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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시대의 신정론(2)---세상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세상의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 우리시대의 신정론(2)
    ---세상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세상의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독일 히틀러 정권의 살상, 캄보디아 크메르루즈의 민간인 학살, 일본제국의 학살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왜 이런 대학살이 하나님의 뜻이라거나, 혹은 하나님의 통치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왜 기독교인들이 이런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세상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많은 이유가 있지만, 오늘은 주된 이유 하나를 보겠다. 이런 주장의 저변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일’을 간섭하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가장 작은 일도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 있다는 믿음이다.
    ...
    성경은 참새 두 마리가 팔리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속에 있고(마태 10:29),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다고 말한다.(누가 12:7) 이런 구절을 잘못 해석하면, 성경에 언급된 고난의 사건이나 전쟁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서 생각은 한 번 더 비약한다. 즉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생각은 더할 수 없는 혼란과 모순으로 이어진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성폭행을 당하고, 왕따를 당하고, 살인을 당하고, 세월호에서 죽어간 무고한 학생들, 그리고 온갖 악한 일도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신정론은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서 이해를 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의 일부 구절을 변증법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적인 단선구조로 받아들이면 풀지 못할 오해에 빠진다.

    ‘참새 두 마리’ 구절을 그대로 믿는 것은 순박한 신앙이다. 나도 그대로 믿는다. 하지만 해석을 잘해야 한다.

    이 말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표현이다. 이 세상의 작은 일도 하나님이 소중하게 보시고, ‘세상’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이는 성육신 사건과 동일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이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이 세상과 함께 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이다.(마태 1:23) 세상의 작고, 나약하고, 고통받는 현실도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는다는 약속이다.

    <세상의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세상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이 세상의 악을 용인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증오와 살상, 폭력과 전쟁, 악의 지배가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는가? 성경의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신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잠언 8:13)이며,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시편 97:10), 바울은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선언한다.(롬 12: 9)

    성경이 살인을 미워하고, 형제를 억압하고, 악을 행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명확하다.

    <두 언어의 혼돈>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하나님이 ‘세상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과 ‘세상의 악을 미워하신다’는 선포를 혼돈해서는 안 된다.

    식민지배나 전쟁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다는 생각은 이런 혼돈에서 야기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가장 작은 자와 함께 하고, 가장 낮은 곳에도 임하시는 것은 사실이다. 전쟁과 살상의 현장도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쟁과 살상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전쟁과 살상을 즐기는 기괴한 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쟁과 살상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현장에서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계시고, 죽어가는 자들과 함께 계신다. [즉 하나님은 식민지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식민지배에 맞서 싸웠던 자들과 함께 하셨고, 또 식민지배에 희생되고 고통받은 자들과 함께 하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고통의 현장에 임하며,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성경의 중심에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있다! 성경은 무력해 보이는, 비참하게 달려 죽어간 그리스도를 직시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십자가 없는 ‘번영의 신학’에 대해, ‘식민지배의 신학’에 대해 언제나 “아니오!”를 말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맹렬무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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