 복종하는 것에 의해서 보다 큰 자아인식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하여 기도자와 주위의 감각대상들 사이에서 기도자가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친밀한 관계를 발견하게 되고 또 감각대상 안에서 심오한 의미, 개인적인 특성, 실질적인 반응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성 프란시스가 형제 바람과 자매 물이라고 말한 것처럼... 19세기 위대한 관상가 중에 한 사람인 플로랜스 나이팅게일은 ‘나는 내 친구들 안에서 하나님을 보기 위해 노력하고, 내 고양이 속에서 하나님을 보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관상의 두 번째 형태는 기도하는 사람이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보다 큰 의식에 들어가는 것으로 그것은 노르위치의 쥴리안이 발견하였던 특성으로 표현된다. 쥴리안이 피조된 우주의 하나 됨을 보여주는 ‘작은 것’을 관상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녀의 심오한 사랑의 시각은 그 안에서 연속적으로 세 가지 특성을 감지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드셨다는 것, 둘째는 하나님이 그것을 사랑하신다는 것, 셋째는 하나님이 그것을 보존케 하신다는 것이다.”34) 그녀는 세 가지 견해가 아니라 세 가지 사실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신비가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가깝고도 멀다’고 한다. 생각에서는 멀지만 우리의 삶을 흠뻑 적시고 지원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하고 그 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우리들은 항상 포옹해주는 창조적인 사랑에 의해 양육되고 유지되어 왔지만 우리들은 자신이 호흡하는 공기만큼도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두 단계 사이에 현저한 차이점이 있다.

    첫 단계에서는 의도적으로 내면으로 들어가서 침잠에 의해 초래된 기도하는 사람의 기능들을 모아 들이는 것이 새로운 출현의 서곡, 순수하게 개인적인 삶의 편협한 한계를 벗어나서 피조세계에 대한 보다 훌륭하고 참된 이해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 행위였다면 이제 두 번째 단계에서 훈련과 집중된 주의력은 반대의 경로를 취하는 듯 하다. 그것은 기도자의 육체적인 감각이 애착하지 않는 실존의 차원을 향한다. 신비가들이 말하듯이 생각하거나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 자신의 중심을 향해 내면으로 내려가야 하며, 십자의 요한이 감각의 밤이라고 한 기이하고 특이한 어두운 상태를 향해야 한다.35)

    마지막 단계는 지금까지 기도자가 획득한 모든 것은 기도하는 사람 자신의 고된 노력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기도자는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었고, 날카로운 사랑의 화살로 무지의 구름을 공격하였다. 이제는 경험할 모든 것이 기도자의 노력이 아니라 선물처럼 발생할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길을 잃은 것처럼 느낀다. 실존의 주요한 목적이 제거된 것처럼 느낀다. 이제 기도자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기도자에게 행해질 수 있거나 행해져야 할 일은 많다.36) 영적 만족을 향한 갈망처럼 이기심의 마지막 단편들이 정화되는 과정이며 하나님의 활동이 인간의 행동을 대신하는 과정,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게 되는 단계이다. 그런 점에서 관상체험의 분별은 체험의 성격에 있기 보다는 그 체험을 통한 열매에 달려있다는 것이 기도의 성인들이 가르치는 일관된 진실이다.

    8. 개혁전통의 영성과 관상전통

            사람들이 성지를 순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리를 넘어서는 인식’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 아닐까? 관상기도를 가리켜 ‘일치의 기도’라고 할 때 그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고 높으신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37) 우리는 대상에 몰입할 때 대상과 연합하게 된다. 구경꾼들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애국자는 조국을 알고,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알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알게 된다. 관상은 그런 점에서 기도 중에 경험하는 체험인 동시에 영성생활의 전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할 은혜이기도 하다.  

            그 동안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이 같은 관상적 전통의 영성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왔다. 그러나 라이스는 그의 책 『개혁주의 영성』(Reformed Spirituality)에서 칼빈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이며, 언제나 균형을 유지되어야 하는 세 가지 것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이고, 언제나 균형을 유지되어야 하는 세 가지 것-의(義), 검소, 거룩-이 있는데, 이것들은 또한 시에나의 케서린(Catherine of Siena), 아시시의 프란시스(Francis of Asssisi), 십자가의 성 요한(John of the Cross), 아빌라의 데레사(Teresa of Avilia),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표현된 가톨릭교회의 역사적 믿음의 영성과 조화를 이룬다고 지적하고 있다.38)

            루터 또한 다른 개혁자들과 달리 가톨릭의 유산을 버리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개혁하길 원했다. 오늘날 우리가 유익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결정하기 위해서 전통을 의지하듯이-마치 개혁전통의 교회들이 개혁자들의 영성과 신앙이라는 전통을 의지하듯이-그 시대의 루터도 그렇게 행했다. 그는 교부들과 기독교 신비가들의 저서들에 의지하였으며, 그같은 흔적은 그가 1520년에 펴낸 『기독교인의 자유』(The Freedom of a Christian)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 루터는 영혼이 그리스도와 결혼한다는 신비적인 상징에 대한 중요성을 언급하였고, 이 신비적 결혼은 루터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의와 영혼의 죄를 교환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39)

    신앙은 마치 한 신부가 자신의 신랑과 연합하여 한 몸이 되듯이, 영혼(soul)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켜 한 몸이 되게 한다.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영혼은 이 신비를 통하여 한 몸이 된다.(에페 5:31-32) 그들이 만일 한 몸이고 나아가 그 혼인이 실재라면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이 좋든 나쁘든 공동의 소유가 되는 결과가 되는 결과가 뒤따른다. 그리하여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신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마치 자신의 소유인 것 처럼 그것을 자랑하며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략40)

         루터에게 신앙은 하나의 막연한 집합체를 이루는 교리들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변형의 과정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루터와 칼빈 모두는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취하여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에 대하여 매우 신중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전통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과정을 선택하였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머리와 지체들간의 연합, 즉 우리 마음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심-간단히 말하면, 신비로운 연합-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우리의 것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함께, 당신이 받으신 선물의 공유자가 되게 하신다.41)

    칼빈은 믿는 자와 그리스도의 이러한 신비적 연합이 개혁주의 전통에서 말하는 거룩함의 진정한 핵심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의 신학은 신비적 합일에 대한 그의 사상들보다는 예정론을 중시함으로써 잘못 해석되었다. 42) 그런 점에서 칼빈 영성의 출발점은 예정론이 아니라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합일이었다. 그는 인간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결합되며 평생동안 그 결합 안에서 성장한다고 가르쳤다. 이 결합은 가톨릭 전통이나 정교회 전통 안에 있는 신비가들이 주장하는 합일과는 다르게 여겨진다.

            이 신비적 합일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믿음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지 점진적인 여러 성장단계를 지닌 긴 여정의 종착점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신비가이다. 신약성서에서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말했다. 칼빈은 이 과정에서 칭의와 성화는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칭의는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루터의 견해에 완전히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주어지는 성화(사람들이 거룩해지기 위하여 거쳐야 하는 과정을 일컫는 용어)의 은사를 보다 강조하였다.43)

            하나님과의 연합을 말했던 영성의 몇몇 중세 형태들과 달리 개혁주의 영성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초점을 맞추었다. 17세기 사람으로 신비적이었던 사람들 가운데 아마도 청교도에 가장 가까웠던 인물인 프란시스 루스(Francis Rous)는 결혼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다음과 같은 극단적인 말로 표현하였다.

    당신은 하나님이신 분과 결혼한 상태이며, 그 분 안에서 당신은 또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다. 그분은 개인적인 연합에 의해 당신과 하나이며, 당신은 신비적 연합에 의해 그분과 하나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분과 연합되고 그분과 혼인한 상태이므로, 그분의 영이 여러분의 영에 흘러 들어오며. 신성이 여러분의 영혼에 흘러내린다.44)

        “영국 성공회의 경우는 종교개혁 과정에서 다양한 관점을 조정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으며 신학적 관점에서 폭넓은 차이점을 수용하면서 종교개혁을 진행하였다.” 45)그런 점에서 성공회는 다른 개혁전통의 교회들과 달리 종교개혁 과정에서 영국의 켈틱 그리스도교 전통이나 노르위치의 쥴리안(Julian of Norwich), 리챠드 롤(Richard Rolle), 무지의 구름의 저자 등과 같은 영국 신비가들이 지니고 있던 관상전통들이 자연스럽게 개혁과정에 이어질 수 있었다.      특별히 영국의 종교개혁 과정에서 관상적 전통은 존 던(John Donne), 윌리암 로드(William Laud)와 같은 케롤라인 디바인 Divine Caroline 전통의 성직자나 시인들을 통하여 계승되었다. 케롤라인 디바인 전통의 성직자와 시인들은 영국의 종교개혁 과정에서 수도신학을 계승하며 관상전통을 이어주었다. 수도신학은 종교개혁 과정에서 대립적인 경향과 태도를 보였던 사변적 접근과 정서적 접근 (speculative-affective) 사이에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다. (English Spirituality, Martin Thornton 1963.p230-281 참조)

        또한 18세기 일어난 옥스퍼드 운동은 영국 성공회에서 다시금 모든 그리스도교가 공유하고 있는 교회분열 이전 교부시대의 전통과 영성의 회복, 그리고 수도원 회복운동을 통하여 관상적 전통을 부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개혁교회 전통에서 관상적 전통을 가장 강하게 간직하고 있는 교파는 17세기 초 조지 폭스에 의해 시작된 퀘이커(친우회, The Society of Friends)일 것이다. 퀘이커 영성에서 있어 핵심 개념인 ‘내면의 빛’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가장 근원적이고 직접적인 경험이다. 그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인도하며 또한 구성원들을 신앙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빛이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the Divine)을 직접, 다른 매개 없이 경험하는 근거인데 아래 인용된 조지 폭스의 목회서신들은 퀘이커 영성에 흐르는 내면의 빛, 즉 관상전통의 표현들이다.46)

    모든 곳의 친우들이여, 하나님의 능력 안에 거하십시오. .... 그것은 여러분의 모든 영혼을 평화로, 하나 됨에로,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서간 104:1655)

    사귐의 신비가 능력 안에 있음이 분명합니다. 사귐이 들어있는 그 능력, 곧 복음이 없기 때문에 교회는 흩어진 무데기들입니다....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여러분은 사귐의 신비 안에 거하십시오. (서간 169:1658)

    능력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그 안에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드는 복음의 사귐이 있습니다.(서간 228:1663)

    빛 안에 있어서 능력이 모든 세상적인 것을 제거해주시기를 기다리십시오. 그 빛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정결하신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가도록 하십시오. 생명의 빛 안에 걷는 여러분은 그 안에서 하나 됨을 얻을 것입니다. (서간 49:1653)

    9. 관상과 활동, 삶

         사람들이 관상이라는 단어를 아주 특별하게 심오한 기도의 특성들을 묘사하는데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그것을 침묵(silence)과 정적(stillness)과 연관시키고 심지어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생각하기조차 한다. 관상기도와 관련하여 짚고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 중에 하나는 관상기도가 기존의 기도를 대체하는 기도가 아니라는 점이며, 관상기도 운동이 보다 중요하게 관심하는 것은 기도의 관상적 차원을 회복하는데 있다는 점이다. 고전적으로 관상은 사물들이 존재하는 그대로 인식하고 그것들에 대해 사랑스럽게 반응하는, 세상 가운데 직접적으로 열려있는 임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관상은 고요하거나 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아주 능동적이고 시끄러운 것이 되어도 좋은 것이다.47)

    이러한 의미에서 관상은 임재의 모든 것을 망라하는 특성으로 우리 자신의 내적 경험뿐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상황과 필요들을 직접적으로 인식하고 그에 대해 반응하는 것을 포함한다. 관상과 행동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행동 가운데 모든 것을 지탱하고 포괄하는 ‘활동 가운데 관상(Contemplation in Action)’이 더욱 정확한 개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모든 생각들과 행동들은 깊은 기도의 열림과 사랑의 반응 가운데 함께 결합할 수 있다.48)

            

            오래 전 일본 갈멜 수도회 오쿠무라 이치로 신부의 ‘기도’라는 책을 흥미 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중에서도 ‘물과 기도’의 비유는 일상과 기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49) 저자는 먼저 인간의 몸에서 수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70%라는 점과 몸의 생존에서 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사람의 몸이 수분을 섭취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 경로가 있는데 첫째는 공기 중에 있는 수분을 호흡을 통하여 섭취하는 경로이다. 둘째는 음식물에 있는 수분을 통하여 섭취하는 경로이고 마지막으로는 물 자체를 섭취하는 경로이다. 저자는 기도의 필요성을 기도의 신체성에서만 끌어 낼 수 있다고 하면서 신앙적 생명과 생존을 위해서도 쉬지 않는 호흡으로 공기 같은 하나님을 취하고, 일상 속에서도 식사를 하듯 음식물 같은 하나님을 취할 뿐만 아니라 매일 일정한 분량의 물에 마시듯 물 자체이신 하나님을 취할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몸의 생존을 위하여 매일 일정한 시간을 확보하여 물 자체를 마시는 기도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렇다고 일정한 시간에 섭취하여야 하는 식사 같은 기도와 수면시간에도 멈추지 않는 호흡 같은 기도가 없어도 온전하고 건강한 신앙적 생명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개혁전통의 영성은 성과 속, 삶과 예배, 활동과 관상이라는 이원론적 분리를 넘어서 우리 삶 전체를 거룩하게 하는 것에 관심하였다. 그리고 그것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개혁하여 왔다. 그런 점에서 개혁전통의 교회에서 관상에 관심한다는 것은 ‘기도와 삶’의 일치를 ‘활동과 관상의 일치’(Contemplation in Action)를 꿈꾸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생활이 곧 기도’가 되는 과정은 이처럼 호흡 같은 기도, 식사 같은 기도를 통하여 완성되는 것이며, 안정적인 기도의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생활하여야 하는 많은 현대인들에게 이 같은 기도가 차지하는 비중과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성 안토니오는 “영적독서는 기도로 나아가야 하고, 읽혀진 내용은 실생활 안에서 전개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묵상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haga’를 나타내는 그리스어 ‘meletao’는 말씀을 내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자갈밭이나, 가시덤불, 뙤약볕이 내리 쪼이는 땅이 아니라 가슴에, 좋은 땅인 가슴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 기도가 열매 맺는 삶으로 이어져야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참된 기도는 기도를 마치고 나서 일상과 현장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10. 글을 맺으며

         개혁전통의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관상기도에 대한 관심과 비판은 개혁교회의 정체성을 어디에 둘 것인가 라는 문제의식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것은 개혁전통의 정체성을 개혁된 교회(Reformed Church)에서 찾을 것인가 아니면 개혁하는 교회(Reforming Church)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 다름 아니다. 필자는 개혁신앙의 정체성을 후자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개혁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사건이어야 하고, 실재로 교회의 역사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칼빈에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나타나는데 그것은 의롭다 여기심 받음(칭의)와 거룩하게 됨(성화)이며, 이를 이중 은혜(이신칭의)라고 하였다.50) 그러나 칼빈의 후계자들은 칼빈의 의도와 달리 이신칭의에서 성화의 차원을 약화하거나 무시하였다. 요한 웨슬레는 개혁자들이 강조한 칭의를 통한 의화를 외면하고 무책임한 신앙으로 삶과 생활에 참 변화가 없는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거룩한 삶’을 개혁의 화두로 던졌고 이는 감리교가 생겨나는 배경이 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 역시 그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개혁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하여 지속되는 사건이어야 할 것이다.

         요사이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이머징 교회(Emerging Church)운동은 개혁전통의 교회들이 변화되고 있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어떤 영성과 교회를 추구할 것인가에 대하여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종교개혁 영성의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는 중세시대가 흘러가는 동안 교회가 갈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었고, 개혁의 새로운 모델은 신약성경 속의 초대교회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 점에서 개혁자들은 신약성경의 시대와 16세기의 지평을 융합하려고 시도하였다.51)  

        종교개혁 과정에서 있었던 관상전통과 관련한 여러 논쟁들은 그런 점에서 오늘의 상황에서 새롭게 성찰되어야 할 주제들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비판의 대상이었던 여러 논제와 대상들이 그동안의 과정을 통하여 스스로 자기변화를 진행하여 왔고, 그 변화된 내용에 대하여 오늘 개혁교회가 어떤 태도와 입장을 가질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가령 칼빈이 비판하였던 영적발전 단계에 대하여 중세시대 가지고 있던 기계적인 과정과 도식들은 현대 영성신학에서 이미 낡은 논제가 되었다. 신약시대부터 중세 초까지 영적 경험들(예를 들면 정화, 조명, 일치)에 대한 서술들이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십자가의 성요한에 와서는 ‘긴 어둔 밤’ 과 같은 긴 이행의 시기들로 뚜렷하게 구분되기 시작하였으며, 아빌라의 데레사에 이르러 건물의 방과 같이 더 체계적으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관심이 역동성으로 떠나 이론적인 단계와 예측 가능한 구조로 옮겨가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영적발전단계에 대한 구분은 히브리서 5:12 ‘너희는 음식이 아니라 젖이 필요하다.’는 표현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을 유아, 청년, 성인에 비유한 신약성서(고전 3:1-2, 에페4:13-16, 1요한 2:12-18 등)에 근거를 두고 이후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체험들에 의하여 발전된 것이었다. 52) 그러나 현대 영성신학에서 칼빈이 비판하였던 영적발전 단계에 대한 인위적 구분은 이미 낡은 주제가 되었다. 실재로 영혼의 성의 방들은 일곱 개로 나눈 아빌라의 데레사조차도 그 여정이 단순하게 직선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여정을 가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새로운 방을 들여다보고 전에 들어갔던 방을 다시 방문하면서 안에서 밖으로, 위에서 아래로 왔다 갔다 하면서 움직일 수 있다고 하였다.53)  

    영적 삶의 단계는 성(性), 성격, 인생의 단계, 연령과 무관하다. 따라서 각 개인을 고려하여 정확한 분별이 필요하며, 발전단계 역시 역동적이며 예측가능성보다는 불확실성이 우세한 신비의 영역이다.54)    

        개혁하는 교회는 변화된 시대와 세상에 새로운 모습으로 응답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의 무비판적인 요소들을 탈절대화 해야 한다. 개혁전통의 교회가 기초로 하고 있는 종교개혁은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문자문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교회를 만들어 냈으며,55)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철학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종교개혁을 통한 성경의 번역과 출판, 강해설교집의 발행과 보급 등은 당시 성직자들이 가지고 있던 진리에 대한 독점권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려주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제적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다른 한편에서 상징과 신비, 감성과 가슴의 신앙전통을 약화시키고 배제하는 현상을 만들어 내었다. 종교개혁 이후 일어난 여러 경건주의 운동은 이같은 경향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였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종교개혁 시기와는 다른 시대이며, 다른 요청 앞에 서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부모들의 종교, 역사적 제도적 충성보다 개인의 경험에 근거한 신앙을 추구하고 있다. 사상의 진보, 이성주의적 주석, 강해설교 등으로 대변되는 영성은 종교개혁 당시 일어나고 있던 새로운 문화에 초점을 맞추었던 응답이었다. 오늘의 영성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인쇄술의 시대에 적절하게 복음을 적용시켰다면 오늘 교회는 상징과 신비, 보다 깊은 경험적인 갈구에 응답하여야 할 것이다. 56)

         그런 점에서 개혁전통의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교가 공유하고 있는 초대교회의 전통, 사막교부들의 전통, 교회분열 이전의 풍부한 영성적 유산과 교파를 초월하여 영향을 주고. 받으며 축적하여 온 영적자산들을 오늘 우리시대의 영적 갈망 앞에서 새롭게 발견하고, 개혁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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