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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년 8월17일] 로마서 8:28-30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 청지기
    조회 수: 2523, 2008-08-18 21:21:10(2008-08-18)
  •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유혹에, 시험에, 환란에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들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연약한 우리 성도들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이 함께 계시다는 특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는 비록 자신은 연약하여 할 수 없지만 성령님을 의지함으로 그 인도하심에 따라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말씀과 기도라는 두 노를 굳게 잡고 배를 저어나갈 때 성령님은 나의 등 뒤에서 연약한 나를 도우시며 믿음의 항해를 전진하게 해 주십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이 놀라운 성도의 특권을 누리다가 이 자리에 나오신 줄 믿습니다.

      이렇게 연약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28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으로는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너무나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연약한 우리는 이 말씀으로 인해 위로를 얻고 소망을 갖게 되고 인내가운데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로 낙심하고 환란으로 인해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우리의 삶에 선, 좋은 결과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선’, ‘좋은 결과’가 무엇일까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다분히 주관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본성이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몸의 행실에 흔들리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선’, ‘좋은 결과’를 말하면, 은연중에 내가 바라는 결과만을 생각합니다. 나라 경제가 어렵고 모두가 힘들지만, 내가 하는 사업만은 잘 되기를 바라고 잘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갖습니다. 똑같이 공부해도 내 자식만은 좋은 대학에 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나만은 무병장수하고 마침내 만사형통하는 인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바라는 ‘좋은 결과’를 그리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총 안에 있으니 모든 일이 잘 됩니다. 온갖 일이 다 잘됩니다.’

      물론 성경은 이 모든 것을 약속합니다.
      잠언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실제로 구약에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그 후손 이삭과 야곱은 그 인생길에 고난이 있기도 했지만, 잠언의 말씀대로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 넘쳐 났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연약함이 여기에 나타납니다. 잠언 22장 4절 말씀 중에 뒤 부분(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에 마음을 빼앗기면서도 앞의 말씀(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에는 주목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교훈에도 동일한 반응을 보입니다.‘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라는 마태 6장 25절의 말씀 앞에서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말씀은 와 닿는데,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는 관심이 잘 가지 않습니다.

      로마서 8:28절을 읽으면서도 동일한 우를 범합니다. ‘선’, ‘좋은 결과’를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느님이 내 인생에 두고 계획하신 ‘선’과 ‘결과’로 생각하지 않고 나 자신의 생각과 욕심에 따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이 생각하시는 ‘선’, ‘좋은 결과’란 무엇일까요?

      29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라는 말씀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이루시는 ‘선, 좋은 결과’입니다.

      여기에서 ‘본받는다.’는 말은 ‘동일한 형태’를 갖춘다는 의미로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필립비 3장 21절의 말씀을 보면,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를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똑 같이 변화되는 영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의 됨됨이 닮아감으로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작은 예수’가 되는 성화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죄인 되었을 때(B.C) 바라던 물질과 영광과 건강이 없을지라도 구원받은 내가 예수님의 됨됨이를 닮아가고 마침내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변화되어 새 하늘 새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 이것이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이루시는 ‘선, 좋은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축복의 내용이고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믿음의 목표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느님께서‘모든 것을 합력하여 이루어 주시는 선’의 모습을 에페 1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선, 좋은 결과라는 것의 실체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존재로 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거룩하신 하느님과 인격적인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삶을 말합니다.

      에덴에서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 거닐던 그 영광스러운 삶의 교제를 묘사하는 것으로, 우리 원형의 회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주님과 함께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는 영광!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가끔 엿보지만, 주님의 재림으로 영화롭게 되었을 때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누리게 되는 천국의 실체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에게 하느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실감이 나시는지요?

      그래서 에페소서 1장 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이제 29-30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이 놀라운 영적인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자들을 하느님께서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신 자들을 하느님께서 의롭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의롭게 하신 자들을 하느님께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천국의 영생을 누리게 되는 구원은 철저히 하느님의 주도적이고 완벽한 계획으로 인한 것임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 각자를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미리 정하셨습니다.
      에페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느님이 우리 각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각 사람으로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부모나 가족을 통해서, 친구를 통해서, 이웃을 통해서, 또 많은 경우 인생의 고난을 겪으면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예수님을 주님을 영접하게 하시어 이 예배의 자리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 구원을 은혜를 생각하면 고난이 유익한 것이고 참 감사한 것입니다. 동의하십니까?

      그리고 마침내 주님 다시 오실 때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는 영화롭게 변화되고 천국의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 15:19-20,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사람이 되셨읍니다.’
      고전 15:42-44,‘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0절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이 동일하게 부정 과거 형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 동사의 시제를 동일하게 과거의 사건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구원은 삼중시제로 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원의 과거시제 -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구원의 현재시제 -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 그리고 구원의 미래시제 - 영화롭게 하시고. 이렇듯 영화는 구원의 미래 시점에도 왜 과거형 동사를 사용하신 걸까요?

      그것은 하느님이 주도면밀하게 작정하신 구원의 계획 속에서 보면, 아시고 정하시고 부르시어 의롭게 된 사람들은 영화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삼중시제로 이루어져 있지만 우리는 흔히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직 경험되어 지지는 않았지만, 의롭게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은 이미 우리의 삶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구원의 계획이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이 하느님을 거역하고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되면 다시 하느님 앞에 서는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비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신약시대에는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어 그 영광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이유는 오직 하나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를 구원하시어 창조 때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자하는 그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교리적인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회복시키고자 창조 이전부터 계획하시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8절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라고 했습니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믿음의 본질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향한 이 놀라운 하느님을 사랑을 깨닫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여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가 누릴 영광을 바라보며 나그네 된 이 땅의 삶 속에서 고난이 있을지라도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내 삶에 ‘선, 좋은 결과’를 이루어가는 주님의 손길임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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