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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읽고 생각해 볼만한 글- 한국 기독교여, 다원주의의 도전을 받아들이라! (펌)
  • 한국기독교여, 다원주의의 도전을 받아라  


    김동춘(theol79) kimdongchun@hotmail.com
      

      20세기 중반 이후 현대기독교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점을 든다면 해방신학과 종교다원주의의 출현일 것이다. 해방신학은 백인 남성에 의해 주도된 유럽 중심주의의 신학적 리더십이 '역사의 밑바닥(underside of the history) 사람들에 의해 변방의 세계로 이전되었음을 통고하는 신학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해방신학은 기독교적 정체성의 범위 내에서의 위치이동이라면,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의 절대주의(absolutism)라는 영구불변의 아성을 깨고 기독교와 타종교사이에 가로놓인 루비콘강을 건너려한 충격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는 사실상 다원주의의 여러 파생적 개념의 하나일 뿐이다. 다원주의는 인식론적 다원주의, 윤리적 다원주의, 문화적 다원주의, 종교적 다원주의와 결부지어 사용된다. 따라서 다원주의를 곧장 종교다원주의라고 치부하려는 성급한 결론은 이 개념이 함축하고 있는 객관적인 이해를 놓치게 한다.

      그렇다면 20세기 현대기독교가 맞닥뜨린 가장 중요한 도전인 다원주의란 무엇일까?

      다원주의란 다양성, 다름,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세계이해이다. 다원주의는 나와 다른 인식, 나와 상이한 의견을 따르는 타자의 신념과 가치를 포용하는 관점이다. 그것은 인종, 계급, 종교, 이데올로기의 다름 혹은 차이에 대한 관용의 태도를 말한다. 현대적 정황에서 이 정도의 관점은 그리스도인에게 아주 생경한 사유방식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역사적 기독교는 철저히 반(anti)다원주의적이었다. 로마 카톨릭주의 패러다임에서 기독교는 세계를 '한 하나님-한 황제-한 교회-한 백성'이란 위계적 도식을 설정하여 세계 안에서 교회 자신을 '보편 교회'(Catholic Church)로 규정했으며, 세계 전체를 기독교 세계로 구성함으로써 그 어떤 이질적 세계도 용납하지 않았다.

      기독교적 획일주의와 보편주의는 사실상 다원주의의 시발점이었던 종교 영역과 세속 영역의 근대적 분화과정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비서구 세계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 선교역사가 사실은 복음화 이면의 타민족의 종교와 문화를 약탈하고 정복하는 십자군적 선교였음이 이를 반증해 준다.

      그 외에도 기독교는 유대인 문제에 대해 얼마나 반인종적 잔혹함을 보여주었던가? 유럽교회사에서 얼마나 많은 종교전쟁, 이단정죄, 그리고 마녀사냥이 주류적 정통교회와 정통교리의 이름아래 자행되었던가?    


    - 다원주의적 세계이해

      그런 점에서 다원주의 논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묻기보다 도리어 기독교가 세계를 향해 취했던 반다원적 태도를 되묻는 내부 고발적 반성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오늘의 세계가 더 이상 주술화된 악령의 힘에 의해 지배받는 신화적 세계가 아니라 초월적 간섭과 보호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한 탈신성화되었다는 세속화적 세계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근대 계몽기적 사유에 따르면 우리의 신앙적 태도와는 별개로 자연의 자기법칙 안에서 '세계는 하나님 없이 굴러간다!' 적어도 세계는 기독교 세계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반하는 이성의 작동원리와 자연법과 도덕적 규범아래 살아가는 비종교적 '다른 세계'가 있다.
      따라서 다원주의적 세계이해가 결여된 통속적인 '기독교 세계관'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 주권의 일방적인 실현을 믿는 기독교세계관 논리의 다른 한편에는 정치, 경제, 예술, 종교 등 제 영역 사이에 침해당할 수 없는 영역의 독립성과 고유성을 주장하는 '영역주권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영역주권론에 따르면 종교라도 정치나 경제 등 다른 영역을 침해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론은 정교분리(政敎分離)의 맹아로부터 세분화된 다원주의적 정치철학이자 세계관이다.  
                

    - 한국기독교는 다원주의를 배워야 한다

      다원주의는 이미 한국기독교에게 현실로 다가온 문제이다. 장승이나 단군상을 건립하였다 하여 이를 비합법적인 방식을 동원하여 파손하는 행위는 종교다원적 사회상황을 망각한 행위이다. 다원주의적 사고가 결여된 세계관은 쓰나미 해일 참사를 이슬람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해석하여 고통당한 자들의 아픔을 동감할 수 없는 잔인한 종교가 되고 만다. 공중집회에서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나이다"라고 했던 이명박 서울시장은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 다원사회의 현실에서 충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던 것이다.

      제자직(discipleship)과 시민직(citizenship)사이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때로는 시민적 직분을 고려해야 한다. 축구선수 박주영이 골을 넣고 기도하는 감격적인 장면조차 네티즌들이 문제 삼을 정도로 이제 우리 사회는 개인의 신앙적 신념과 종교다원적 현실은 곳곳에서 충돌하고 있다. 물론 이 경우 개인의 종교적 신념조차 관용적이지 않은 우리 사회의 태도를 비난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는 다원주의에 대한 균형 잡힌 학습이 필요하다. 종교적이든, 윤리적이든, 문화적이든 모든 종류의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용의 정신이 요구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다원주의라 하여 본인이 따르고 있는 기독교적 인식론과 윤리관, 종교관마저 포기해야 하는 투항적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관용이란 이 사회 안에는 기독교인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도, 유교도, 이슬람교도, 무신론자도 공존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 다시 말해 최소한 '다원주의적 사실'만큼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원주의적 삶의 태도란 우리의 가치관과 종교적 정체성을 견지하면서도 다른 사람들과의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한 상호인정의 틀을 만드는 것이다. 다원주의에 대해 열린 자세란 우리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단념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들의 사고와 삶의 방식, 그들의 종교관을 인정하고 대화하려는 소통적 태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이라든가 기독교적 가치와 신념을 포기하는 허무주의나 무정부주의적 태도만이 다원주의의 귀착점이라는 섣부른 판단은 중지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적 확신을 절대적 신념체계로 신봉할 수 있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다원주의라 하여 기독교적 특수주의(particularism)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다원주의가 아니다. 자신의 신념체계와 고유한 정체성마저 포기하는 다원주의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형성된 가치관과 윤리의식, 그리고 문화적 전통과 종교적 특수성을 평균화하는 보편주의와 획일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다.

      다원주의는 그것이 종교적, 윤리적 신념체계이든 여하한 특수성(particularity)과 정체성(identity)의 포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상호 인정과 존중이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 비판이 최고조에 다다른 지금 기독교가 타종교와 타문화를 향해 자행한 패권주의적 행위도 비판해야 하겠지만, 기독교를 향한 역차별로부터도 보호막이 필요하고 존중감도 요청된다고 믿는다.  


    - 모든 관용은 최고선인가?

      우리 기독교의 비관용적 처사에 대해 뼈아픈 반성이 필요하다. 관용은 다원주의 시대에 필요불가결하고 우선적인 덕목이다. 그러나 관용은 언제나 최고선인가? 인간을 신의 제물로 바치는 종교행위를 다원주의적 관용으로 용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해석의 다원성을 빌미로 이방민족을 진멸하라는 예외적인 성경기사를 이민족의 학살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없다. 다원주의에도 인류사회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 규범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용은 무제한적 관용이라기보다는 그 범위에 한계를 긋는 선별적인 관용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원주의 시대를 사는 한국 기독교의 고민을 함께 해나갈 필요가 있다. 이 고민은 에큐메니컬 단독의 전유물도 아니고, 복음주의자들이 우려만 할 것도 아니다. 그런 모색과 논의의 열매를 공유하는 것이 절실한 시기에 우리 모두는 와있다.

    김동춘/ 현대기독교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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