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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년 10월 23일] 마태 22:34-46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
  • 청지기
    조회 수: 1530, 2011-10-26 15:54:03(2011-10-26)
  •   오늘은 십계명을 통해 죄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십계명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이 주신 삶의 지침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십계명을 해석하면서 613가지나 되는 또 다른 율법을 만들어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이 율법들은 248개의 ‘하라’는 적극적인 계명과 369개의 ‘하지마라’는 소극적인 계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많은 계명과 율법들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한가?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인가? 하는 토론을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논란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이 질문을 합니다. 36절,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분명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명쾌하게 가장 큰 계명,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37-38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고,
      십계명 중 1-4계명입니다.
      39,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십계명 중 5-10계명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한 말씀을 더 하셨습니다.
      40,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모든 율법과 예언서라는 말은 성경 전체를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성경 말씀의 골자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골자라는 말은 영어 ‘hang on’이라는 단어로 그 의미가 ‘-에 결정되다. 달려있다.’는 것으로 이 두 계명이 성경의 결론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대답을 통해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열심히 율법을 지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도전하십니다.

      ‘너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율법을 공부하고 지키기에 애를 쓰는데, 정작 말씀의 본질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예수님의 특징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여러 가지 의도로 가지고 질문을 할 때마다 예수님은 대답을 통해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시는 질문을 하십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는 지난 주일의 답변을 보십시오. 역으로 던지는 질문입니다.
      ‘진정 너희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사는가? 너희의 삶에 하느님만이 주권자이신가? 너희의 왕이 하느님인가?’
      
      오늘 복음에서도 ‘너희가 성경의 결론이 되는 신앙의 본질, 사랑을 살고 있는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도전하시는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우리도 늘 듣는 설교, 매주 드리는 예배, 봉사 등 반복되는 신앙생활 하면서 정작 본질이 되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은 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신앙의 행위만 남아 바리사이파사람처럼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 모두가 성경말씀의 결론, 신앙의 본질인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회복되어 주님이 바라시는 풍요로운 삶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럼 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위대하고 첫째가는 계명이라고 하시는 걸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아기들은 엄마의 눈빛을 보며 자라난다고 합니다. 엄마의 눈빛을 통해 전해지는 엄마의 관심, 사랑을 먹으면서 크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사랑이 결핍되면, 건강한 인격적인 성장이 불가능해 집니다.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왜곡된 사랑을 받게 되면, 몸은 크지만 마음은 작은, 내면에 결핍이 있고 상처가 있는 성인아이가 됩니다.

      현대사회의 무서운 질병인 우울증, 나아가 여러 가지 성격 장애나 인격 장애, 그 원인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이 사랑의 결핍입니다.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거나, 왜곡된 사랑을 공급받아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내 지치고 포기합니다. 또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감정과 욕심을 쏟아 붓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언제나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레미야애가 3:22-23,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오늘 우리는 십계명을 묵상하며 이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실로 지은 죄, 의무를 소홀한 죄가 너무나 큽니다. 하느님이 그 죄를 심판하신다면, 다 죽음을 면치 못할 인생들입니다.

      로마서 13:8-10,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탐내지 마라.’ 한 계명이 있고 또 그 밖에도 다른 계명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이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 모든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결갈은 사랑으로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먹구름이 잔뜩 드리운 날씨일지라도 구름 너머에는 태양이 빛나고 있듯이 하느님은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느님 사랑의 눈으로 어느 때나 너를 바라보시고
       하느님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 너에게 귀 기울이시니“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도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두었던 눈을 들어 주님의 눈에 눈맞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닌 것에 주던 눈길을 돌려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눈에 눈을 맞추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개라고도 합니다.

      1260-1327년 독일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사제 에크하르트의 말 -  “사람들은 진심으로 회개하려면 굶거나 맨발로 걷는 것과 같은 특별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최상의 참회는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 안에 있든 다른 피조물 안에 있든 간에 하느님 외에는 가치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든지, 무엇을 기뻐하든지 그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 가득찰 수 있도록 끊임없는 사랑으로 하느님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종교개혁자 루터가 강아지에게 고기를 주려고 할 때였습니다. 강아지는 입을 크게 벌리고 주인이 주려는 고기 덩어리를 올려다보며 두 분을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루터는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강아지가 고기 덩어리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이 강아지의 생각은 오직 한 조각의 고기 덩어리에만 집중되어 있고 다른 잡념이나 희망은 천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면 우리 삶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엄마의 품에 안겨 엄마의 젖을 빨고 엄마와 눈을 마주치는 아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엄마에게는 그 이상의 행복이 없습니다. 아기는 엄마의 눈빛을 통해 사랑을 먹으면서 건강한 인격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바로 이런 행복과 건강한 성장이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함으로 우리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심령에 일어나는 주님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눈에 내 눈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차오르게 됩니다.
      
      이 놀라운 영적인 비밀을 알았던 하느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편 27:4, “야훼께 청하는 단 하나 나의 소원은 한평생 야훼의 성전에 머무는 그것뿐, 아침마다 그 성전에서 눈을 뜨고 야훼를 뵙는 그것만이 나의 낙이라.”
      
      우리에게 있어 하느님께 눈을 돌려 하느님을 바라보는 삶의 시작은 하느님을 만나는 구별된 장소와 시간을 갖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는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는 어느 틈엔가 그 군중을 빠져나와 둘만이 있을 수 있는 한적한 곳을 나가 눈을 맞추고 입을 맞춥니다.

      이 연인들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은 구별된 장소와 시간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과 눈을 맞추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오늘 시편 1편의 고백처럼 종일 말씀을 되개시며 주님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사랑으로 건강하게 자라나서, 이제 자연스럽게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두 번째 계명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 성육신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삶은 먼저 이웃을 용서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언제나 주님을 갈망했던 다윗을 보십시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에도 그를 존중하고 살려주고 나중에 그가 죽었을 때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랑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주의기도에서 용서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처럼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고”
      그 기도를 가르치신 후에 거듭 또 말씀하십니다.
      마태 6:14-15,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는 사람은 자기의 것을 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작년 우리 교회 표어,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요한 1서 3:16-18,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나 혀 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최고의 표현은?
      불신자의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입니다. 서신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살전 2:8, “이렇게 여러분을 극진히 생각하는 마음에서 하느님의 복음을 나누어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바칠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그토록 여러분을 사랑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삶! 이렇게만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 삶이 잔치가 벌어지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닐까요?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고자 하신 풍요로운 삶의 모습입니다.
      요한 10:10,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오늘 주님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풍요로운 삶으로 회복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사랑을 살고 있니?”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함으로 너희 안에 내가 살아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축복된 삶을 살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수록 그분의 눈에 눈을 맞출수록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채워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웃을 용서하고 나의 것을 나누고 복음을 증거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풍요로운 하느님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어떠한 것도 주님을 바라보는 것에 우선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구별된 장소와 시간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을 타협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고 24시간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이제 함께 찬양하고 기도합시다.
      “십자가 그 사랑 멀리 떠나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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