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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 나라 - 세번째
  • 조회 수: 2126, 2015-02-13 09:26:19(2015-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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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나라 - 세 번째

     

    오실 그이가 당신이옵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이까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혀서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물은 저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을 읽고 있노라면 때로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신명을 토하던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홀로 견뎠어야 할 고통이 어렴풋이나마 느껴집니다.

     

    저 구절을 보면서 한가지 드는 의문은,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상당히 선문답 같은 느낌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당신이 수천년간 예언되어져 왔고 우리가 고대했던 그 선지자, 그 메시아 입니까? 였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소경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문둥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래 내가 그 메시아다 아니다 일언반구 없이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요한에게 전하라는 말씀이 언뜻 와닿지 않습니다. 사실 요 아래에 있는 하나님나라-두번째 글을 쓸때까지도 계속해서 저를 괴롭혔던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표현이 담고 있는 의미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는 맥락이지 싶은데 처음에는 언뜻 감이 안왔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이런 상황에 언급하는 표현을 갖다 붙여놔 봤습니다. 예수님의 의식 속에 하나님 나라는 창조질서의 원형을 회복하는 차원이 있었지 않을까 하는 것이고, 그 일환으로 인생의 어그러졌던 육체를 고쳐서 온전케 하심이었지 않을까 하는 거지요. 그러나 본문의 맥락에서 창조질서의 원형을 운운하기에는 거리감이 있어보입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의 질의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이라는 Context를 벗어나는 해석이라 여겨집니다. 질의와 응답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더욱이 회복이라는 차원에서는 결국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는데 육체의 질고를 고치심이 그 형상의 회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보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함은 인간을 하나님처럼 영적인 존재로서 그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음인데 인간의 병이 낫는다하여 그 영혼이 창조당시의 온전함으로 회복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병들었다 낫는 사람은 다 온전한 으로 회복되는 것이어야 맞겠지요.

    예수님의 대답에 한걸음 더 다가가기 위해서 세례요한의 질문을 자세히 들여다 봅시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메시아 대망 사상이 오래전부터 예언적 성격으로 있어왔지만 결국 메시아 사상은 인간의 고통과 욕망이 만들어낸 개념이라고 봅니다. 그 의미를 선명하게 들어내는 찬송가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칸타타로 가끔 부르는 곡중에 나오는 가사가운데 그 포로생활 고달파, 메시아 기다립니다. 기뻐하라 임마누엘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어느 시대나 어느 문화권이나 형태가 다른 모습으로 메시아 대망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생겨난 본류는 인간의 고통이지요. 대자연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이거나, 사회 구조적 억압이 극에 달할 때 그사회의 문화적 배경을 좇아 각기 다른 형태로 메시아 사상이 발원합니다. 석가모니 이후에 중생을 구원하러 온다는 미륵사상 역시 동양의 대승불교가 가지고 있는 메시아 사상의 또다른 형태라 봅니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을 해결해줄 대체물에 대한 염원이 메시아로 발현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 메시아 사상의 발원이 어느 때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스라엘이 패망이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이스라엘 민족이 거주한 지역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만나는 지역이라 조금만 비가 많이 와도 그들이 일구어놓은 삶의 터전이 폐허가 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벨론 강가에서 목놓아 울었다는 표현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고파 그 옛날 절대왕권 다윗의 시절을 그리워하며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던 시온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염원하지요. 역시 그러한 인간의 고통이 메시아 사상을 만들어 냅니다. 결국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 메시아 대망사상이라고 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전승을 좇아 성서에 일관성있게 다른 용어를 가지고 다른 문화적 배경 속에서 달리 표현되어져 왔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염원하던 와장창 심판을 가져오거나 포로기에나 로마의 억압에서 구원해줄 메시아는 아니었던 거지요. 인간의 고통과 그 필요에 따라 메시아가 등장해야 한다면, 역시 인간의 고통과 필요에 따라 신이 등장해야만 하는 거지요.

    결국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그 필요를 따라 신을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게 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가지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메시아로서의 의식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질문이 바로 저것이었다고 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신은 인간의 필요를 대신해주는 구복적 관념의 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 삶 가운데 우리가 설정해놓은 메시아라는 개념적 틀에 예수님을 껴맞추고자 하는 오류를 우리도 또한 수없이 겪고 있지요. 나에게 닥친,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선한 사람들의 고통들... 불의가 정의를 짓밟는 곳에서 죽을때도 평안하게 눈을 감는 악인들...

        

     

    신명을 토로하던 젊은 세례 요한의 저 갈망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서 요한에게 전하라.

     

    소경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문둥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보고 들은대로 전하라 하신 저 말씀은

    하나님 나라는, 세례요한이 인식하고 그가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던 너희들 관념의 메시아가 몰고올 심판의 나라가 아니고, 소경이 다시 보고 나환자가 깨끗함을 받는 것처럼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나라라는.... 그 나라의 본질적 속성이 세례요한이 말한 심판이 아니고 기쁨과 평화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나라가 심판의 나라라면 저는 그 나라를 결코 기다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나라가 심판의 나라라면 저는 결코 그 나라에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이 가지고 있던 의식의 한계를 예수님이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보다 큰이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

    자연발생적으로 여인의 복중에서 태어난 자 중 세례 요한이 대단히 걸출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지만 거듭나지 않아 하나님 나라를 볼수도 없고 그래서 이해할 수도 없었던 세례요한이었기에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도 그보다 크다고 하신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 나라에서는 크다 작다의 개념이란 것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해를 돕기 위해 쓰신 표현일 뿐입니다. 이것을 오해한 열두 떨거지들이 나중에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더 크냐라고 헛소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임박한하나님 나라라는 시간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 나라는 시간적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또 지리적 위치성을 가진 공간적 개념으로도 역시 설명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언젠가 하나님 나라가 여기있다, 저기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이 기억납니다. 온 우주에 충만한 이신 예수님이 이땅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의 몸으로 오셨듯이, 그가 휘몰고 가는 나라는 시간과 공간 너머에 있는 나라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더더욱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기 힘든 우리들이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다고 봅니다. 계속 비유로 설명하시는 것도 인간의 언어가 가진 한계성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즈음에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거듭남이란 무엇일까요. 대체 거듭나면 우리의 실생활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요. 단연코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오늘날 거듭남이 아프리카로 선교하러 떠난다는 식은 아닙니다. 물론 그럴수도 있겠지요. 2,000년 전 초대교회 당시의 거듭남은 복음이 퍼져나가야 할 상황이었기에 그 복음을 접하고 은혜를 받은 자들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거듭남은 우리의 실생활과 너무너무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도 거듭나지 않아 본적 없는 그 나라이기에 명쾌하게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래서 설명하기도 힘들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파편들을 조각조각 모아보면 확연히 드러나는 퍼즐들이 있습니다. 그 거듭남과 그로인해 볼수 있는 하나님 나라

    한두번의 묵상으로 감잡기 힘든 나라이지만

    다음 기회에 더 묵상을 해서 이어가겠습니다.

     

    **** 

    기왕 이렇게 된 거 갈 때까지 가보지요.

댓글 3

  • 동행

    2015.01.19 20:48

    불현듯 자다가 일어나서 드는 생각은 .... 제가 아직 우리교회의 분위기를 모르고 이런 글들을 올리는건 아닌지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자유롭게 견해들을 나눌수 있는 공간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내용들이 성서의 해석과 관련된 것들이라 자칫 누가되는 것은 아닌지... 게다가 해석이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이데...누가 물어본것도 아니고... 에구......
  • Profile

    김바우로

    2015.01.25 20:49

    그런 게 있을리가요...  이곳이 "자유"게시판인데요... 자유롭게 그냥 계속 가시지요. 염려하지 마시고.

  • 승유맘

    2015.02.13 09:26

    다음편 기대됩니다. 행간을 읽는 성경묵상이 이런거구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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