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의 세속화’ 깊게 보기
송재룡 프란시스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 1세기 동안 세계 그리스도교의 교세는 얼마나 변했을까? 2010년 현재 세계 그리스도 인구는 약 21.8억으로 세계인구(69억)의 약 32%를 차지한다. 100년 전인 1910년에는 약 6.3억으로, 당시 추정 세계인구(18억)의 35% 수준을 보였다. 그러니까 100년 간 세계 그리스도인은 3% 정도 감소한 것이다(Pew Research Center, 2011).
이 통계를 주요 대륙별로 살펴보자. 1910년에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 6.1억의 93.4%에 해당하는 5.7억이 유럽(66.3%, 4.0억)과 아메리카(27.1%, 1.7억)에 살고 있었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는 4.5%에 해당하는 0.28억 명, 사하라 사막이남 아프리카 지역에는 1.4%인 0.09억 명 정도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 유럽 및 아메리카 지역은 그 비율이 62.7%(유럽 25.9% + 아메리카 36.8%)로 크게 감소했고, 반면에 아시아·태평양 및 사하라 사막이남 아프리카는 각각 13.1%와 23.6%로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여하튼 전 세계 인구에서 그리스도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100년 동안 약 3% 정도 감소했다. 물론 이 정도의 감소는 100여 년 전 급진적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점쳤던 ‘향후 100년 내에 종교(주로 그리스도교)의 소멸”이란 예언을 크게 빗나가게 하는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전 세계 그리스도인의 2/3(66.3%)이 거주했던 유럽이 100년의 세월을 거치며 1/4 수준(25.9%)으로 크게 감소한 현상은 세속화론자들의 중요한 보루가 되고 있다.
실제로 2004년 갤럽 국제조사에 의하면, 전체인구 중의 프랑스인 15%, 영국인 12%(성공회 3% 포함), 오스트리아인 18% 정도가 주일예배에 출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등과 같은 북유럽 국가들의 주일예배 참석률이 3-5% 정도다. 과거 공산권에 속했던 러시아, 체코, 헝가리 등의 국가들도 이와 비슷한 참석률을 보인다(9년 전 수치이니 지금은 이보다 더 낮을 것이다). 여하튼 유럽에 관한 한, 이 감소 추세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는 것이 전형적 종교세속화론의 입장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유럽 기독교의 세속화, 즉 유럽 사회의 불신앙화가 오히려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들이 등장하고 있다. 지난 2012년 한국에서 번역·출판된 필 주커먼(Phil Zuckerman)의 「신 없는 사회」(마음산책, 2012)는 그 대표적인 예다. 이 책은 대표적 종교세속화 국가인 덴마크와 스웨덴이 도달해 있는 수준 높은 삶의 상태 –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정치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상태 – 를 주목한다.
이 책의 요지는 한 마디로, ‘신 없는 사회가 신 있는 사회보다 행복하고 평화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100여 년 전, ‘개신교 윤리가 유럽사회의 경제적 발전의 원천’이라고 보았던 고전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주장을 뒤엎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주커먼은 ‘“신 없는 사회”가 “풍요로운 사회”의 전제’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늘의 두 국가가 자명하게 보여주듯이, 그는 풍요롭고, 안전하고, 도덕적이고, 평화롭고, 행복한 사회에 종교 – 주로 유신론적 신앙 – 가 필수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
이 책은 통상의 사회과학 서적과는 다르게 한국 사회에서 적지 않은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20-30대 젊은이들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아마도 그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근 50%에 달하는 종교 인구를 갖는 한국사회의 삶의 질이 그 두 나라와 비교해 너무도 차이가 나기 때문일 게다.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 계속 늘어가는 성폭력, 부정부패의 지속 … 등 50%의 신앙인들이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모습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총기소지와 더불어 대도시에서의 폭력과 살인의 가능성이 항상 넘실대는 대표적 기독교 국가인 미국사회의 예는 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들 두 나라의 높은 안전성, 풍요로움, 평안함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것이 사실이고 진실일진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하지만 주커먼 식의 이런 분석이 지극히 탈맥락적(disengaged) 현상분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주커먼의 해석 틀에는 이들 두 나라를 포함하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문명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그리스도교와 그것의 ‘영향사적 지속’에 대한 이해가 빠져있다. 바이킹으로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이전인 9세기 중반까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바이킹 문화는 야만 그 자체였다. 9세기 중반이후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치며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가치가 점차 확산되어 12세기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리스도교적 문화의 바탕이 갖춰졌다. 13세기에는 최초의 성문법이 만들어지게 되어 비로소 법과 규칙이 준수되는 법치국가의 틀을 갖추게 되었고, 이후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적 가치와 덕목인 정의와 사랑의 적극적 실천에 따라 빈민과 약자를 배려하고 보호하는 복지 국가의 면모 또한 갖춰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이어진 문명사적 전개에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문화는 여타의 유럽 지역보다 더욱 선명하게 그리스도교적 진정성을 드러냈다고 보여 진다.
요컨대 우리가 알고 있는 스칸디나비아반도 국가들은 그리스도교적 정신과 문화로의 패러다임적 문명전환을 통해 그 선진적 문명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 수세기를 거치며 문화와 언어의 형식을 통해 그리스도교적 정신과 가치를 계속해서 다음 세대로 전수해 갈 수 있었으며, 이로써 그리스도교적 집합의식(Geist)이 하나의 ‘마음의 습속(habits of the heart)’으로 작용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 역사·사회적 이해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집합적 차원의 ‘마음의 습속’이 작용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언어적 삶 속에 그리스도교적 정신과 가치로 구성된 ‘초월의 지평’이 작동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초월의 지평’의 작동을 통해 이들 스칸디나비아반도 국가들은 수세기 동안의 역사 전개의 고비 고비에서 ‘세속적 지평’의 강력한 욕구와 유혹을 극복하거나 순화할 수 있었다. 수세기 동안 문명적 전개 과정에서 있었던 양 지평 간의 맞섬과 대화의 과정을 통해 이뤄진 결과가 바로 오늘의 덴마크와 스웨덴 사회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주커먼이 ‘신이 없는 사회’라고 규정한 그 풍요로운 두 사회는 결코 무신론(불신앙)적 삶의 전개로 나타난 결과가 아니라, 실제는 ‘신과 더불어 전개된 수세기 동안의 신앙적 삶의 결과’로 나타난 열매인 것이다. 즉 오늘의 유럽 사회의 불신앙인들이 누리는 그 풍요로움은 현재의 자신들을 낳아 온 그리스도교적 선조들의 신앙적 삶의 열매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의례 조상의 은공을 자손들이 모르듯이 그들은 알지 못한다.
이 점에서 주커먼이 세속화 사회의 대표적 예로 선택한 덴마크와 스웨덴은 결코 세속화된 사회가 아닌 것이다. 양적 통계수치로 보는 세속화된 21세기의 덴마크·스웬덴 사회는 비록 개인 차원의 ‘초월의 지평’이 약화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집합적 차원 – 문화․언어적 및 공동체적 차원 – 에서는 ‘초월의 지평’이 작동한다. 만일 이 집합적 차원의 ‘초월 지평’마저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 – 사실 이 상황적 가정이 주커먼의 의미와는 다르게 진정한 의미의 ‘신 없는 사회’가 될 것이지만 – 된다면 그 사회는 이미 디스토피아의 사회일 것이다.
‘신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니체의 염려가 부질없는 것처럼 들리는 이 시대에서도, 인류 문명을 암흑에서 빛 속으로 들어서게 한 그리스도교의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 여정의 정지를 말하는 것은 곧 강력한 ‘초월 지평’의 위축을 말하는 것이고, 결국 이는 문명의 정박지가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의 세속화를 말하는 것이 곧 인류 문명의 운명을 말하는 것’이라는 필자의 말이 너무 그리스도교적 일까?
sketchbook5, 스케치북5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