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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지문제로 인해 우리 사회에 빚어진 참사 - 용산 참사 문제는 한국교회의 문제
  • 용산 참사 판결을 넘어선 하나님의 정의는


    용산 참사가 발생한 지 어언 300여 일이 지났다.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다 되어 가건만 용산 참사 문제는 근본적인 해결은커녕 이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만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지난 용산 참사는 근본적으로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였다. 그런데도 우리 한국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조용하기만 하다.

    같은 교회를 다니는 재개발 조합장인 원로장로와 상가 세입자인 집사가 재개발을 둘러싸고 서로 부딪혔고, 대통령인 또 다른 장로는 '법질서 확립'을 내세우며 재개발 조합장 장로 편에서 강경 대응을 하다가 결국 용산 참사라는 비극을 불러오고 말았다. 정작 두 사람이 다니던 교회는 보상을 받고 용산을 떠나 새로운 예배당에서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한다.

    지난 용산 참사 문제는 참사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중형을 선고하고, 강경 진압을 한 국가와 재개발을 추진한 당사자들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결론으로 대충 마무리되었다. 이런 판결을 하나님의 말씀과 법에 비추어 보면 과연 어떤 결론이 나오게 될까?

    지난 10월 21일 검찰이 용산 참사 피고인 9명 모두에게 중형을 구형하면서 한 말을 먼저 살펴보자.

    "법원이 그동안 전철연 회원들에 대한 양형에 있어 철거민이라는 이유로 온정에 치우쳤다. 이들의 행위를 묵인하면 향후 법을 지키면 손해를 보고, 법을 지키지 않으면 이득을 본다는 인식이 확산될 수 있다. 이번 일을 내버려 두면 제2, 제3의 용산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사회적 약자들이 속한 각 단체들이 화염병을 들고 거리로 나설 수 있다. 피고인들이 평범한 세입자라고 호소하지만, 경찰 특공대도 평범한 인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000검사)

    검사의 이런 발언과 용산 참사 피고인의 최후 진술은 아주 대조적이다.

    "법과 제도가 바로 서서 저희 같은 철거민이 양산되지 않았으면 한다. 이번 일로 돌아가신 분께(한참 침묵).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제도적인 방책이 세워졌으면 한다." (김OO)

    가난한 사람도 정의에 따라 판결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찌니라"(출 23:3)고 말씀하신다. 또한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라"(출 23:6)고 말씀하신다.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치우쳐서 두둔해서는 안 되고, 가난하다고 해서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즉 가난한 사람들도 정의에 따라 판결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용산 참사에 담긴 하나님의 정의는 무엇일까?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두둔하거나 불리하게 판결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법에 따라 이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용산 참사에 관련된 피고인들이 시위를 하면서 우리나라의 실정법을 어긴 것은 사실이다. 법을 어긴 것에 대해서는 가난한 사람들도 그에 맞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번 일을 내버려 두면 제2, 제3의 용산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사회적 약자들이 속한 각 단체들이 화염병을 들고 거리로 나설 수 있다"는 검사의 발언을 보면 검찰과 법원의 중형 구형이 과연 정의에 따른 것인지 의문이 든다.

    검찰의 발언은 공평한 판단이라기보다는 이번 일을 내버려 두면 앞으로 비슷한 재개발 문제에서 또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으니 시범 케이스로 본때를 보여 주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용산 참사에 관련된 피고인들은 자신들이 한 잘못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것으로 족하다. 잘못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앞으로 이런 비슷한 문제가 또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로 시범 케이스가 되어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 게다가 검찰이 수사 기록을 공개하지도 않고 책임 소재가 여전히 불분명한 상태에서 내려진 판결이 누구나 납득할 만한 공평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검찰은 "고인들이 평범한 세입자라고 호소하지만, 경찰 특공대도 평범한 인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경찰 특공대도 평범한 인간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자식일 것이다. 맞는 말이다. 언젠가 용산 참사에서 숨진 경찰 특공대원의 어린 딸이 아버지의 무덤에 헌화하는 사진을 뉴스로 본 적이 있다. 죽음은 어느 누구에게나 가슴 아픈 일이다. 이는 용산 참사에서 사망한 5명의 세입자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권력이 있거나 없거나에 상관없이 정의에 따라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과는 달리 국가는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절대 책임지지 않는다. 이는 비단 용산 참사와 같은 경찰의 강경 진압만이 아니라 정부의 잘못된 국정 운영이나 경제정책 등 수많은 국민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잘못에 대해서도 국가는 근본적으로 전혀 책임지지 않는다.

    국가는 고작해야 자신들도 선거를 통해 국민들에게 심판을 받는다고 변명하면서, 억울하다면 나중에 선거로 심판하라고 말한다. 이는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국가도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특히 국민들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막대한 권력을 가진 국가라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더더욱 책임을 져야만 한다.

    용산 참사의 밑바닥에는 토지 사유제가 있다

    한편 "법과 제도가 바로 서서 저희 같은 철거민이 양산되지 않았으면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제도적인 방책이 세워졌으면 한다"라는 한 피고인의 최후 진술은 용산 참사의 본질에 오히려 더 가깝다. 용산 참사는 근본적으로 토지 사유제 아래에서 발생하는 토지 불로소득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막대한 개발이익 때문에 피도 눈물도 없는 개발을 밀어붙인 개발 당사자들과 개발 드라이브 정책을 추진한 정부에 문제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안식년법과 희년법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이들이 잃어버린 토지권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명령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땅에서 모든 사람들이 청지기와 나그네로서 일하며 살아갈 수 있는 동등한 생존권을 주셨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평등한 토지권을 보장하라고 지금도 우리들에게 명령하신다.

    이런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 바로 토지 사유제이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제 오십 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찌라"(레 25:10)고 말씀하신다.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게 자신의 메시아 선언에서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9)고 말씀하신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 말씀하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에서 자유를 뜻하는 히브리어 '드로르'는 레위기 25장 10절의 "자유를 공포하라"에 쓰인 단어 드로르와 일치한다.

    용산 참사 문제의 근저에는 토지 사유제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토지 불로소득이라는 문제가 깔려 있다. 토지 사유제와 토지 불로소득의 문제는 지난 용산 참사 문제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이슈인 4대강 사업과 세종시 문제의 근저에도 똬리를 틀고 있다. 토지 사유제 아래에서 개발에 따른 토지 불로소득을 둘러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용산 참사와 여러 사회 문제들에 깔려 있는 본질이라는 말이다.

    사실상 용산 참사 문제는 토지 사유제에 따른 지주의 소유권에 상가 세입자의 생활권(점유권 혹은 영업권으로 볼 수도 있다)이 정면으로 부딪힌 사건이었다. 지금까지 주택 건설로 인해 발생하는 철거민들에 대해서는 주거권이라는 개념이 어느 정도 인정되어 왔지만, 상가 등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생활권과 권리금 문제는 아직 수면으로 부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토지 사유제는 지주의 소유권만을 절대시하고 세입자의 주거권이나 생활권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반성경적인 제도이다. 모든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시려는 하나님의 희년법의 정신에 비추어 본다면 토지 사유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교회에서 희년법에 대해 가르치기만 했어도

    용산 참사 문제는 바로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이다. 재개발 조합장 장로와 세입자 철거민 집사가 같이 다녔던 교회에서 하나님의 희년법에 대해 가르치고 토지 불로소득의 추구가 성경이 금하는 죄악이라고 설교했다면 그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까? 토지 사유제 아래에서 토지 불로소득을 추구하는 것이 이웃의 평등한 토지권을 침해하고 이웃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며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신 27:17) 죄악이라는 것을 교회에서 가르쳤다면 조합장 장로와 세입자 집사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법을 지키면 손해를 보고, 법을 지키지 않으면 이득을 본다는 인식이 확산될 수 있다. 이번 일을 내버려 두면 제2, 제3의 용산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검사의 말을 하나님이 명령하신 희년법의 관점에서 본다면 용산 참사의 판결이 아마도 이렇게 바뀌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 손해를 보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 이득을 본다는 인식이 확산될 수 있다. 이번 일을 내버려 두고 하나님의 법과 제도를 세우지 않으면 제2, 제3의 용산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고영근 / 희년토지정의실천운동 협동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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