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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승룡신부님에 관한 한겨레신문 기사 - 참 아름다운 삶!
  • 임 신부님,

    그분은 이 시대의 성자입니다.
    함부로 따라할 수 없는 "작은" 성자입니다.
    그분 앞에서면 머리가 숙여집니다.


    성공회인 wrote:
    13년째 재활용품 모으는 신부님

    “에이, 무슨 별 일이라도 한다고. 말리지야 않겠지만 취재할 게 뭐 있어. 달리 할 일이 없으니까 하는 거고, 시간이 남으니까 조금 도와주는 거지.”
    그가 일러준 서울 국립보건원 뒤쪽 은평구 녹번동 4번지와 5번지 일대는 북한산 자락의 산밑 동네였다. 여기저기 재개발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걸 보면 달동네임이 분명했다. 골목은 복잡하지만 라면박스와 신문지 따위가 잔뜩 쌓여있는 집이 바로 그의 집이니 찾기는 쉽다.

    성공회 은퇴한뒤 작은 손수레 끌고 모았다
    옷박스 8784상자
    빈병 15만5000개
    신문·고철은 셀수도 없을만큼

    임승룡 신부는 성공회 옥수동 교회에서 봉직하다가 13년전 은퇴했다. 그가 퇴직금으로 받은 것은 2700만원 뿐. 부인이 틈틈히 모은 돈 2000만원을 얹어 지금의 연립주택 지하 방을 샀다. 방으로 내려가는 비좁은 계단에도 벽쪽으로 신문지와 박스가 잔뜩 높이로 쌓여있다. 채 12평도 안 되는 그의 집 안도 마찬가지다. 시계 우산 라디오 등 온갖 중고품들로 가득하다. 주워다 고쳐논 것들로, 새 주인을 기다리는 중이다. 부엌방에는 주스 빈병이 나란히 서 있다. 나눔의 집, 우리마을, 구리복지관 등 재활 봉사시설의 이름이 써있다. 저금통이다.

    김성수 성공회대 총장과 동기

    그가 작은 손수레를 끌고 녹번4,5번지 일대를 돌아다니며 재활용품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퇴임하고 1995년부터였다. 퇴임후 한동안은 아이들 뒷바라지 때문에 부인이 하는 바이아스 공장에서 일했다. 여학생 옷깃에 대는 여러 색깔의 띠를 만드는 봉제공장이다. 부인은 30년 전부터 이 일을 해왔다. 아이들이 출가한 뒤 ‘돈은 없지만 몸은 건강하고 시간도 남으니, 몸으로 하는 봉사라도 해야 겠기에’ 재활용품 수집에 나섰다.

    그동안 재활용 옷만 라면박스로 8784상자를 수집해 나눔의집이나 행려병자 재활기관 등에 보냈다. 대개는 쓸만하다. 일부 헤진 것은 부인이 수선한다. 1개에 20원 하는 빈병은 15만5천개 정도를 모았다. 5천개 단위로 팔아 10만원이 모아지면 가난한 교회에 보냈다. 벌써 31번째다. 1톤 트럭 한대 가득 실어야 3-4만원에 불과한 신문(1관에 40원)은 두달에 한번씩 용달차가 와서 가져간다. 집 뒤의 빈터에 수집해두는 고철까지 합치면 두달에 8~9만원 정도가 모인다. 이렇게 모은 돈은 용처가 정해져 있다. 매달 나눔의 집에 3만원, 장애인 자활센터인 우리마을에 1만원, 구리복지관에 1만원씩 보낸다. 시계나 라디오 우산 등은 깔끔하게 고쳐 교회나 봉사기관에 보낸다.

    그렇게 모아 보냈다
    나눔의 집에 재활기관에
    가난한 교회에‥

    이제 동네 사람들은 임 신부가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출근하는 길이나 등교하는 아이들의 손에 들려 그의 집 앞에 놓고 간다. 물건이 많을 땐 전화를 걸어와 알려주기도 한다. 이제 녹번동 4,5번지 일대에는 재활용품 수집함이 없어졌다.

    재작년엔 옥수동 교회에 증축 헌금으로 1천만원을 냈다. 바이아스 공장에서 일하며 마련한 노후자금이었다. 가난한 임 신부가 쾌척하자 교회 신도들이 나섰고, 교회는 10여년 꿈꿔오던 것을 불과 1년만에 해결할 수 있었다.

    소리없이 우리곁에 있었던  할아버지 천사

    임승룡 신부님을 아세요?

    그의 이런 삶은 성공회 안에선 전설처럼 나돈다. ‘옥수동에 어떤 퇴임한 신부가 있는데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혹은 ‘그분이 아마 퇴임 주교라고 하던데…’ 혹은 ‘대전 교구 소속 같던데…’라고도 한다. 그는 성공회대학교 1기생으로 김성수 성공회대 총장과 동기동창이고, 옥수동 교회에선 그가 10여년 봉직했으니 그럴만도 하다.

    “나는 6.25때 살던 대로 사는 게 신조야. 무엇이든 덜 먹고 아껴 쓰고, 다시 쓰는 거지. 길에 떨어져 있는 사탕이나 과일이라도 6.25때를 생각해 가져다가 먹지. 신발도 옷도 안 사. 주운 것 손질해서 쓰지.” 그가 집에서 쓰는 돈이라곤 쌀값과 공과금뿐이다. 주말이면 자식들이 막장 된장 고추장은 물론 밑반찬 등을 가져온다.

    9시까지 두시간 정도 동네를 돌고나서 9시반 아침을 먹는다. 점심은 거른다. 퇴임 후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다. ‘하는 일도 없는데 꼬박 꼬박 밥 찾아먹을 일이 뭐 있어. 두끼만 먹어도 건강하기만 한데.’ 식사를 한 뒤 한 시간 정도 낮잠을 잔다. 78살의 나이에 5시에 일어나 묵상하고 집안 청소하고 동네 한 바퀴를 돌고나니 아무래도 힘이 부친다. 원기를 회복하면 수거해온 물건들을 정리하거나 수리하는 작업을 한다. 시간이 남으면 부인이 일하는 공장(빌라 뒤쪽 개인주택에 딸린 조그만 별채)으로 가서 부인의 일손을 돕는다.


    “6·25 살던대로 사는게 신조야”

    “지난 2002년에 한번 고혈압으로 쓰러졌어. 그러나 1주일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 하느님이 일 더하라며 회복시켜준 거지. 그뒤 혈압약을 먹긴 하지만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 아이들은 그만하라고 성화지만, 아직 움직일 수 있으니 몸으로 할 수 있는 봉사는 해야지.”

    그는 평양사범 출신이다. 해방되던 해부터 여학교 선생님을 하다가 1.4후퇴 때 4살짜리 여동생만 데리고 남쪽으로 피난왔다. 여동생을 성공회 수녀들이 운영하던 고아원에 맡기고 군(해병대)에 입대했다. 4년8개월만에 제대한 그는 동생이 머무는 고아원에 머물며 막 일을 했다. 그의 일 솜씨를 눈여겨본 수녀들의 추천으로 그는 성 미카엘 신학원에 입학해 64년 성공회대 1기생으로 졸업하고 신부 서품을 받았다.

    곽병찬 기자 chankb@hani.co.kr

댓글 1

  • 김장환 엘리야

    2004.12.06 07:12

    닮고 싶고 따르고 싶은 선배 신부님!
    교우 여러분, 기도해 주세요.
    작은 예수의 삶을 살아 가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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