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하프타임을 가집시다(폄)
  • 조회 수: 1522, 2003-12-21 19:08:59(2003-12-21)
  • Han's Letter]하프타임을 가집시다  

    얼마 전 대기업에 다니다 그만둔 임원을 만났다. 몇 년째 재취업이 안되다 보니 몰골이 말이 아니다. 얼마 안 되는 사이에 폭삭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하면서 지내느냐고 묻자 이것저것 해보았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다면서 한숨을 쉰다. 식사를 하면서 그의 얘기를 들었다.

    “저야 완전히 회사 인간 아닙니까? 해외 근무를 많이 하다보니까 한 번 올 때마다 애들이 달라져 있는 겁니다. 국내에서 근무할 때도 거의 회사에서 살다시피 했지요. 처음에는 집사람과 애들이 저를 보고 싶어하고 집에도 좀 일찍 오라고 성화를 부리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과 아버지가 없는데 익숙해지는 것 같더군요. 그래도 회사 다닐 때는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니까 별 문제가 없었는데 은퇴 후에는 저라는 존재 자체가 효용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사를 그만 두고 초기에는 가족들이 그 동안 고생했다면서 잘해주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재취업이 안되어 집에만 있었더니 집사람의 잔소리가 심해지는 겁니다. 주된 이유가 제발 외출 좀 하라는 겁니다. 24시간 어쩌면 집구석에만 있냐는 거지요. 저도 나가고 싶지만 나갈 때가 없더군요.

    회사 다닐 때는 그렇게 갈 때가 많고 바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회사를 나오고 보니 아는 사람도 전부 업무에 관련된 사람 뿐이예요. 회사를 그만 둔 후에는 만날 일이 없는 거지요.

    예전에 친하던 친구들은 하도 오랫동안 연락을 안하고 지내다 보니 다 멀어졌구요. 또 사람 만나는데는 돈이 드는데 그런 것도 부담이 되구요. 정말 저는 잘 살지 못 한 것 같습니다. 회사에만 목 매고 살다 보니 너무 준비가 없었네요.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나 하는 자괴심이 듭니다.”

    그 얘기를 하는 동안 그는 목이 매이기도 하고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 중년 남자의 고백을 들으며 이러한 일이 그 분에 국한된 일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이 시대를 사는 대부분 남자들의 고민이며 어떤 형태로든지 해결책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 50대 중반에 회사를 명예 퇴직한 아저씨들을 “오찌누레바”라고 부른다. 오찌누레바란 “비에 젖은 낙엽”이란 뜻이다. 비에 젖은 낙엽이란 것은 아무런 효용성은 없지만 달라 붙는 특성을 갖고 있다. 갈 때가 없으니 부인에게 달라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만큼 중년에 회사를 그만 둔 아저씨들은 비참하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이혼 중의 삼분의 일이 황혼 이혼이라는 것이 그 증거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때까지는 같이 살아주지만 그나마 효용성이 없어지면 헤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신세가 되는데는 가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못한 아저씨들의 잘못이 무엇보다 크다.

    하지만 회사 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가정과 회사 사이에서 균형을 지키며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 것이다.

    나의 주 고객은 40세 이상의 아저씨들이다. 리더십, 조직과 개인의 성공, 자기개발 같은 것들에 관한 강의와 워크숍을 진행하다보니 자연스레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들과 워크숍을 하면서 늘 느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있다는 것이다.

    즉, 몸은 이 곳에서 강의를 듣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을 헤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배워봐야 뭐하겠나' 하는 허무감이 짙게 묻어 나온다. 쉬는 시간에 주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하고 물어보면 나이가 든 분일수록 여지없이 “은퇴(retirement)"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제가 앞으로 회사 생활을 해봐야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리더십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언제까지 이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또 은퇴 후에는 뭘 먹고 살아야 하나 하는 걱정을 늘 하지요.“

    맞는 말이다. 나 자신 대기업에서 임원 생활을 하면서 늘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그런 이슈였던 것이다. 동료들과 다음 해 회사 사업 계획을 짜면서 “회사의 장기 계획은 있는데 내 자신의 장기 계획은 없다”며 씁쓸히 웃던 기억도 난다.

    게다가 지금 세대의 아저씨들은 가정과 친구보다는 회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이 대부분 인만큼 회사를 떠난 자신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많다. 늘 회사와 연계해서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 분 모두에게 하프타임(halftime) 갖기를 권한다.

    전반전에 골을 집어넣고 후반전에 그 골을 지키기 위해 아둥바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이다. 전반전이 성공이란 목표를 위해 땀을 흐리는 시기라면 후반전은 의미를 찾기 위한 새로운 여정이 되어야 한다.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나는 누구이고,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고, 죽을 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냐...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고, 가고 싶은 곳은 어디이고, 하루하루 즐거운 마음으로 살고 있느냐...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친구로서, 이웃으로서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균형이 깨진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프타임 때 남은 삶을 바칠 수 있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고달픈 직장 생활도, 은퇴하는 것도, 나이 드는 것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거란 생각을 해 보았다.

댓글 0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385 박동신 1299 2003-12-23
이병준 1522 2003-12-21
383 (엘리아)김장환 1786 2003-12-21
382 임선교 1466 2003-12-19
381 (엘리아)김장환 1448 2003-12-19
380 이필근 1177 2003-12-19
379 구본호 1325 2003-12-18
378 전미카엘 1586 2003-12-18
377 (엘리아)김장환 2288 2003-12-12
376 임용우 1658 2003-12-11
태그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