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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T식 성경 읽기, 과연 나쁘기만 한 것인가?]
  • QT식 성경 읽기, 과연 나쁘기만 한 것인가?]

    방금 낸시랭의 신학펀치 4편 "QT식 성경 읽기는 문제가 되나요"를 인터넷으로 보았다. QT식 성경 읽기가 두 학자에 의해 일방적인 펀치를 맞아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물론 상당히 훌륭하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유익한 내용이 많았다. 그러나 과연 두 분이 지적한 것이 QT식 성경 읽기의 전부일까? 두 분 역시 자신들의 학문적 성경 읽기라는 틀에 갇힌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그간 처해온 환경의 산물이며 누구나 고유한 편견이 있다. 그 누구도 이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필자 역시도 마찬가지다.

    QT 과연 나쁜 독법이기만 할까?
    미슈나, 탈무드와 같은 고대 유대 문헌에서 볼 수 있는 성경 해석학은 정말 역사적 문학적... 접근을 무시한 심각한 QT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황당하다. 원래 의도에는 관심이 없어 보일 정도다. 신약은 상대적으로 구약의 문맥을 소중히 여기는 편이지만 신약 저자들의 구약 읽기는 당시 유대인의 구약해석처럼 QT식인 경우가 많았다. 때론 알레고리 적으로 때론 상징적으로! 그들에겐 구약의 역사적 문맥과 원래 의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리스도가 오신 당시 상황을 배경으로 구약을 새롭게 읽었고 자신들의 상황에서 해석해 나갔다. 그래서 그들에겐 이사야서의 역사적 문맥은 그리스도와 초대교회의 영적인 문맥을 위한 예언으로 변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약의 저자들도 구약의 정확한 역사적 문맥과 치밀한 문학적 구조나 학문적인 의도를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예를 들어 사도바울은 고전 10장에서 구약의 백성이 홍해를 건넌 것이 세례를 받은 것이며 만나를 먹은 것이 성만찬에 참여한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참으로 기발한 알레고리적인 적용이다. 당시 백성이나 모세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닐 것이다. 원저자의 역사적 의도와 문맥을 벗어난 QT식 적용은 신약에 허다하다. 정확하게 이는 당시 많은 이의 평범한 고대문헌읽기 방식이기도 했다. 원저자가 아마 바울의 글을 본다면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닌데”라 말하지 않을 것같다. 원래 많이들 그렇게 직관적으로 읽으니까.

    복음서의 저자들이 구약을 예수님에게 적용하는 부분도 꾸지람을 들을만하다. 그들의 적용이 원저자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과연 역사적 저자의 의도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전부일까? 물론 원저자의 의도를 무시하면 본문을 통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하나님 말씀의 생명이란 역사적 저자들의 의도에 다 담기에 너무 큰 것은 아닐까? 성경은 분명히 그 저자들의 생각보다 위대하다. 그리고 QT식 읽기가 전부 엉터리고 비상식적인 결론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탐욕을 버리고 상식을 중시할 때 어느정도 비상식적인 해석에 대한 건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다양한 문헌들도 성경을 대체로 QT식으로 읽은 흔적을 보여준다. 초대교회 사막의 교부들이 성경을 읽는 방식은 소위 순수한 QT 방식이었다. 렉시오 디비나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래도 그들 중에는 성인들이 많이 나왔다. 역사적으로 불 때도 절대다수의 신앙인들은 QT식의 성경 읽기로 신앙을 지켜왔고 나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다. 그리고 지금 다수 기독교인도 QT로 영적 양분을 성취하고 있다.

    QT는 주로 정보습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을 분석적 비평이 아닌 겸손, 초연함, 생동감, 수용적 자세로 접근하다. 그저 하나님 곁에 머물며, 온유한 자세로 생명의 말씀 아래 서는 자세로 읽는 것이다. QT는 성경을 기도하며 경청하는 마음으로 묵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을 역동적으로 대면하여 지금 우리의 삶의 구체적인 이야기 속으로 직접 연관시키게 된다. QT는 단순한 성경읽기를 벗어나 "말씀으로 기도하기"다.

    초대 교회부터 내려온 성경묵상은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독서)라는 이름으로 13세기까지 수도사들 사이에서 널리 행해졌다. 13세기에 들어서 스콜라 신학의 학문적 성경읽기가 도입되며 신학교육에도 성경에 관한 질문과 논증에 관심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14세기 부터는 묵상기도의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을 "감정 위주의 성찰과 감성을 자극하는 생각의 훈련"으로 보아 자아 중심적인 묵상의 문제가 지적되기 시작했다.

    그간 지나친 주관적 독법으로 말미암아 상당히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했고 이를 고치기 위해 계몽주의 이후 역사적 문학적 성경 읽기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사적 문맥에서 성경 읽기, 본문의 원래 의도를 찾아내기 등의 분석적인 독법은 사실 계몽주의의 산물이지 전부터 있었던 방식은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에도 수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계몽주의의 합리적 틀에서 성경을 분석하고 비판한 것이다. 성경을 일반 역사 문헌처럼 분석하며 비판하며 나온 결과물에 성경을 순진(?)하게 근본주의자의 시각을 읽던 많은 이의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때론 과도한 비판 가운데 많은 유익을 얻으면서도 정경의 올바른 읽기로 자리매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QT는 사실 성경이 생겨난 이후 기독교인의 가장 보편적인 성경 읽기 방식이다. 정경을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서 분석해나가는 사회 과학적 독법이 계몽주의 이전에는 보편적이지 못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이후에도 어느 나라 어느 역사에도 대중적이 되진 못하고 있다. 물론 QT식으로 읽어도 마음이 순수하신 분들은 대체로 상당히 유익하고 풍성하게 적용한다. 또한, 직관적 묵상이 그 의미를 얻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구절들도 많다. 예를 들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임이요”,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와 같은 말씀이다. 물론 용어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를 아는 것은 소중하다. 그러나 이해와 얻는 것은 다르다.

    현대의 역사적 문학적 성경 읽기 독법은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그 의미를 얻는 데는 크게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모든 성경 읽기 방식은 시대의 산물인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역사적 혹은 문학적 성경 읽기도 때론 QT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다. QT는 위험하다. 그러나 유승원 박사의 말처럼 “학문의 감옥, 형식논리의 굴레, 방법론의 동굴, 아카데미아의 오만과 독선과 무식”도 지적받아야 한다. 나쁜 QT에 대한 지적이 모든 QT에 대한 거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학문은 절실하게 필요하다. 결국, 올바른 이론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문은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어도 삶을 그 방향으로 살게하는 능력까지 제시하지는 못한다. 좋은 사회학자가 위대한 사회운동가가 아닌 것처럼! 좋은 QT는 신학을 연구한다고 얻기 어려운 신양의 열정과 세상을 헤쳐나갈 신앙의 힘을 제공한다.

    성경을 QT방식으로 읽어 상당 수가 성경의 원래 역사적 의미를 오해한다. 그러나 성경을 역사적으로 접근하여 많은 이가 신앙을 떠나기도 한다. 위험은 어디나 존재한다. 그러나 위험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 맹신하지 말고 요긴하게 잘 쓸 뿐이다. 예전 중국에서 단기신학강의를 할때 느낀 점이다. 중국 목회자들은 신학을 모르고 성경만 큐티식으로 읽어도 어찌나 신앙이 뜨겁고 헌신적이던지! 그런데 신학을 몰라 심각한 문제들이 아주 아주 많았다. 신학으로 신앙을 키울 수는 없다. 신앙을 올바르게 다듬고 깍아줄 뿐이다. 그리고 신앙은 신학을 키우지 못한다. 신학의 방향을 통제할 뿐이다 신학없는 신앙은 독선에 빠지기 쉽다. 신학은 확실히 신앙의 폭을 넓혀 준다. 그러나 신앙없는 신학은 사람의 영혼을 메마르게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이 답을 얻기 위해 성경을 보는 것이다. 또한, 성경을 읽는다고 이 마음이 자동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이 마음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심하게 과장해서 말하자면 나머지는 이 마음을 얻는 다양한 "수단"일 뿐이다. 삶의 진리란 참으로 제한될 수 없이 통합적이다. 그래서 올바른 성경 읽기에 대한 틀을 미리 정해놓고 시작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언제나 시대의 산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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