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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천덕신부님의 2주기에 (퍼온글)

  • ▲ 강원도 태백시 삼수동에 있는 외나무골 산골짜기를 20분쯤 가파르게 오르면 아담한 산장 山莊 같은 건물 하나와 문득 마주칩니다. 스위스의 라브리 L'abri처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예수원'이라는 공동체 겸 수도원입니다.
    "여기에는 자신을 위한 기도는 없습니다. 이웃과 사회를 위한 기도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원 설립자인 성공회 소속의 대천덕 戴天德 신부가 남긴 말입니다. 남을 위한 기도만이 참 신앙의 기도라고 믿었던 그는 "노동하는 것이 기도요, 기도하는 것이 노동"이라는 베네딕토 수사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대 신부는 언제나 "노동을 하되 하나님 섬기듯 정성을 다 하고, 기도에는 노동하듯 힘을 들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맑스와 엥겔스가 처음으로 공동 집필했던 책의 제목이 '신성가족 Holy Family'인데, 세계를 노동자 농민과 부르죠아지 계층의 사람들로 구분하고, 노동자 농민의 가족만이 거룩한 가족이라고 단정하면서, "노동이 기도요, 공장이 교회다"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공산주의를 '네 발로 기는 기독교'라고 야유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신랄한 비유는 아마도 이 선언을 겨냥한 것이 아닐까?

    ▲ 노동이 기도라는 말은 맑스와 대천덕 신부가 꼭 같이 말했지만, 그 뜻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맑스는 노동으로써 기도를 '대체 代替'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대천덕 신부는 노동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뜻이겠습니다. 놀랍게도, 노동 pala과 기도 palal는 히브리어로 그 어원이 같습니다. "땀흘려 일하라"(창세기 3:19)는 창조섭리에 순응하는 노동의 자세는 곧 창조주에 대한 기도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명이 토리 R. A. Torrey인 대천덕 신부는 1918년 중국 산동성에서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15세때 평양 외국인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고, 미국 데이비슨 남침례 신학교와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한 뒤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가, 1946년 성공회로 개종하여 사제 서품을 받고 미국에서 12년간 목회 활동을 했습니다.
    선원 생활과 건축노동 같은 서민들의 일상적 경험을 두루 섭렵한 대 신부는 1957년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 땅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성공회의 미가엘 신학원 원장으로 부임하여 근무하던 그는 손수 땀흘려 일하는 신앙공동체의 체험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1965년 외딴 산골 탄광촌에 예수원을 설립했는데, 12명의 노동자 농부들과 함께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해발 920m의 첩첩산중에 군대용 텐트를 치고 손발에 피멍이 들어가면서 공동체를 만들어 갔습니다. 부인과 함께 손수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텃밭을 만들어 채소를 가꾸면서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게 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 대 신부는 "반쪽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말씀과 축복의 홍수 속에 묻혀 사는 이 땅의 크리스챤들은 복음에 대한 지식은 많지만 복음의 선포를 그대로 순종하는 실천이 없는 반쪽의 신앙, 곧 불신앙 속에 빠져있다는 지적입니다. 이처럼 왜곡된 신앙에 반대하여, 후미진 탄광촌에 공동체를 만들고 광야처럼 척박한 땅을 손수 개간하면서 그 피땀어린 수확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과 나누는 개신교 수도생활의 실천적 모범을 보여 왔습니다.
    대 신부는 개인의 영성 靈性 뿐 아니라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한 프로그램도 꾸준히 개발해 왔는데, 특히 근로소득세를 폐지하고 그 대신 토지세를 올려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토지정의 土地正義에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대 신부는 역대의 거의 모든 대통령과 국회의원, 장관들을 찾아다니며 성서적인 토지정의를 강론하기도 했습니다.

    대 신부는 예수원의 공동체운동을 통해서 '신앙생활의 세 가지 실험'을 시도했습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인 기도 Prayer, 둘째 신앙인들 상호간의 관계인 친교 Koinonia, 셋째 신앙공동체와 비기독교 사회와의 관계인 선교 Mission입니다.
    하루 3시간의 기도, 7시간의 노동, 그리고 3시간의 침묵명상을 규칙적으로 지키는 예수원의 일과 중 매일 점심식사 전 30분과 월요일 저녁 2시간을 오직 남을 위한 기도의 시간으로 떼어놓고, 전세계의 가난한 이들과 난민 難民들, 병자들, 옥에 갇힌 이들,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 함께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기도로만 끝나지 않고, 나눔과 선교로 이어집니다. 대 신부의 선교관 宣敎觀은 거리나 지하철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팻말을 휘둘러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의의 탁류에 휩쓸려 가는 사회를 향하여 정의를 강물처럼(아모스 5:24) 끊임없이 흘려보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선교적 신념이었습니다.

    ▲ 예수원의 정회원이 되려면 2년의 수련기간을 거쳐야 하는데, 정회원들은 다시 손님부 가정부 시설부 출판부 교육부 농장부 등으로 나뉘어 역할을 분담해야 합니다. 남자들도 여자들과 꼭 같이 취사와 세탁을 맡습니다.
    예수원에는 어린이를 포함하여 70여명이 함께 생활하면서 하루 세 번의 기도와 묵상·대화·독서 등으로 영성 靈性을 수련하고, 목장 일과 공예 등의 노동을 통해서 자급자족의 검박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데, 매년 만 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2박3일 동안 이곳을 찾아 대 신부의 말씀을 듣고 영적 감화를 받습니다

    목장과 텃밭에서 땀의 가치를 확인하며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이들의 마음은 대 신부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에게는 태산처럼 엄격한 반면, 다른 사람에게는 바다처럼 너그럽습니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인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만,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에게는 불의가 없다"(요한복음 7:16∼18). 자신이 가장 아꼈던 요한복음의 말씀처럼, 대 신부는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늘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모든 성공이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게 하시고, 모든 영광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소서. 그리고 제가 해야 할 모든 일을 마쳤을 때, 나는 무익한 종이라는 것을 알게 하소서."

    ▲ "돈을 사랑하면 남을 사랑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 평생을 청빈과 나눔으로 일관한 대 신부는 늘 '신앙은 모험'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자기 중심의 세계를 탈출하여 하나님 중심의 새 세계에로 진입하는, 그래서 욕망의 노예로부터 진리의 자유인으로 전환하는 신앙은 분명히 하나의 모험입니다.
    루이스 C. S. Lewis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행복해지려고 종교를 찾은 것이 아니다. 그런 행복은 와인 한 병으로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안락함을 느끼기 위해 종교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결코 기독교를 권하지 않겠다"고. 신앙의 길은 안락하고 평탄한 길이 아니라 좁고 험난한 영적 모험의 길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습니다.

    대 신부는 이 영적 모험의 길을 이런 기도와 함께 꾸준히 걸어갔습니다. "매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소서. 해서는 안 되는 일, 변화시킬 수 없는 일들은 하지 않게 해주시고, 해야 할 일과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는 용기와 열심을 주소서. 그리고 그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주소서. 죄를 생각할 때 슬퍼하는 마음을 주시고, 주님을 생각할 때는 기쁨과 평안이 가득하게 하소서. 좌절하거나 무거운 짐을 질 때, 배반당하고 다른 사람의 반대에 부딪쳐 괴로울 때, 나로 하여금 오래 참으며 견디게 하소서."

    ▲ 1995년 공동체 운영권을 후진들에게 물려준 노 신부는 항상 "죽어서도 여기 묻히겠다"고 말해 오다가, 2002년 8월 6일 마지막 숨을 거두고 그의 말대로 강원도 태백의 산골짜기 예수원 안에 그 뼈를 묻었습니다. 평생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며 한시도 기도를 잊은 적이 없는 대 신부는, 신앙인격의 모범과 삶의 귀감 龜鑑을 찾아보기 어려운 오늘 이 땅에 참으로 보기 드문 성자 聖者의 발자취를 뚜렷이 새겨 놓았습니다.

    '예수원 이야기'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개척자의 길' 등 영성의 문을 두드리는 몇 권의 저서 외에는 개인적 유산을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노 신부는 멋진 유언 遺言 또한 한 줄 남기지 못했지만, 예수원이라는 거룩한 산지 山地와 함께 언제까지나 잊혀지지 않을 소중한 마지막 한 마디를 우리에게 남겨주고 갔습니다. "먼저 쉬러 가겠다."
    80일 동안의 깊은 잠에 빠져들기 직전, 아들 대영복 신부에게 남긴 말 그대로 그는 우리보다 먼저 저 영원한 안식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부끄러움과 그리움의 긴 탄식을 대 신부님이 묻힌 태백 땅으로 띄워보냅니다.


    http://www.shareplaza.com/technote/main.cgi?board=woo
    극동방송 칼럼 "광야의 묵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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