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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주의성공회와 대천덕 신부님 편지(펌)
  • 조회 수: 2153, 2007-12-10 13:25:09(2007-12-10)
  • 우리나라에 복음주의 성공회 교회(성당)은 없나요?


    우리나라에 도입된 성공회(영국국교회)는 KNCC에 소속되어 개신교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주로 로마카톨릭과 같은 예전을 중시하는 성향이 강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성공회 중에서도 주로 High Church(Anglo-Catholic)에 속하는 데요...
    그에 반해 영국의 존 스토트(John R.W. Stott) 목사님이 이끄시는 All  Souls Church 처럼 설교중심의 전형적인 복음주의 성공회교회(Low Church)는 우리나라엔 없는 건가요?
    몇해전 돌아가신 성공회 대천덕 신부님도 복음주의 쪽이였죠?
    또한 미국에서는 성공회(Protestant Episcopal Church)가 주로 High Church 쪽 인가요? Low Church 쪽인가요?



    의견 1
      
    복음주의 성공회교회에 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구요.
    미국 성공회는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최근 붉어져 나오는 동성애 문제를 보면 알 수가 있죠.
    대체적으로 성공회에서는 성직자 동성연애에 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반대에 까까움)을 보이고 있는데 미 성공회에선 성직자 동성연애에 있어서 수용쪽 입장으로 기울고 있어서 많은 기독교 언론에서 교단분열이 일어날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의견 2

    성공회 성직자(Minister)를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신부"로 칭하지만 미국에서는 "목사"로 부르죠? 영미문학에서도 "교구목사"로 번역된 경우가 많더군요.~

    성공회는 사실 가톨릭처럼 하나의 단일교회가 아닙니다.
    모두 각각의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관구안에서도 그런 경향들이 혼재해 있다고 보아야합니다..

    우리나라 성공회는 독립된 관구가 아니므로 관구외 교구로서 캔터베리관구관할이지만 대체적으로 High Church라고 볼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 안에서도 사제의 성향에 따라 다르지만요...
    미국성공회(Protestant Episcopal Church)는 영국성공회와 달리 대체적으로 복음주의적인 Low church라고 볼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근본주의 보수주의 개신교와는 다른 동성애 인정 문제 등으로 좀 다르다고도 볼수있지요..
    최근 미국성공회의 수좌주교가 여성이 선출되고 동성애자주교임명으로 세계성공회의 보수주의파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있는 것을 보면 분위기가 Low church라고 할 수는 있습니다
    보수주의가 아닌 자유주의파라고 볼 수가 있겠지요...
    물론 모두가 그런 경향은 아니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성향이 강한 High Church와 보수주의 개신교단사이의 중간적성향이라고 보시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군요..

    그리구요. 대덕천 신부님의 성향은 오늘날의 한국교회와는 아주 많은 거리가 있음을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천덕신부의 성향을 Low Church성향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아래에 대천덕 신부님의 글을 보시면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존 형제에게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 습관에 대해 물어주신 형제의 편지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을 보고 당황하는 사람은 비단 형제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외국인으로서 또는 한국교회의 손님으로서의 우리들은 한국교회를 비난하는 일은 삼가야 만 합니다.
    우리들은 서구교회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앞서가는 한국교회의 장점들 즉 아낌없는 연보, 충실한 교회 출석, 기도의 열심, 교회성장, 전도 등을 보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한국교회의 장점들은 잘못된 점들과 비교하여 결국 상쇄시켜 버릴 수 없는 그런 좋은 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신부된 교회가 흠도 점도 없기를 원하시며(엡 5:27) 또 우리들은 그저 한국교회의 손님일 뿐 아니라 믿음의 가정의 한 식구요 한 형제자매인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한국교회에 칭찬할 수 있는 많은 장점과 함께 몇 가지 문제점들도 있음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알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산상보훈은 가장 많이 외치면서도 가장 적게 실천하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5장 6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고 하시면서 나아가서는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도다.”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16세기의 종교개혁 당시 개신교가 가톨릭 교회를 향하여 회개하라고 외쳤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개신교도 마찬가지 형편에 빠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나는 성경에 없는 전통이 성경에 덧붙여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경에 상치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생활에 대하여 모든 것을 일일이 지시하지 않고 다만 꼭 필요한 기본적 사항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인간의 삶과 예배에 대한 많은 부분들을 우리들의 창조력, 상상력에 맡기거나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도록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통은 성경과 상치되지 않으면서 성경이 허락하는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이 분명하게 거절하는 기초 위에 전통을 세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사단이 들어와 우리가 하고 있는 선한 일까지 악한 것으로 만들도록 기회를 허락해 주는 우를 범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해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산상보훈에는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데 우리는 이 가르침을 통하여 한국교회가 어떤 위험한 전통 위에서 있는지 살펴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먼저 구약의 말씀은 성취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마태복음 5장 17~18절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분명하고도 오류가 있을 수 없는 경제제도를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한국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토지제도를 극렬히 반대했던 대만이나 구라파의 교회와 비교하면 그래도 실수를 적게 한 편에 속합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쳐들어 왔을 당시 그들의 손아귀로부터 이 민족을 구한 1950년 4월의 토지개혁은 당시 가장 저명한 교회 지도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너무 늦게 실시된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이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나타내는 기독교 지도자들은 매우 적은 실정입니다.
    또한 성경의 가르침을 정면 마구도전하며 바알 신앙의 진수라고도 할 수 있는 부동산 투기와 관계를 맺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경! 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문제를 보고서도 전혀 무관심하거나 또는 얼토당토않은 것을 문제의 해결책인 양 신나게 변호하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외국인인 우리에게 큰 실망을 안겨 줍니다.

    잘못된 신앙습관

    마태복음 5장 37절은 거짓말하는 것에 대하여 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시록 21장 8절에서는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의 체면을 세워 주거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하는 거짓말은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진짜 경악케 만드는 것은 마태복음 6장을 읽고 난 뒤 이것을 한국교회의 신앙습관들과 비교해 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헌금과 구제하는 일을 가지고 나팔을 부는 것에 대하여 엄중하고도 분명하게 꾸짖으신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헌금을 한 성도들의 이름을 일일이 읽어 주고는 그들을 위해 특별 기도까지 드려 줄 뿐 아니라 또 교회 주보나 광고판에 액수까지 기록해 주기도 합니다.
    나는 이 습관이 서양의 선교사들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초기의 선교사들은 한국의 성도들에게 십일조생활과 자립생활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또 실천하도록 인도하기 위해 어떤 영적 분위기를 조성코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한국의 교인들은 이것을 잘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 결과 이름을 밝히고 특별히 기도를 해주는 방법을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전적인 비성경적인 습관들을 보고 금하기보다는 오히려 조장하고 부추겼던 우리 모두의 태도에 있습니다.

    우리는 또 계속하여 우리의 기도하는 습관이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과 어긋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공중예배에서 길게 기도하는 습관을 권장하고 남이 보는 곳에서 거창하게 기도하도록 사람들을 부추깁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좇아 골방에서 몰래 기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생각게 합니다.
    예수님은 또한 무의미하게 중언부언하는 기도에 대해서도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들 기도의 많은 시간이 중언부언하는 기도에 쓰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모범으로써 주기도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는데 이 기도문 중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사항이 ‘찬양’(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찬양의 노래’(찬송가)들조차도 그중의 대부분이 순수한 찬양이 아니라 무엇을 해달라고 바라는 것들이거나 또 순수한 찬양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즐겨 불려지지 아니하는 것들입니다.
    반면 우리들의 기도 가운데는 ‘오늘날 우리에게…주옵시고’라는 항목이 주기도문의 7가지 항목 중 거의 모두를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또 양식을 구하는 기도라 할지라도 ‘일용할 양식’(today's bread)을 구함에만 그치지 않고 두고두고 먹을 것과 그 밖의 생활에 필요한 것까지 구하여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소박한 간구를 크게 빗나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생활 중의 가장 큰 문제는 용서하기를 주저하는 마음(unwillingness
    to forgive)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는 수없이 되풀이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앞에 조건부로 붙인 사항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말씀은 전적으로 무시해 버립니다.
    사실인즉 주기도문은 오늘날 많은 한국교회에서 공동으로 불려지는 유일한 찬송인데 이 주기도문이 노래로 불려질 때 바로 이 부분의 가사는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것이 빠져 있다는 사실조차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얼마만큼 진지하게 수용하는가를 보여 주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사실 우리는 조금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은 주기도문의 7가지 간구 중 예수님께서 6장 14, 15절에 가서 다시 반복하여 가르치실 만큼 중요했던 간구의 내용이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 하시리라.”

    그리고 한국교회 신앙 관습 중 또 하나 외국인들을 경악시키는 것은 금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이란 은밀히 행하여 아무도 이를 알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자세하게 일러주셨습니다.
    나는 한국의 목사님들이 “신부님은 최고 며칠까지 금식해 보셨습니까?”하고 묻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나는 그런 질문을 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금식 경험을 자랑하려 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나만의 개인적인 비밀을 캐내어 예수님의 경고를 경멸하려 드는 그들의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이것이 샤머니즘이 미친 한 토막의 작은 영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즉 나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면 하나님께서 억지로라도 동정을 해주실 것이고 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 칭찬을 받으면 상당한 위로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금식한 것을 알아주면 그것이 우리가 받을 상의 전부이고 하나님께로 부터는 상이 없다는 말입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역시 많이 무시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을 공공연하게 정죄하는 일은 더더욱 널리 행해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어리고 믿음이 약한 평신도들이 마태복음 6장 19~34절에 나오는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각 교단들이 서로를 공공연하게 비난하는 일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내게는 그런 일들이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는 교훈,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오래 참으며 하나가 되라’는 사도 바울과 요한의 교훈,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다 하나가 되어서 세상으로 하나님의 믿게 하라’(요 17:21)는 예수님의 기도의 부탁을 무시하려는 의도로 보여 집니다.
    한국의 불신자들이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느냐고 물을 때 가장 자주 둘러대는 변명은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니 어느 교회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가슴이 아프긴 하지만 너무도 분명한 사실은 서로를 공공연하게 정죄했던 우리들의 아름답지 못한 자세가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소외시킨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우리가 심판 날 주님 앞에 서? ?될 때 우리의 실수로 길을 잃게 된 영혼들에 대한 추궁을 꼭 당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겔 3:18~21;33:6~8).

    성령께서 가르치신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로 보여 지는 것은 교역자들의 명칭이 아니라 소위 ‘정규 교육’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마태복음 23장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의 교훈에 대치될 뿐 아니라 성령님에 대한 가르침과 그분이 제자들에게 남기신 모범을 부정해 버리는 행위가 아닌가 합니다.
    또 그것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에서 가르쳤던 교역자의 안수 문제에 대한 성경의 구체적인 가르침들을 파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큰 교단들이 명시하는 자격기준에 의하면 12제자들은 물론 예수님 자신도 안수 받은 사역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정규 학교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육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유교의 영향으로 말미암은 토착화의 한 형태로 생겨났다는 사실을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선교사들은 또 한 번 책망의 무거운 짐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됨을 느낍니다.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불과 몇 주 만에 교회를 세웠고 그곳에 안수를 하거나 선출하여
    장로들을 세운 다음 자신은 제 갈 길을 재촉하여 떠났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성령께 의지하여 성도들이 성경을 읽을 때 그들의 마음을 밝혀 주시도록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생겨날 문제들에 대해 답을 해주기 위해 한두 번 내지는 세 번 정도 편지를 썼을 뿐입니다.
    그가 다시 교회를 방문하게 될 때는 겨우 며칠이나 몇 주, 아니면 길어야 몇 달을 머물렀을 뿐입니다.
    그가 세웠던 교회들에 대해서 그가 직접 통솔, 지휘권을 행사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다만 그는 각 지역에서 세움을 입은 지도자들을 통하여 성령께서 성도들을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도록 바랐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교사들은 사도 바울이 보여준 본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교회를 우리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두었고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우리 자신들의
    교육기관을 세웠습니다.
    우리들은 여러 모로 우리 서양의 문화보다 뛰어난 동양의 문화를 무시했습니다.
    우리들은 서양의 문화를 마치 기독교 그 자체인양 동일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서양의 문화는 기독교의 풍속을 훨씬 벗어나 인본주의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우리 서양의 문화는 7백 년 동안이나 기독교를 왜곡시켜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나빴던 것은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한국 교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했던 인도자는 외국 선교사인 우리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교만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갖고 놀아보겠다는 소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교인들은 자신들이 배워야 할 것을 잘 배웠습니다.
    학자와 학문을 숭상하고 노동을 천히 여기는 문화 속에서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성령께서 당신들을 가르칠 수 없으니 우리한테 배우시오.”라는 따위의 직접적인 말로 한국 교인들에게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백만 달러의 돈을 들여 교육 기관들을 세웠습니다. 모든 진리를 가르치는
    교육자는 성령이 아니라 바로 이런 학교기관들이라는 사실을 암암리에 심어 주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한 번도 회개를 하거나 사과를 하고 나쁜 인상을 고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는 분이심을 가르쳤어야 했을 터인데 대신 학교를 세워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양성하려고 했습니다.
    학교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학교나 학력을 너무 강조하게 되면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 준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교사의 자격으로 제시하는 것은 ‘잘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임을 기억합시다.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성령에 붙잡힌바 되면 완전한 교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르칠 수 있는 자질이 부족하고 우리의 전통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무력하게 만든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빕니다.†



    [신앙계 2005. 11월호]


    대천덕(1918~2002)

    성공회 신부 예수원 설립자. 1957년 한국에서 사역을 시작,45년간 한국과 한국 사람을 섬겨오다 2002년 8월 84세를 일기로 영원한 안식에 들었습니다.
    할아버지 R.A 토리 1세로부터 시작된 성령론과 헨리 조지의 원리에 토대를 둔 경제이론 및 공동체에 관한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산 그의 삶의 본과 함께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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