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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민 신부님.. "내가 믿는 부활은?"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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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바우로

    2012.07.06 16:04

    대단히 신학적(철학적?)인 말씀인데 하드코어 신자라면 반드시 목숨걸고 생각해 봐야 할 테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링크하신 사이트의 내용이 읽기 어려워 아래에 퍼서 달아 둡니다.
    (하지만 이렇게 간략한 글만으로는 그 분의 생각을 오해하기 너무 쉽습니다. 꽤 오래 전에 나온 "예수는 정말 부활했을까?"라는 저서가 있고 근래에 "사랑의 부활:죽기 전에 죽을 수 있을까"라는 책을 내셨는데 이 문제에 관한 그 분의 생각을 알고자 하시면 책을 읽어보셔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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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신앙에 대한 무수한 이론들이 있으나 정작 부활이 무엇인지, 기독교인 자신이 부활에 대해 어떻게 믿고 생각하는지, 부활을 어떻게 체화시키며 살고 있는지, 솔직하고 진솔하며 지성적으로 표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대화문화 아카데미로부터 이러한 편지를 받기 전에 이찬수 교수님이 전화로 저를 이 콜로키움에 초대하면서 “내가 믿는 부활은?”이라는 제목을 주셨다. 이 주제에 대해서 이미 8명의 발표가 있었고 앞으로도 4명이 더 이야기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부활에 대해 내가 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했더니 교수님은 부활에 대한 체험이 사람마다 달라서 부활에 대한 이야기도 사람마다 다르다며 나를 설득했다.
    부활에 대한 다양한 체험, 다양한 견해

    순간 같은 부활에 대한 다양한 체험이 있는가(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마리아의 체험, 토마스의 체험, 베드로의 체험처럼) 아니면 다양한 부활(다양한 부활 이야기)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 머리를 스쳤다. 다양한 부활이 있다면 예수님의 부활도 그 중의 하나가 된다. 앞서 발표하신 8명의 체험은 같은 부활에 대한 다른 체험 이야기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다른 부활에 대한 이야기인가?

    ‘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와 예수님의 논쟁이 떠올랐다. ‘같은’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베드로와 예수님의 생각이 달랐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르게’ 체험했다는 말로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베드로의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그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마르 8,27-33)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도 (그리스도교의) 부활과는 상관이 없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도 있다. 부활 체험에 대한 이야기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아무 상관없는 것일 수도 있다. 시중에 떠도는 ‘연옥 체험’이나 ‘천국 체험’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 예다. 부활에 대한 나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부활 체험에 근거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중요하다.
    부활은 천당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것인가?

    이런 면에서 우리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였는가, 우리로 하여금 부활신앙을 가능하게 한 인생의 물음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교가 부활신앙을 통하여 인류에게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부활 메시지가 단순히 예수님을 믿다가 죽은 사람은 슬픔도 고통도 없는 천당에 되살아나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되리라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전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 보장될 천국을 꿈꾸며 신앙한다. 죽은 다음 부활이 없다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인생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물으며 부활을 믿는다. 그러나 부활신앙은 허무를 달래기 위한 진정제가 아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위대한 신학자들과 영성가들(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마이스터 엑케하르트 등)과 함께 교회가 고백한 부활은 이 정도 수준이 아니다. 더군다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만 부활하고 그리스도를 모르는 나머지 사람들은 부활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은 난센스다. 예수님의 이름과 ‘부활’이란 단어를 모른다고 하여 이 땅에서 수천 년을 살아온 선량한 우리 조상들의 삶을 지옥에 버리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오만이요 망상이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은 불행하게도 이런 수준에서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느님은 고맙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라너(K. Rahner)의 말을 빌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믿는 부활은 고맙게도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는 사후의 삶을 증명하려 들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삶과 죽음을 별개의 것으로 여기며, 영생(부활의 삶)을 인생 후에 얻어 누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부활에 대한 물음을 ‘죽은 다음’의 삶에 고정시킨다. 부활신앙을 ‘죽은 다음의 삶’에 대한 믿음으로 제한하여 이를 믿는 이는 부활하고 믿지 않는 이는 부활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부활을 이런 식으로 다룰 때, 부활신앙은 더 이상 보편적인 인생의 물음이 아닐뿐더러 더 이상 우리의 인생에 의미를 찾아주지 못한다. 부활은 생사에 얽매여 사는 인생의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 삶과 죽음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의 물음이다. 부활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사람은 반드시 생사에 대한 물음을 하나의 물음으로 던져야 한다. 사후와 사후의 삶은 이 과정에서 던져진 질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이 전하는 메시지를 깨우치려 하기보다 부활을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이를 증명하여 믿게 하려는데 급급하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마저 그분의 시체가 ‘되살아난’ 것으로 여기며 이를 증명하려 든다. 빈 무덤이나 현현 사화가 이런 목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예수님은 죽은 다음 무덤에 묻히셨다. 사흘 후에 보니 무덤이 비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분은 부활하셨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 책상 위에 꽃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책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책으로 변한 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억지다. 예수님의 현현을 두고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수 있었겠는가 하고 말하는 것도 똑같은 억지다. 빈 무덤과 현현 사화는 이런 단순한 논리보다 훨씬 심오한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빈 무덤과 현현 사화는 ‘부활한 자의 삶은 무덤 안에 있지 않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진다.

    예수님은 사후의 삶을 증명하려 들지 않으셨다. 그럴 목적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후의 삶’을 지금 당신의 인생을 통하여 보여주려 하셨다. 그분은 ‘사후’를 새롭게 받아들이게 해 주셨다. 인간은 사후에 누리고 싶은 영광을 죽기 전에 누릴 수 있다.(마르 9,1) 그분에게 부활의 삶은 일생을 걸고 일생을 통하여 보여줄 수 있는 삶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죽고 난 다음 다시 살아나 영생을 산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언제 우리도 그분처럼 죽기 전에(일상의 삶에서)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언제 우리도 그분처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하고 말할 수 있을까, 언제 우리도 그분처럼 남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까, 하고 묻는 것이다. 이런 물음이 없이는 부활의 삶을 살 수 없다. 설사 죽어서 천국에 간다 해도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분처럼 ‘지금’, ‘죽기 전’에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활신앙은 지금 여기 살아 있는 우리 인생에 희망의 빛을 비추어준다. 부활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다. 지금 여기서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 영원한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한다.
    하늘을 체험하기 위하여 인간은 땅을 떠날 필요가 없다

    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의 복음에 근거한다. 그분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다. 이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하늘나라에서 아버지 곁에 계시다가 아버지의 명을 받아 지상에 내려오시면서 가지고 오신 비책이 아니라(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하느님의 아들로 생각한다.) 인간의 아들로서 그분이 세상에서 체험하신 것이다. 마르코는 이를 하늘이 찢어지는 체험,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체험, 성령의 체험으로 표현한다. 예수님은 당신이 체험하신 바를 복음으로 선포하셨다.

    하늘이 찢어졌다는 것은 생사를 갈라놓는 인간의 사고가 찢어지는 체험을 암시한다. 인간은 하늘과 땅, 성과 속, 하느님과 인간, 삶과 죽음, 생전과 사후, 천당과 지옥, 영과 육 등을 이분법적으로 갈라놓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이는 인생을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종교는 종교의 구실을 망각하고 도덕적 집단이 된다.) 그분은 이런 사고가 찢어지는 체험을 하시면서 인간의 아들인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체험하셨다. 죽고 사라지는 당신의 유한한 생명에서 불사불멸의 삶, 영원한 삶(영생)을 체험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본래 죽지 않는 생명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이 생명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당신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의 아들딸이다.)을 체험하셨다. 온 세상(만물)에서 불사불멸하시는 신의 현존을 체험하신 것이다. 하늘을 체험하기 위하여 인간은 땅을 떠날 필요가 없으며, 영생영복을 얻기 위하여 시간을 떠날 필요가 없다. 인류는 이를 믿어야 하고 믿기 위해 생각을 달리 먹어야 한다.(마르 1,15)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깨달아야’ 한다. 나 자신과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생명을 느껴야 한다. 이를 느끼는 삶이 부활의 삶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일생을 통하여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예수 믿으면 죽은 다음 다시 일어나 영원히 잘 살게 된다”는 정도의 약속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 복음에 근거하지 않은 부활은 부질없는 인간들의 헛된 망상이나 이론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과 관계가 없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복음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복음의 삶을 살지 못한다.
    *이 글은 이제민 신부가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주관하는 <삶의 신학 콜로키움>에서 발제한 내용을 필자가 다시 보완정리한 글입니다.
  • Profile

    김바우로

    2012.07.06 16:13

    그리고 이 분의 책을 읽으시려면 같은 주제에 대한 다른 견해의 책도 반드시 함께 읽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같은 보통 신자들을 자칫하면 신학자(?)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ㅠㅠ
  • 김장환 엘리야

    2012.07.06 17:15

    자칫 오해할 수 있고 논쟁할 수 있는 내용인데...
    좋은 글 감사합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다면, 그 소망이 진짜라면, 지금 여기서 그 소망을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영생은 죽어서 내세에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여이거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새로운 삶의 질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고, 요즘 수요예배에서 나누듯이 '내가 죽고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는 삶!'인 것이죠.

    그렇게 살면 죽음 이후에도 예수님 안에서 영원히 사는 삶이 펼쳐지는 것임을.....
    그래서 우리의 관심은 내세가 아닌 현재, 피안이 아닌 역사의 한 복판이어야 함을.....

    '주님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것이 복음입니다.

    - 이상 엘리야 사제의 소견!
  • 김장환 엘리야

    2012.07.06 23:00

    제자 양육 - 118번, 137번 글을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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