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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9월 8일 설교문
  • 2018년 9월 8일 루가 14:25-33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지난 주일 복음을 기억하시는지요? 지난 한 주 말씀을 기억하며 생활하셨는지요?

    ‘윗자리 욕망을 물리치고 맨끝자리를 선택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라!

     

     

    주 중에 페이스북에서 맨끝자리 신앙을 말하고 있는 아주 감동적인 연설문을 보았습니다. 한동대학교 2008년 졸업식 때 이윤구총장이 하신 ‘지구촌 밑바닥 10여 억명이 목매어 부릅니다’라는 연설입니다. 저도 읽고 나가고픈 감동을 준 받은 글입니다. 홈페이지에 올려 놓았습니다.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 복음에는 예수님이 바리사이파 지도자로부터 식사 초대를 받아 가 계셨는데 이제 장면이 바꿔서 군중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 집을 나와 걸어가는데 군중들이 따라 걸어갔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늘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허다한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소작을 하는 가난한 농부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먹을거리가 걱정인 사람들입니다. 빚도 많이 져서 삶에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병이 들어도 잘 고칠 수 없고 삶의 아픔이 많으니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도 많은 것이죠.

     

     

    이들은 죄인 취급 받으며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는데 예수님이 그들을 환대했습니다. 병도 고쳐주시고 마귀도 쫓아 내 주시고 먹을 것도 주시고 야--- 그야말로 예수가 그들에게는 최고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다닙니다.

     

     

    지난 금요일 큐티 본문을 보면 이들 군중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나와 있습니다.

     

     

    마르코 6:3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군중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

     

    측은히 여기시어 ; 컴패션 - 함께 아파하시는 주님, 애긴장을 태우다. 누구에게? 자기 자식 정도, 예수님은 군중들을 이 마음으로....

     

    오늘도 예수님은 이 마음으로 군중들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함께 걸어가셨습니다. 예수께서 군중과 동행하셨다는 표현이 좋습니다. 그 주님이 이 자리에 함께 하십니다. 여러 인생의 문제로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여러분들과 함께 아파하며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용기가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걸음을 멈추십니다. 뒤들 돌아보시더니 군중들에게 난데없이 설교를 하십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얻고자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군중들을 불쌍하게 여기지만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새로운 인생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하느님 나라를 세워가는 예수님의 동역자가 되는 새로운 삶으로 말입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 결단해야 하는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새겨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1. 26절, 가족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당혹스러운 초대입니다.

     

    유대는 철저히 가족 중심, 집단 중심의 사회였습니다. 좋은 전통과 가치관이죠. 그런데 가족을 미워하라? 뭐 이런 스승이 다 있나?

     

     

    하느님은 십계명을 통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의 전통적인 가치관으로나 하느님의 율법으로나 그릇된 것 아닌가요?

     

    ‘미워하다’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마태 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 미워하다 : ‘예수보다 덜 사랑하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가장 가까운 처자라도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다른 어떤 관계보다 우선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가장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갈릴리 호숫가로 돌아가서 고기잡이 하는 베드로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3번 질문하셨죠.

    네가 나를 그 무엇보다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복음의 말씀, 베드로를 향한 이 질문을 통해 우리 인생들이 정립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관계가 바로 주님과의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들은 가족 친구 이웃과 동료 등 여러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생의 많은 불행은 이런 관계가 깨지는 것에서 기인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관계를 잘 맺고 살고 싶습니다. 노력해봅니다. 하지만 이내 실망하고 갈등하고 반목하고 갈라서고.... 왜 이렇게 될까요?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관계인 주님과의 관계가 정립되어 있지 않아서입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만큼 부모도 공경하게 되고 아내도 사랑하게 되고 자식도 존중하며 바르게 양육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자의 마음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흘러 넘칩니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여 그 사랑에 감격하고 그 때부터 정말 부모와 처자를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설적인 원리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요구는 희생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느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리게 하시고자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관계인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첫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진실하게 사랑하는 제자가 되십시오. 그러면 사랑의 관계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행복의 삶이 증인의 삶입니다.

     

    2. 27,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십자가는 로마에게 반역한 사람들이나 악한 강도들이 죽는 사형틀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의 자리이구요.

    그런데 그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건 또 무슨 얘기일까요?

     

     

    많은 신자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어려운 문제나 무거운 짐을 십자가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왜 지셨는지요?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거룩한 희생제물로 죽는 것이었습니다. 죄의 값은 죽음인데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의 죄값을 다 치르신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이신지라 이 십자가를 지기까지 큰 고뇌와 번민이 있었습니다.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주소서!’

     

    하지만 하느님을 떠난 인생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알기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요 그 뜻을 따르기 위한 순종입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뜻을 더 알아가고자 성경을 읽습니다. 자신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합니다.

     

    지금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을 따르고자 감당하는 십자가가 있으신지요? 마땅히 내가 져야 하는 십자가임에도 지지 않고 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요?

     

    3. 33절, 자기의 것을 버리는 삶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이렇게 계속 예수님은 당혹스러운 요구만 하십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예수 믿어라 그러면 성공한다는 믿음이 팽배했었습니다. 삼박자 축복으로 대표됩니다. 요한삼서 2절.

     

    이것을 세계적인 신학교수인 김세윤박사는 아메리칸 드림 미국발 캘리포니아 복음이라고 합니다. 번영신학, 기복신앙에 찌든 한국의 크리스챤들에게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혹하기만 할 것입니다.

     

    모든 소유를 버린다는 진정한 의미는 뭘까요?

     

    마태 6장 24절을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재물을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으로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제자의 특징은 예수님 중심, 말 그대로 예수님이 주인인 사람입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가진 것을 기꺼이 내놓지 못하는 한 주님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버린다를 3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루가 18:22,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너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하셨다.

     

    실로 예수님을 만나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하느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기가 가진 것을 버렸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 세리장 자캐오, 성인 프란시스, 맨발의 전도자 최춘선 할아버지.

     

    2) 재물을 마음에 두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마음에 담긴 것을 보고 따릅니다. 재물을 마음에 담아 둔 사람은 모든 게 계산적입니다. 잘 나누지 못합니다. 돈만 보입니다. 돈 생각 뿐입니다.

    딤전 6:17,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사는 사람들에게 명령하시오. 교만해지지 말며 믿을 수 없는 부귀에 희망을 두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이르시오. 하느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3)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투자하라.는적극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님이 12제자들과 함께 전도여행을 다닐 때 예수님은 돈벌이가 없었습니다. 먹고 살고 여행했습니다. 어떻게요?

    루가 8:3,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인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라는 여자를 비롯하여 다른 여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돕고 있었다.

     

    여러분 각자 오늘 세 가지의 말씀이 즉각으로 적용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 말씀하신 제자의 자격이 구원의 자격은 아닙니다. 이 세가지를 결단하지 못했다고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은 아닌 것이죠.

     

    박진영의 고백 - 머리로는 믿어지는데, 마음으로 믿어지지 않아...

     

    구원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얻게 되는 하느님의 은총의선물입니다.

    로마 10:10, 곧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다만 주님은 여러분이 이런 제자가 되어 이 땅에서 보다 높은 차원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여주고 하느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증인의 삶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모두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주님의 몸된 교회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하느님이 주신 재물을 기꺼이 사용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단지 구원받은 것에 머무르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로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가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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