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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좋은 싸이트에서 글하나 펌
  • 조회 수: 1335, 2003-10-27 03:22:26(2003-10-27)
  • 안녕하세요
    www.mindlle.com 이라는 곳을 검색하다가
    좋은 글이 있어 올려봅니다.

                    마가복음 4:35-41

    예수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배에 탄 채로 뭍에 있는 무리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 때쯤, 예수는 제자들에게 바다 반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였다. 그리고, 무리를 남겨 두고 배를 타고 반대편을 향해 떠났다. 예수는 늘 무리를 사랑하여 그들과 함께 있었지만, 가끔은 이렇게 그들을 떠나기도 하였다(막 6:31-32 참조). “무리를 남겨두고”에서 ‘남겨두고’(aphentes)라는 단어는 본래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둔다’는 의미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이 이야기가 나오는데(마 8:23-27; 눅 8:22-25), 여기서는 “무리를 남겨두고” 갔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예수와 제자들이 자기들끼리만 좀 쉬기 위해서 무리들을 내버려 두었다는 것이 좀 낯설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배가 가는 동안, 거센 바람이 일어서 파도가 배 안으로 들이쳐 물이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는 태연하게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잠을 자고 있다(38절). 갈릴리 바다의 폭이 10km 정도 되니 건너편까지 가는 데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예수가 잠이 들었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을 가르치느라 피곤해서라고 상상해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38절은 예수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잠을 자고 있었다고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를 한다. 고물은 배의 제일 높은 곳이니 아직은 물이 차지 않은 곳이라 할 수 있다. 베개를 베고 잔다고 하는 것은, 잠깐 눈을 붙이거나 조는 것이 아니라, 편한 자세로 평온하게 잠을 자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가 잠을 잤다는 내용은 있지만,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잤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배가 위기에 처해 있는데 예수가 한가롭게 잠을 잔다거나, 피곤해서 골아떨어졌다거나 하는 것이 어쩌면 좀 어색해 보여서일 것이다.

    하지만, 예수도 길을 가다가 피곤하여 우물가에 앉아 쉰 적이 있다(요 4:6). 예수가 때로 무리들을 떠나서 외딴 곳에서가 쉬었다거나,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자고 있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것이며 역사적 사실에도 더 가까운 것이다.
    예수의 그런 모습은 우리가 고정관념처럼 갖고 있는 그리스도상을 깨뜨릴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피곤하지도 않고 쉬지 않고 일하고 호통을 치는 그리스도상에는 익숙하지만, 혼자 떨어져서 쉬거나 잠을 자는 예수의 모습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60-70년대의 사회상을 예수에게 투영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은연중에 잠자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다. 60-70년대를 살아온 이들은 잠을 많이 자는 것은 미련한 것이고, 게으른 것이고, 가난의 지름길이라고 귀가 따갑게 배워왔다. 새벽같이 일어나 신문을 돌리고 밤늦게까지 야근을 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져 왔다. 이른바 나폴레옹 수면법이라고 하면서, 하루에 네 시간 자고 수시로 깜빡 깜빡 졸면서도 건강을 유지하고 성공할 수 있다고들 가르쳤다. 특히 수험생들은 네 시간 자면 붙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말까지 하면서 잠을 아껴서 성공하려고 기를 써왔다. 교회는 더욱이 새벽기도와 철야기도를 강조하면서 새벽에 잠자는 사람들이나 밤새워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영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몽매한 사람들로 여겨 왔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교회에서 강조하는 것은 깨어있으라고 하는 경고의 말씀들이다. 물론 성서에서는 깨어있음을 강조하며 특히 종말론적 가르침에서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늘 깨어 있으라고 하는 경고가 많이 나온다. 그러한 것은 하루하루를 늘 마지막 날같이 여기며 사명을 잊지 말고 살라는 것이지, 휴식이나 잠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쁜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와서, 좀 쉬어라” 하고 권하기도 하였다(막 6:31).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는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고 초대하기도 하였다(마 11:28).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입을까 걱정하면서 잠시도 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공중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화를 보아라, 하면서 삶의 여유를 찾고 무엇을 위해 그리 바쁜지 돌아보라고 하였다(마 6:25-34). 거센 풍랑 속에서도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잠을 자는 예수의 모습은 이런 예수의 모습에 꼭 어울리는, 아주 정겹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그 평화스러운 모습은 제자들의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제자들은 다급하게 예수를 깨우면서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배에 물이 가득 차자 그들은 배가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거의 이성을 잃었고, 예수에 대한 믿음도 잃었다. 그리하여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고 예수에게 책망조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태도가 얼마나 불손했는지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똑같이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하는 구절을 삭제해버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예수는 나중에,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면서 그들을 꾸짖었다.

    이런 예수의 꾸짖음에서 문제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것은 잠을 자고 안 자고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있고 없고의 문제이다. 예수가 그렇게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잘 수 있었던 것은, 피곤해서도, 게을러서도, 무관심해서도, 또는 성격이 태평해서도 아니다. 아무리 풍랑이 몰아쳐도 그 배는 바다 건너편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요, 거기서 또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이다. 예수의 믿음은 거센 풍랑에, 그 위에 떠 있는 작은 배에 자기를 내맡기고 평온히 잠을 자는 모습에서 온전하게 나타났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믿음 하면 불굴의 의지나 신념,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집념 같은 것을 떠올린다. 믿음과 잠을 연결시키기에는 상상력이 부족하다. 그러나 그런 것만 믿음은 아니다. 예수에게서 진정한 믿음은 풍랑에다가, 배에다가 자기를 온전히 ‘내맡김’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그는 쿨쿨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자기를 내맡기지 못하는 제자들은 바람과 파도와 물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호들갑을 떨었고, 예수는 그것을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꾸짖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일어나 바람을 꾸짖고, 바다더러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하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도 고요해졌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예수가 바람과 바다를 꾸짖었다는 내용은 나오지만, 바다에게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하고 말하는 것은 나오지 않는다. 예수가 인격체가 아닌 대상에게 말을 하는 것이 어색해 보여서일 것이다. 하지만 예수가 바다에게 말을 한 것은 중요하다. 흔히 사람들은, 마태와 누가에만 의존하여, 예수가 바람과 바다를 꾸짖었다고 생각하고, 그것은 바람을 정복하고 바다를 평정하는 메시아적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39절을 꼼꼼히 살펴보면, 예수는 바람을 꾸짖었지만, 바다에게는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하고 말하였을 뿐이다. 여기서 ‘꾸짖다’는 말도 그 대상이 인격체일 때는 ‘나무라다’는 의미일 수 있지만, 그 대상이 비인격체일 때는 꼭 그런 의미일 수 없다. 그건 마치 짐승을 나무라는 것과도 같다. 기르는 짐승이 낯선 사람에게 짖거나 사납게 굴면 주인은 꾸짖기도 하고 손으로 토닥거리기도 한다. 그건 그 짐승을 꾸짖는 것이라기보다는 달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수가 바람을 꾸짖은 것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예수가 바다에게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하고 말한 것도, 바다를 제압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바다와 대화를 하고 달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말을 듣고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졌다는 것이다. 비인격체인 바람과 바다가 예수의 말씀에 반응을 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는 바람이나 바다에게 말을 걸면 그것들이 말을 들을 정도로 바람과 바다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제자들은 바람과 바다를 투쟁과 정복의 대상으로 보았기에 풍랑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지만, 그것들과 하나가 된 예수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것들에게 자기를 맡기고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런 예수 앞에서 바람이나 바다는 사나운 적이 아니고, 꾸지람을 들으면 겸손해지기도 하고 말을 하면 말귀도 알아듣는 친구였다.

    그래서 이현주는 마태복음 8장 24절을 읽고서 이런 시를 썼다.

    잘 죄어진 차창(車窓)은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는 몸에서 흔들리지 않는다.

    헤엄 잘 치는 사람은 파도를 겁내지 않는다.
    파도와 한 몸 되는 비결을 알기 때문이다.

    물은 물을 빠뜨리지 못하고
    불은 불을 사르지 못하느니.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은 파도를 베고
    폭풍의 바다 흔들리는 배에서 저렇게 주무시는 것이다.


    수련의 계절이다. 때로 예수처럼, 무리들을 내버려 두고 떠날 수 있어야겠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겠다. 그리고 지난날을 돌이켜보자. 뭔가를 이룬다고 목표를 세우고 분주했지만, 내 뜻대로 된 것보다는 내 뜻을 넘어서서 된 것이 더 많지 않은가. 평생토록 열심히들 공부하면서 지성을 닦아 왔지만, 삶의 중요한 결정들은 그런 지성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우연한 만남이나 느낌, 직관, 영감, 또는 꿈속에서 본 것 등에 의해서 결정되는 일이 많지 않았는가. 어떤 일을 포기하지 않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노력하는 것도 믿음이겠지만, 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분에 대한 푸근한 믿음에서, 때로 현장에서 떠날 수도 있고 집착하던 것들을 내버려 둘 수도 있는 것, 그리고 바람을 이고 파도를 베고 늘어지게 골아떨어져서 잠을 잘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경지가 아니겠는가.(월간 <홀씨> 200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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