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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통한 세상 읽기 - 존경하는 신약학 교수님의 글을 퍼왔습니다.

  •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세간에 많은 주목을 끌고 있다. 얼떨결에 왕이 된 천민 '하선'이 점점 진짜 왕이 되어 간다는 정항에 영화의 촛점을 맞춘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 시대에 왕,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1) 왕은 법의 정신을 살려 법을 집행할 때 감동이 있다.

      왕이 된 남자 천민 '하선'은 자신의 옷에 맞지 않은 궁중의 법과 질서를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 둘러 쌓여 있다.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면 궁중의 법도가 어떻고 질서가 어떻고 하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그럴 때마다 하선은 주춤 주춤하곤 하였다. 그러나 궁중의 법도와 질서를 말하는 자들의 동기가 지극히 이기적이고 악의적이라는 것을 수 차례 확인 한 후에 궁중의 법도와 질서를 말하는 그들에게 역겨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소위 법도와 질서가 이토록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약자들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할 때나 사용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그가 궁중에 들어와서 처음 느끼는 것 같다. 천민으로 살았을 때는 차별 받는 인생을 운명으로 알고 그러려니 하고 살았건만 이제 좀 힘의 균형을 갖추고 최고 상층부의 사회에 들어 와서 그들의 삶과 발언의 면면을 보니 역겨운 냄새가 풀풀 나는 그것이 보인 것이다. 그러니 하선은 그것들을 무시하고 왕이라는 권위로 궁중의 법도와 절차에 의해 꼬여 있어 풀기 어려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다. 권력 암투의 희생양으로 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 중전의 오라버니 유정호를 그 형벌이 가해지는 현장에 직접 가서 죄가 무엇이냐고 묻고 죄 없음이 진정 어린 목소리로 드러나자 그를 풀어주도록 어명(?)을 내린다. 진짜 법과 질서를 초극하여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법의 정신을 구현한다. 땅을 가진 만큼 세금을 내도록 하는 대동법을 밀어 붙인 것이 바로 그러면서 하는 말 어찌 왕답지 아니하다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법과 질서를 지고의 선으로 생각하고 교육받은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그 법과 질서에 의해 지배 받는 공정한 사회라고 믿는 사람은 정말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마음에 멍우리를 하나씩 얹고 산다. 나 자신이 공정하지 않은 억울한 일을 당해서도 그렇지만 사회적 약자들이 그러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러하다. 용산 참사와 쌍용차 사태와 같은 사건들은 우리 나라가 법과 질서가 지배하는 민주주의 국가로 보게 하기를 참 어렵게 만들고 있다. 법과 질서는 늘 기득권을 가진자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액세서리로 전락해 버린듯한 느낌을 준다. 국무총리, 국무위원들, 감사원장, 대법관들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보았는가? 우리나라의 1%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서민들은 걸리면 실정법 위반으로 입건되는 불법전입, 부동산 투기, 세금 탈루, 병역 면제 등과 같은 것들을 필수적 관행처럼 행해오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이제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또한 안면몰수하고 누구보다고 법과 질서를 지킬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 속에서 참된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 영화 속이긴 하지만 왕이 된 남자, 하선이 바로 이러한 참된 지도자의 통쾌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2) 왕이 된 남자 하선은 아픈 자, 상처받은 자 소외된 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왕이다.

      우리는 광해가 된 그 남자로부터 엄청난 치유를 경험한다. 그는 천민의 마음을 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천민이기 때문이다. 사월이가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마저 생이별하게 된 그 아픈 마음을 그는 몸으로 체험하였다. 그가 왕의 노릇을 엄청 어색하게 느꼈지만 이러한 감정의 복받침을 직면할 때는 여지 없이 왕의 위엄이 분출된다. 대동법을 반대하는 이유를 모르다가 땅을 가진 만큼 세금을 내도록 하는 대동법을 밤새 공부하고 나서는 그것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참으로 필요한 법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그 기쁨에 못 이겨 궁중의 법도를 어겨가며 신하 도승지 허균을 찾아 그가 깨달은 바를 감격에 겨워 말한다: 대동법 그거 참 좋은 것이요. 왜 그가 이처럼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을까? 그것이 가진자나 못가진자가 동일한 양의 세금을 내야 하는 조세 구조의 부조리를 바로잡아 백성들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덜어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의 악의를 알고 나서 그는 민중의 편에서 분노한다. 명나라의 지원군 요청에 마땅히 응해야 한다는 사대주의 사상에 투철한 신하들에게, “대체 이 나라가 누구 나라요”, ‘부끄러운줄 아시요”, “임금이라면 그대들이 죽고 못하는 사대의 예보다 내나라 내 백성이 열 갑절 백 갑절은 더 소중하오!”라고 포효한다. (이 말을 들을 때, 나라 국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이나 일본에 사대의 예를 갖추느라 동분서주 했던 우리들의 지도자들이 생각나는 것은 나뿐일까?) 중전의 오빠의 억울함을 직접 듣고 그를 무고히 참하려는 무리들 앞에서 왕은 절규하듯 애끓는 분노가 발하여진다. 중전이 웃음을 되찾아 주는 것조차 그에게는 천민의 한이 발동한다. 왕노릇! 그것은 거기서 출발한다. 천민의 아픔을 앙의 위치에서 재조명할 때, 그가 흉내를 내는 것이지만 그러나 왕노릇의 가식은 없어지고 참 왕으로서의 면모가 빠짐없이 표출된다.


    3) 왕이 된 남자는 하선은 중전에서부터 일개 여종에게까지 편향되지 않은 평등한 연민의 정을 가진다.

      그들이 아파하고 괴로워 할 때 그는 동일하게 분노한다. 왕이 된 남자, 하선은 중전의 얼굴에 웃음이 없는 것을 보고 궁내에서 유일하게 마음 쓰는 사람이 바로 왕이 된 남자 하선이었다. 그는 그 중전의 웃음을 찾아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만일 하선이 중전에 대한 연민에만 그쳤다면 그나마 기득권에 기댄 매우 편향된 사람으로 비추어 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보다 더 강렬한 연민은 비천한 종이었던 사월이게도 향한다. 그는 사월의 어머니와의 상봉을 위해 왕위에 있는 동안 뿐만이 아니라 그가 왕위를 떠나는 후에라도 꼭 그 상봉이 성사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세심하게 돌봐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선에게 중전과 사월 사이에 차별이 없다. 왕이 된 남자 하선의 연민은 궁중에서 여성 중에서 신분이 가장 높은 중전이나 가장 낮은 사월이를 포괄한다. 지도자의 아주 중요한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주변의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말았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 그 사랑을 본 사월은 하선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 놓는다. 하선의 정적들이 그를 독살시키기 위해 음식에 독을 넣은 것을 알고 있는 하선이 대신 먹고 목숨을 거둔다. 하선을 위해 목숨을 버린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하선을 지근거리에서 경호해 주던 호위무사이다.


      도승지 허균이 묻고 답한다. “왕이 되고 싶으십니까?”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는 왕, 진정 그것이 그대가 꿈꾸는 왕이라면 그 꿈 내가 이루어드리리이다.” 도승지 허균은 왕이 된 남자 하선에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힘들게 말을 꺼낸다. 왜 그랬을까? 진짜 광해 왕에게 그토록 충신이었던 그가 광해를 배신하겠다는 것인가? 이 대목에서 묘한 감정이 교차한다. 허균 자신도 복잡했을 것이다. 하선의 모습에서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마음, 약한 자들에게만 한 없이 약해지지만, 힘을 가진 정적들을 향하여 거침 없이 행동하는 그에게서 그가 원하는 왕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그가 천민이라는 것을 알고 늘 천민처럼 대하여 왔지만 그에게서 왕이 갖추어야 할 모습을 보고 그와 같은 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잠시 착시 현상이 일어난다. 이 순간 살기가 느껴진다. 그가 진짜 왕을 버려야 하는 위기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후에 도승지는 진짜 광해에게 두 왕을 섬긴 것을 참회하며 죽여 달라고 칼을 올려 드린다.

    그러한 그에게 충신이 생겨난다. 나를 위해서만 칼을 써라!라는 말을 기억한 호위무사는 궁을 떠난 하선을 죽이기 위해 좇아 온 자객들과 하선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과 싸움을 벌이다 마침내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도승지도 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천민에 불과한 하선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춘다. 사월은 왕이 된 남자 하선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셨다. 그러나 그 분은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섬기시고 자신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하여 오신 왕이시다. 그는 가진자들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는 위치가 아니라 병들고 소외되고 약한 자들의 친구로 사셨다. 우리가 ‘광해, 왕이 된 남자’라는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가 그것들이라면 우리는 ‘예수, 왕이 된 남자’에 더 열광하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왕권을 위임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왕노릇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우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우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계 5:10). 우리의 왕노릇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영화 속 광해, 왕이 된 남자로부터 배운다.

      
      이필찬교수의 성경 연구
      http://cafe.daum.net/pcleeschool    

댓글 1

  • 김영수(엘리야)

    2012.10.08 18:47

    음~영화를 한번 봐야겠네요.
    지난주일 볼려다 위원회 마치고 피곤해서 집으로 직행해 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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