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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윌버포스와 인어공주 - 퍼온 글
  • 조은수(성토모 회원)


    원고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몹시 난감했다. 평소 성토모에 열심이었다면 얼마나 할 말이 많을까? 하지만...게으른 종에게 마이크를 쥐어주면 정말 할 말이 없는 법이다.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윌버포스에 대한 책이나 읽고 좋은 구절이나 소개할까나...라는 생각으로 윌버포스의 전기 두 권을 샀다. 이 글을 쓸 때까지 물론 다 읽지 못했다. 읽다가 마감이 닥쳐와서....부랴부랴....컴퓨터 앞에 앉아 쓴다.(부디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정의를 실천하려는 사람에게, 시대 상황은 언제나 비슷한가보다. 윌버포스 시대에 영국 국교회는 서인도제도에 사탕수수농장을 운영하며 재미를 보는 터라, 노예무역(또는 노예제도 자체)이 성경적으로 볼 때 죄악이란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 자체를 아예 외면하거나 철저히 침묵했다. 오히려 당시 노예무역의 참상을 차분히 조사하고 200명이 넘는 노예무역선원을 인터뷰하여 낸 논문의 내용을 두고 말짱 거짓말이요, 과장왜곡보도라고 펄펄 뛰었다.


    또 누군가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내놓으면, 이런 반격들이 쏟아졌다. ‘노예폐지 반대론자는 반역자! 국익을 해치고, 적대국인 프랑스를 이롭게 하는 자! 우리가 노예무역을 그만두면, 남는 노예를 저 프랑스 놈들이 싹쓸이 할 게 뻔한데, 지금 무슨 나라 말아먹자는 소린가! 게다가 이런 막돼먹은 법안이 통과되면 막돼먹은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노예무역으로 이득을 보던 의원들은 이런 논리로 노예무역 폐지론자들을 공격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논리다.


    한편 이런 시대 상황의 어려움 말고도, 윌리엄 윌버포스가 노예무역의 폐지를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일이라고 받아들이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잠깐 동안 큰아버지 부부 댁에 맡겨졌는데, 요즘말로 하면 무늬만 기독교인이었던 양친과 달리, 큰아버지 부부는 문명사회의 교양인이 보기에 적절하지 않은 광적인 신앙을 가진 감리교도였다.(당시 영국 국교인 성공회가 신앙의 본질이 빠져버린 껍데기만 남은 반면, 감리교나 퀘이커, 모라비안 형제회 교인들이 복음주의 신앙을 이어가고 있었던 듯하다.)


    아무튼 주님의 섭리로, 윌버포스는 큰아버지 댁에 맡겨진 2년 동안, 신앙의 본질을 경험한다. 이때 존 뉴튼(노예무역선 선장이었다가 회심하여 그 유명한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쓴)을 만나 아버지처럼 따른다. 하지만 이런 신실한 신앙생활도 잠시... 어린 아들의 지나친 신앙을 몹시 우려한 어머니가 윌버포스를 큰아버지 집에서 다시 빼내와 런던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세속의 향연 속으로 밀어 넣는다. 당시 영국국교회 교인들의 일상생활이었던, 파티와 게임과 사교, 그 즐거움을 맛보게 하자, 어머니의 이 교육방침은 효과를 거두어 윌버포스는 대학시절까지, 나중에 방탕하고 무익한 시간낭비였다고 고백하며 자책하는, 아무 생각 없는 젊은이로 살게 된다. 말하자면 울트라 킹왕짱 파티맨으로.


    그러다가 당시 야망과 비전을 가진 젊은이라면 누구나 하는 유럽 여행(이것도 지금과 참 비슷하다! 아직도 유럽의 패권이 안 변한 건가?)을 가기로 하면서, 부담없이 즐거이 동행할 수 있는 상대를 구하는데, 그가 하필이면 신실한 감리교도였던 아이작 밀너였다. 하지만 윌버포스는 이 유쾌하고 세속적으로 성공한 의사가 그 끔찍한 감리교도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알았으면 절대 유럽여행의 동행으로 초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자기처럼 아무 생각 없는 즐거운 세속인인 줄 알았던 밀너가 엄청 골수 신앙인임을 여행 기간 동안 알게 되고(아차! 싶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여행하는 내내 그와 끊임없이 신앙 토론을 하면서 윌버포스는 서서히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오게 된다. 아...이러는 동안 자그마치 십 수 년이 걸렸다.


    그러고 나서...그럼 회심하자마자 곧 노예제 폐지가 나의 사명이요, 하고 그 일에 뛰어들었는가...하면 그도 아니다. 윌버포스 훨씬 이전부터 노예무역의 끔찍함을 깨닫고 그 폐해와 참상을 알리며, 이 죄악을 영국에서 끊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미들턴 부부였다. 미들턴 부인이 남편에게, 내 생각엔 당신이 의회에 노예무역폐지법안을 발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자 남편 미들턴은 자기가 그렇게 중대한 법안을 상정해서 가결을 얻을 만큼 매력적이거나 영향력 있거나 화술이 뛰어난 인물이 아니라는 걸 파악하고, 얼른 누가 적당할까 고민한다. 이윽고...낙점한 인물이 윌버포스. 미들턴은 윌버포스에게 노예무역폐지법안을 하원에 상정하기를 제안한다. 그래서 윌버포스가 단번에 오케이 했을까? 역시 아니다...윌버포스는 자기가 그 일을 하기엔 부족하다고 처음엔 발을 뺀다. 그러면서도 찾아보고 정 아무도 없으면 제가 하지요...하는 미적지근한 답변과 함께 미들턴 부부를 만나기로 한다.


    되돌아보면, 이 말고도 고비가 몇 번 있었다. 윌버포스는 회심하기 전 화내기 잘하고 사교적이고 웅변술이 뛰어나고 노래 실력에 개인기까지 뛰어난, 게다가 집도 부유해서 화려하고 풍족한 파티를 여는 데 귀재였다. 물론 이런 그의 성품은 화내기 잘하는 것만 빼고(이건 회심한 뒤 많이 고쳐진 듯하다.) 노예무역폐지 운동에 그대로 훌륭하게 쓰인다. 이런 윌버포스가 밀너를 만나 천천히 회심한 뒤 모든 회심자들이 겪는 중대 결단의 유혹에 빠진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기려면 세상의 일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택해야 하지 않을까?’ 윌버포스는 이런 마음속 의문 앞에서 고민 고민하다가, 어릴 적 멘토이자 아버지 같았던 존 뉴튼에게 편지를 보낸다. ‘제가 더러운 정치계를 떠나 순결하게 하나님만 섬기는 목회자가 되면 어떨까요?’ 근데 아마 존 뉴튼은 이때를 위해 준비해두신 듯하다. 존 뉴튼의 대답은 사려 깊은 노우. 자네의 사명은 아마도 정치에 있을 걸세. 뉴튼의 충고대로 윌버포스는 더럽고 타락한 정치계에 남기로 한다. 후유~ 다행이다.


    이런 식으로 윌버포스가 노예무역폐지 운동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으로 받아들이기까지 몇 단계의 고비와 회의와 자기 확인의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 모든 지지부진한 회의와 의문을 하나씩 겨우 통과하고 나서, 노예무역폐지 운동에 몸을 바치기로 하자마자 일사천리로 일이 뚫렸는가? 물론 아시다시피, 아니다. 의회에 발의하기로 한 그 첫걸음부터 병에 걸려 몸져 눕는다. 사실 얼마나 쪽팔리는 일인가? 모든 이에게 자문을 구하고, 신중하게 생각에 기도를 다하고, 온갖 자료를 꼼꼼히 조사하고 철저하게 준비해서, 자 출정~하고 소리를 지르는 순간 와르르~하고 몸이 무너졌으니.


    윌버포스의 매력적인 성품과 모든 이를 사로잡는 웅변의 재능과 사교적인 성격, 부유한 집안 이 모든 완벽해 보이는 천부의 선물 뒷면에는 병약한 몸과 왜소한 육신이 있었다. 윌버포스는 하나님의 깃발을 들고 진격하려는 순간마다 이 병마의 공격에 넘어진다. 꽤 자주...그런데 윌버포스의 전기에 따르면, 이렇게 병마의 공격으로 넘어진 순간마다 깊은 은혜를 체험한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서 진격한다. 그러기를 이십여 년...


    마침내 노예무역 폐지 법안이 가결된다. 그리고 노예제도 자체가 폐지되기까지는 다시 이십오 년쯤 걸린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전에는 윌버포스를 읽고, 전술과 전략에 대해 얘기할까 생각했다.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에서 본 기억으로, 아무리 노예폐지법안을 내놓아도 노예무역과 이해관계가 있는 의원들의 철통 같은 반대로 꿈쩍도 않자, 윌버포스가 정면 돌파가 아닌 약간 상관없는 법안을 표결에 붙여 승리를 따낸다. 근데 이 법안은 사실 노예무역을 실제적으로 폐지시킬 만한, 노예무역으로 이득을 얻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그런 법안이었다. 그런데 그 법안이 뭐였는지 생각이 안 나서, 책을 뒤적이기 시작했는데, 아직 거기까지 읽지도 못하고 마감이 닥쳤다.(한 번 더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대신 영화 소개 하나. 얼마 전에 <나는 인어공주>라는 영화를 봤다. 러시아 여성 감독이 만든 꽤나 발랄하고 상큼한 영화였는데, 거기 아주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남자 주인공이 부동산중개인인데, 이 지구의 땅이 아니라 달나라 땅을 파는 부동산중개인이다. 남자주인공은 아주 화려하게 꾸민 사무실에서 부유하고 유명한 사람들에게 달나라 땅을 유혹적으로 소개하고 경쟁적으로 판다. 그러자 여자 주인공(이 사람이 인어공주다)이 따져 묻는다. “아니, 달나라 땅을 판다는 게 말이 돼? 달 땅이 누구 거라고 어떻게 팔아?” 그러자 남자 주인공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한다. “그럼 지구 땅을 사고파는 건 말이 돼냐? 어차피 마찬가지야.” 하...그거 보면서, 저 러시아 여자 감독이 성토모 회원은 아니겠지... 그런데 성토모의 게으른 회원인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자기 작품을 상큼하게 만들면서, 거기에 놀라운 질문을 쓰윽 끼워넣다니...


    아마 윌버포스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영화감독만큼의 일은 할 수 있을 거다. 열심히 자기가 하는 일에 슬쩍 땅에 대한 의문, 땅을 사고파는 데 대한 근본적인 의문,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들의 땅에 대한 지나친 무관심에 대한 문제 제기를 지치지 않고 하다 보면....어느날엔가는,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던 노예무역제도(노예제도)가 정말 말도 안되고 잔인하며 게다가 국익을 해치고 경제를 망치는 사악한 제도라고 깨닫게 되는 것처럼, 계속 여기저기서 줄기차게 의문을 제기하고 게릴라식 계몽을 하다보면, 우리도 어언 십수...십...년....쯤 흘렀을 때, 부동산투기가 망국적 범죄라는 인식을 전국민이 공유하고, 토지에 매기는 세금이야말로 경제를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깨닫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댓글 1

  • 김장환 엘리야

    2009.01.10 11:48

    글쓴이 소개 : 조은수


    저는 예수원 지원생활을 하면서
    성토모를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인 사상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지금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 보면 희망과 가능성을 느낍니다.

    하는 일은 어린이책에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데
    앞으로 경의선에 관한 그림책,
    땅에 관한 그림책 같은 걸로
    아이와 엄마들을 의식화하는 게 숨겨둔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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