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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작은 교회"인가? - 이진오 목사/더함공동체교회
  • 어떤 "작은 교회"인가?

    이진오 목사/더함공동체교회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일까? 교회에 대한 전통적 이해는 2가지이다. 하나는 건물이나 제도로 이해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건물이나 제도로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어 'kyuiake'(주께 속한 것)과 'kyriakos'(주님의 집)에서 유래한 것으로 히브리어 '에다'에서 기인한다.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은 '에클레시아'(밖으로 불러내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히브리어 ‘카할’의 전통을 따른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일본 등에서는 '敎會'를 사용한다. 가르칠 "교"에 모일 "회"이다. 유교 등 동양사상이 전문적인 지도자에 의해 가르침을 받았던 전통이 반영된 것이다. 기독교 문화 가운데 있던 서양과 달리 완전히 다른 종교적 문화 속에서 기독교가 수용되면서, 올바른 성경적, 신학적 이해를 가르치고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에서 볼 때 가르치고 배우는 곳으로서의 의미도 의미가 있다 할 수 있다.

    예수원 설립자이신 고)대천덕 신부님은 한국교회가 너무 가르치고 배우는데 집중함으로 지적으로만 성장했다는 것을 지적하면 가르칠 "교"를 교제할 "교"로 바꾸어 '交會'라고 사용하자고 했다. 상호 소통하는 '코이노니아'의 부족을 생각할 때 유익한 지적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교회는 2가지 전통적인 이해와 동양적인 필요를 덧붙여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주님께 속한 삶을 살도록 가르치고 배우며 교제하는 곳"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교회됨”은 인격적으로 “교제함”이다

    '교회'가 무엇인가? 에 대해 개념적으로 설명한 것은 이렇게 정의한 '교회'에 현재 한국교회가 부합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또 교회에 대한 정의에 따라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 교회는 적절한 크기의 제한을 두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먼저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에서는 차이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주님께 속한 삶"을 사는 것 그래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는 것이야 말로 궁극적인 "그리스도인됨"의 목적일 텐데 이를 위해서는 "가르치고 배우며 교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과 배움은 탁월한 설교자나 교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 서로 안에 "교제"를 통해 이루어진다. "교제"는 '코이노니아'이다. 성령의 교통하심 가운데 있는 성도들 안에 소통, 사귐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교회'의 가장 궁극적인 "교회됨"은 성령 안에서 소통하고 사귐이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겠다. 예배와 모임을 하는 장소도 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교회의 직분과 제도도 결국 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교회 인원을 말할 때 행정적으로 등록한 숫자를 교인의 수로 말한다. 또 주일예배를 함께 드린 숫자를 교인의 수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수가 교회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수는 그저 제도적인 숫자일 뿐이다. 실제 교회의 정의에서 규정한 “교제”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우리들 교회에 속한 사람들과 진정으로 ‘코이노니아’ 즉, 소통하고 사귀고 있는가? 그들의 아픔이 무엇이고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가 이해하고 있는가?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아니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알고 있는가?

    결국 교회는 인격적으로 교제함이라 할 수 있다. 신앙과 삶의 진실된 공동체라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성경이 가르쳐주는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으로 부르심으로 받아,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에 따라, 모퉁이 돌 되신 예수님을 반석으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성령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엡2:22)가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큰 교회” & “크지 못한 교회”의 딜레마

    나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과의 인격적인 교제는 적정 수를 넘어가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 교회에 있지만 사실은 다른 교회이고, 한 교회에 있지만 사실은 전혀 관계(교제와 사귐)가 없는 사람들이다. 나는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주님께 속한 삶을 살도록 가르치고 배우며 교제하는 곳"이라는 관점에서 상호 가르치고 배우며 인격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정도의 수를 넘어가는 곳은 교회됨을 포기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성경에서의 교회는 "큰 교회"와 "크지 못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건강한 교회"(성경적인 교회)와 "건강하지 않은 교회"(세속적인 교회)가 존재한다. 세속적인 교회는 세속적 가치를 따라 성경적 가르침을 쫒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왜곡하고 배반한다.

    그럼에도 성경에서의 교회 중 현재처럼 수백에서 수 천 명이 모이는 교회는 없다. 대교회를 주장하는 분들은 베드로가 설교할 때 3천 명, 5천 명이 회개했다는 것을 예를 든다. 그러나 그들이 한 교회에 모여 예배하고 모임을 한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뿐 아니라 바울이 개척한 모든 교회들은 대부분 가정교회 형태로 아주 작은 단위로 산재해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교회들이 서로 협력하고 연합해 나간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큰 교회도 건강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 뒤에는 큰 교회를 지향하는 자신의 욕망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이 욕망에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거룩함이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이 아니라 개인의 안락, 개인의 성공, 개인의 야망, 개인의 권력 등이 담겨져 있다.

    세속적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공과 번영을 절대시 하는 것이다. "맘몬"으로 대표되는 돈, 명예, 권력이다. 육신의 정욕이며, 안목의 정욕이고, 이생의 자랑이다.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했던 것들이다. 예수님은 이것들을 물리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따라야할 가치를 가르쳐 주셨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신학적/신앙적 부패는 이런 세속적 가치를 따른 것이다. 그것이 개인에게는 성공, 번영 등의 기복으로 나타났고, 교회에는 숫자적 성장추구로 나타난 것이다.

    성경적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내려놓음, 비움, 낮아짐, 작음 등이다. 개혁가들이 중세 가톨릭의 성공과 번영의 신학/신앙에 맞서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추구한 것으로 바로 “십자가의 정신”이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고,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가치는 개인에게는 정직, 검소, 절제, 나눔, 공평, 정의 등으로 나타나고, 교회는 본질을 추구하는 단순함과 작음, 더불어 함께로 나타난다.

    교회가 지나치게 커지면 성경적 가치보다 세속적 가치를 지향할 가능성도 커진다. 왜냐하면 큰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 조직으로 사람들을 관리하거나, 프로그램으로 움직이는 등 다양한 경영적 방식이 도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관계는 단절된다. 소수로 나눈 구역이나 소그룹이 작동하지만, 목사는 연예인이 되고, 교황이나 무당이나 잘해야 CEO가 된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목사가 아무리 개인적으로 영성이 뛰어나고 탁월해도, 어떤 성도가 개인적으로 사회적 지식인이고 인격적이어도 자기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크기의 한계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불행이도 한국교회에는 무조건 큰 것이 좋다는 심지어는 선하거나 옳다는 편견이 가득한다. 그래서 큰 교회를 위한, 큰 교회를 향한, 큰 교회에 의한 거대한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다. 신학교는 어떻게 하면 큰 교회를 이루고 큰 교회를 목회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출판사는 큰 교회 목사의 설교와 큰 교회를 이루는 방법과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들을 내고, 언론사도 큰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교단의 총회와 노회는 큰 교회 목사와 장로들이 모든 임원을 맡아 좌지우지 하고, 각종 연합기구는 큰 교회 목사들을 중심으로 큰 교회의 이익을 대변한다.

    그래서 "크지 못한 교회"는 끊임없이 "큰 교회"를 지향한다. 큰 교회가 좋은 교회이고 건강한 교회이니 우리도 큰 교회를 목표로 나가자고 외친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함정에 자신들이 빠지고 만다. 예를 들어 2백 명 모이는 교회는 1천 명, 1천 명 교회는 3천 명, 5천 명은 1만 명, 4만 명은 10만 명. 이런 식이다.

    초창기 교인들은 자신들의 돈과 젊음을 바치며 교회 성장을 위해 많은 수고를 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 교회가 안정이 되었음에도 계속 성장을 목표로 나아갈 때 어느 순간 교인들은 이 고생을 자녀들에게까지 물러주어야 하는가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냥 더 큰 교회로 옮기면 그만이라는 것을. 자신이 못 옮기면 자식들이라도 옮기게 한다. 그래서 대형교회는 초대형교회가 되고, 중형교회들은 급속히 몰락해 간다. “크지 못한 교회”가 “큰 교회”를 모델로 삼는 한 큰 교회를 찾아 수평 이동하는 교인들을 막을 논리도 이유도 없다.

    목회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몇 가지 현실을 깨닫고 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된 지 130여 년이 지난 현재 전국적으로 교회는 적절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기독교 인구는 더 이상 증가하지 않고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 탁 까놓고 말해 이제 개척해서 대형교회 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또 대형교회 담임목사 자리는 아들이나 사위 등에게 세습되고 있고, 어지간한 규모의 교회도 빽없고 줄없이 청빙 받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외국 유학에 박사 학위를 갖추는 등 웬만한 스펙은 기본이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도 작은 교회를 지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작은 교회”가 아니라 “건강한 작은 교회”여야 한다

    그럼 ‘작은 교회’는 무조건 건강하고 좋은 교회인가? 물론, 작은 교회라고 무조건 건강한 것이 아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큰 교회” 의식과 지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냥 “크지 못한 교회”로 사실 이런 교회에 가는 것보다 “큰 교회”에 가는 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다. 나는 ‘작은 교회’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작은 교회’를 추구하고 지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작은 교회’에 대해 설명하려면 어떤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가? 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고, 작은 교회의 기준은 몇 명일까? 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건강한 교회는 첫째, 성경적 영성을 겸비한 교회다. 이런 교회는 이원론적이고 혼합적인 성경해석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담은 성경 해석과 실천에 힘쓰는 교회이다. 이런 교회는 일반적으로 교회의 5대 기능으로 이해하는 “예배, 교육, 증거, 교제, 봉사”와 함께 “사회적 책임”(혹은 사회참여)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한다.

    둘째,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교회이다. 특정인이나 소수 그룹에 의해 의사결정이 좌우되지 않고 교인들 모두가 참여, 소통, 협업, 공유하는 것이다. 이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고, 주체는 성도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모든 성도가 양심의 자유를 갖고 성경 해석의 최종적 책임을 지며, 복음적으로 분업을 이루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성경적 가치 를 바탕으로 민주적 참여를 통해 정관/규약을 제정한다.

    셋째, 재정을 포함한 행정이 바르고 투명한 교회이다. 교회 행정은 세상적 기준에서 볼 때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바르고 투명해야 한다. 특히 재정은 교회 목적(비전)에 따른 재정 계획을 수립하고 성경적이고 상식적인 방법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자발적으로 헌금/연보 하도록 하며, 목회자 사례비를 포함해 불투명한 지출이 없도록 하며, 투명한 재정을 위해 홈페이지, 주보, 제직회, 총회 등을 통해 내역을 공개해야 한다.

    넷째, 지역과 함께하는 교회이다. 모든 교회는 우주적 교회이지만 동시에 지역적 교회이다. “우주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교회들이 시대와 지역과 연합하며 교회개혁이든, 세계선교이든 큰 비전과 목적을 향해 사역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모든 활동은 부르심을 받은 특정지역을 기반으로 사역할 때 효율성이 있다. 이렇게 지역적으로 각자에게 주어진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우주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들과 연대하는 것으로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통치하심에 동참하게 된다.

    최소 50명, 최대 200명

    그럼 어느 정도 인원이 작은 교회일까? 가장 원론적인 답변은 구성원들 간에 인격적인 교제가 가능한 숫자이다. 그럼 그 수는 얼마일까? 개인에 따라 편차가 있는데 이를 획일적으로 정할 수 있을까? 학자들은 보통 한 사람이 기억 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1,500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수는 피상적으로 얼굴이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지 인격적 즉, 관계적일 수 있는 수는 아니다. 나는 청장년 인원이 최소 50명에서 최대 200명까지를 제안하고 싶다.

    물론 교회는 가정에서 모여도 교회이고, 뜻이 맞는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도 교회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지역교회로서 공동체를 이루고 유의미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규모가 필요하다. 나는 그 최소한을 개별 교회가 전임사역자 1명의 생활비를 지급하고, 기본적으로 예배와 모임을 위해 필요한 공간을 이용하고, 내부적 교제와 교육을 시행하며, 외부적으로 뜻있는 곳에 일정한 지원도 할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한다. 물론, 목회자가 생활비를 받지 않거나, 가정교회 등으로 모임 공간이 별도로 필요 없는 경우도 나름 의미가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보편적인 교회 형태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50명을 선정한 이유는 단순하다. 80년대 중반 통계로 평균적으로 대학생 이상 교인들의 1년 평균 헌금 액수는 1백 만 원이었다. 현재는 지역이나 구성원에 따라 150만~200만까지 일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50명인 교회의 1년 예산은 5천 만~6천 5백 만 가량이 될 것이다. 이 중 1천 만 원 가량이 장소 사용료 및 운영비용으로 사용되고, 전임사역자 1명의 연봉을 2천 만 원 정도로 보고, 내부적 교제와 교육을 위해 1천 5백 만 정도가 사용된다고 보면 1천 만 원 정도를 외부적으로 뜻있는 곳에 기부하거나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청장년 50명 정도면 충분히 건강성을 유지하며 보람 있고 의미 있게 교회를 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최대 숫자는 왜 200명인가? 나는 이 정도 인원이 모든 구성원 간에 인격적 교제가 가능한 최대 인원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적 근거는 정확히 없고, 공동체마다 또 개인마다 편차가 있을 것이다. 몇 가지 사례가 있다. 우리가 모범적으로 생각하는 미국 뉴욕의 ‘세이비어 교회’나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데이비드 브라이닝, 옥당)에서 소개된 ‘CTK' 교회 등이 150~200명을 넘지 않는 작은 교회들의 연합으로 사역하고 있다.

    또 다른 근거 중 하나는 'Gore'라는 회사의 사례이다. 고어사는 등산복 재질인 “고어텍스”를 만드는 회사이다. 이 회사는 1958년에 설립되었는데, 고어사는 현재 섬유, 의료, 전자, 산업재 4개 분야 사업부를 운영하며 1천 종이 넘는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다. 고어사는 포천지 선정 “가장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에 12년 연속 선정되었는데, 2010년 기준 매출액 26억 달러, 직원 수 9천여 명에 전 세계 30여 개국에 50여 개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고어사의 경영철학은 다양한 면에서 독특하고 창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특히 주목 받는 것은 한 공장이나 한 조직이 200명을 넘어서지 않도록 작은 단위로 운영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늘면 공장 규모를 늘리는게 아니라 새로 공장이나 조직을 만들어 분사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200명이 넘어가면 이름이나 얼굴을 모르게 되고, 인격적 관계가 단절되고, 창의력이 상실되며, 협력하고 선의의 경쟁을 하는데 해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영철학은 적중했다. 고어사는 단지 조직과 공장만 나눈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도 완전히 분리해 같은 이름을 사용하지만 완전히 다른 조직, 다른 회사로서 독립적으로 운영한 것이다. 고어사의 경열철학은 4가지로 “인간에 대해 믿음을 갖고(Belief in the individual), “작은 조직에서 오히려 강한 힘이 나온다고 확신하며(Power of small teams)“, ”모두 함께 라는 정신으로“(All in the same boat), ”장기적 시각으로(Long-term view)“ 경영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영 방식은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GM 등 대기업에서도 가져가 소위 “브랜드” 방식으로 브랜드별로 독립된 의사결정과 마케팅 등을 사용하는 것이 보편화되고 있다. 대기업들로 내부적으로는 작은 단위로 분사해서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200명 정도면 지역교회로서 모든 사역적 열매를 맺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한 교회가 더 크고, 더 많은 일을 하려고 하기보다 한두 가지 선택하고 집중해 감당해야 할 것을 하고, 무엇보다 어떤 일보다 교회 구성원 안에 신앙과 삶의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역은 사람이 한다. 사람이 영성이 깊어지고, 은혜가 넘치면 사역도 하게 되고, 사역도 성장하게 될 것이다.

    더불어 함께하는 건강한 작은 교회의 꿈

    나는 “어떤 작은 교회인가”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냥 “작은 교회”가 아니라 “건강한 작은 교회”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였고, 작은 교회의 기준은 무엇인가에 대해 내 나름의 생각을 밝혔다. 손봉호 장로께서 교회사 교수들과의 대화를 교회사 교수들이 한국교회가 종교개혁 이후 가장 부패한 교회라는 평가하더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신학적/신앙적 부패, 그 결과에 의한 도덕/윤리적 타락 등 나는 결국 부패한 신학적/신앙적 타락의 핵심에 대형교회를 추구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형교회를 추구해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하고, 주님의 교회의 거룩함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교회를 구성한 인간들의 돈과 권력, 명예 등에 대한 욕심을 발로이다. 1만 명 되는 1교회 보다 100명 되는 100교회가 훨씬 지역적으로 더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다. 규모가 큰 일은 연합해서 감당하면 된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작은 교회"를 지향해야 한다. 크지 못해서 작은 교회가 아니라 건강한 작은 교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올바른 정신과 가치를 따라 작은 그 자체로 행복하고, 그 자체로 감사한 그런 교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게으르거나 지지리 궁상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작은 교회는 한 교회를 "더 크게", "더 호화롭게" 성장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게", “더 바르게” 성장하는 교회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열심히 전도하고, 더 열심히 사역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가 새롭게 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평가를 받으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건강한 작은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성경적 가치를 지향하고, 더불어 함께 하겠다는 건강한 실천을 다짐하는 100명~200명 되는 교회들 100교회가 세워지고 이런 교회들이 효율적으로 네트워크 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건강한 작은 교회의 가치를 지지하는 신학교, 언론사, 출판사, 시민단체 등 다양한 곳들을 지원함으로 우리는 10년 후 새로운 한국교회의 흐름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더불어 함께하는 건강한 작은 교회의 꿈”을 꾼다.

    * 위 글은 건강한 작은교회 연합 모임인 '개혁교회네트워크'가 주최하는 "제7회 이런교회다니고싶다"(5.20, 언덕교회, 강남 파고다 어학원)에서 이진오 목사가 발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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