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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장소 (1) - 퍼온 글

  •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장소(1)


                                                                              진 에드워즈 著
                                                                               “하나님의 생명 체험하기”(The Highest Life)
                                                                              (생명의 말씀사 발행)에서 발췌저


    우리의 생명이 아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구체적인 장소,
    즉 좀더 깊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장소가 존재합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장소입니다.
    그 장소를 떠나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도 없고 그런 삶을 배울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새 인류가 처음 출현했을 당시
    그들은 자신의 본성에 적합한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곳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곳을 잃은 채 살아왔습니다.
    그 바람에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오순절 이후 약 3백년이 지나면서 우리는 그 거주지를 잃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매우 오래 전의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우리 그리스도인은 마치 에덴 동산을 잃은 아담처럼 우리의 거주지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대부분은 이 슬픈 사건을 알지 못합니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거주지의 상실로 인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이 미치게 되었는지에 대해 전혀 무지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거주지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구상의 생명체 가운데 거주지를 잃어버린 유일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거주지를 되찾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엄청납니다.
    우리는 불행히도 타락한 인간의 거주지에 정착했습니다.
    더욱이, 사람들은 우리의 고유한 거주지가 아닌 곳을 마치 우리의 고유한 거주지인 양 선전합니다.
    우리는 현재 거하고 있는 이 인위적이고, 불편하고, 생명력이 없는 곳이
    우리의 고유한 거주지라는 잘못된 정보에 날마다 시달리고 있습니다.


    가장 높은 생명으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고유한 거주지로 되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원 후 1, 2, 3세기에 살았던 신자들의 경우에는 지금과 상황이 매우 달랐습니다.
    초기 신자들이 살았던 거주지를 요즘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당시 신자들의 경험이 지니는 의미를 설명해 줄 용어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때 그러한 용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본래 의미가 완전히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그 용어를 사용하면 오히려 의사소통의 문제가 더 커질 정도로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초기 신자들의 경험과 그들의 거주지를 설명하려고 할 때, 그 용어를 더 이상 사용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다른 용어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 낸 용어들은 모두 부적절합니다.)


    초기 신자들의 거주지에 관해 알고 싶으면,
    고유한 거주지를 갈망하는 우리 내면의 영적 본능에 귀를 기울이면 됩니다.
    그러한 영적 본능이 우리 안에 지금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만일 고유한 거주지를 발견하기만 하면 그러한 본능이 표피를 뚫고 나오게 될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거주지는 잃어버리기 전에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세기에는 신자가 된다는 것과 거주지에 산다는 것이 동일한 의미였습니다.
    거주지에 거하는 자체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이 세상과 구별된 존재라는 사실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의해서만 알려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개인이 변화되는 것만으로 끝난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나 신자들이 볼 때,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구별해 준 것은
    그들이 모여 사는 방식이었습니다.

    초기 신자들과 그들의 거주지는 이렇듯 하나였습니다.
    신자들끼리 무리를 지어 공동체적인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 불신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았습니다.
    신자들의 그러한 모습은 불신자들이 보기에 매우 신비롭고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로 인해 불쾌한 마음을 갖는 불신자들도 많았습니다.
    구원받은 신자들의 거주지는 그때까지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그런 신자들의 모습에 흥미를 느끼기도 하고, 노골적으로 증오를 표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초기 신자들의 거주지는 어떤 모습이었는가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오히려 거주지가 아닌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 나을 듯 싶습니다.

    초기 신자들의 거주지는 세상을 피해 산이나 광야와 같은 곳에 들어가
    타락한 문명으로부터 자녀들을 보호하고, 유기농법으로 채소를 재배하고, 수염을 길게 기르고, 바닥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사는 식의 생활을 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초기 신자들은 폭동이나 범죄, 인간의 죄와 타락한 문명으로부터 도피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생각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타락한 인간 사회 한복판에 거주지를 건설하고 문명을 무시하고 살았습니다.


    문명이란 타락한 인간의 모든 체제가 연합해 표출되는 국제적 현상입니다.
    개인은 그러한 체제 속에 갇혀 전적으로 체제 의존적인 삶을 살면서도,
    그와 동시에 서로 독립된 개체로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는 매우 역설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자들의 거주지는 국가적 혹은 국제적인 연합을 통해 건설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거주지는 지역적인 특성을 지녔습니다. 전적으로 지역적인 모임이었습니다.
    신자들은 가끔 다른 곳에서 온 신자들과 교제를 나누었을 뿐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서로를 의존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매우 가까웠으며 지극히 친밀했습니다.
    그들의 교제는 마치 당밀처럼 끈끈했습니다.
    특별한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과 서로를 의지했습니다.

    그들의 거주지는 24시간 쉬지 않고 가동되었습니다.
    서로를 향한 배려와 사랑이 늘 충만했습니다.
    놀라운 영적 경험도 있었습니다. 날마다 그런 삶이 계속되었습니다.
    각 신자의 삶 속에, 그리고 모든 신자들 가운데 내주하시는 주님을 언제라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잃어버린 그와 같은 경험을 묘사할 수 있는 용어를 찾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삶을 묘사할 만한 적합한 용어를 찾을 수 없습니다.
    “모임”, “회중”과 같은 용어를 더러 사용하기도 하지만 전혀 부적절합니다.
    또는 “기독교 공동체”나 단순히 “공동체”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초기 신자들의 거주지를 묘사하기 위해 “에클레시아”라는 본래 단어를 그대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단어를 번역하는 순간 온전한 의미 전달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여하튼 우리의 고유한 거주지는 지금까지 우리가 줄곧 경험해 온 것과는 다릅니다.
    주일 아침에 한 시간 동안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고유한 거주지가 될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신자들이 그들의 거주지에서 밀려나 국가의 지원 아래 지어진 건물 속으로 들어간 순간(콘스탄틴 황제 이후), 에클레시아의 의미는 철저히 왜곡되었습니다.
    매 주일 서로 한 번씩 얼굴을 보고, 잠시 함께 있다가 헤어지는 것이
    에클레시아의 의미인 양 곡해되었습니다.
    이는 초기 신자들이 이해했던 에클레시아의 삶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매 주일, 약 한 시간 동안 엄숙한 예배를 드린 후,
    나머지 6일과 23시간 동안 타락한 인간의 문명 속에서 사는 것은
    초기 신자들이 이해한 에클레시아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공동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 자신이 곧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거주지는 하루 24시간, 일년 내내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거주지를 되찾을 수 있을까 하는 커다란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그리스도인의 생명으로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장소(2)를 반드시 읽어 주세요

댓글 1

  • 김장환 엘리야

    2004.08.21 21:39

    꼭 읽어 주세요.

    '성령의 코이노니아'가 크리스챤들의 거주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 교회가 그 본질을 회복해가기만을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제자교회 형제 자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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