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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퍼온 글 - 자연과학과 신학 通하라
  • 박찬호 총장(조직신학)의 글 "자연과학과 신학 通하라"가 <복음과 상황> 210호(2008년 4월자) 58-63페이지에 실렸습니다. 아래는 그 전문입니다.


    자연과학과 신학 通하라  

    지난 세기 가장 활발하게 토론되고 핵심적으로 부상하였던 조직신학의 주제는 삼위일체론이다. 그래서 20세기는 바야흐로 소위 삼위일체론의 부흥시대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지난 세기의 미완의 과제로 21세기 조직신학의 중심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주제 중에 하나가 자연과학과 신학의 관계이다.

    어쭙잖게 신학이 자연과학에 관여하였다가 낭패를 당한 대표적인 경우를 우리는 갈릴레오에 대한 당시 가톨릭 교회의 정죄에서 볼 수 있다. 성경은 지동설이 아니라 천동설을 지지한다는 것이요 그 근거 구절로 여호수아 10:13을 언급하였다. 이에 대해 갈릴레오는 “성경은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길을 말해 주지, 결코 하늘의 운행에 관해서 말해 주는 책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결국은 이러한 싸움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이 있음을 비교적 정확하게 지적한 말이다.
      
    우리의 신앙과 삶에 있어 성경이 가지는 권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경이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망라된 (exhaustive) 지식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음을 유의해야 한다. 예컨대 공룡이나 담배는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 물론 성경이 공룡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공룡이 실재하였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성경이 담배를 전혀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다른 성경의 원리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담배를 피우는 것이 정당한지 여부를 토론할 수는 있을 것이다.
      
    성경은 구속사적인 관심으로 쓰여진 책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에 관한 충분한 (sufficient) 지식을 제공해 준다. 하지만 성경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요한복음 말미(요 21:25)에 나오는 표현처럼 복음서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것을 망라해주지 못하듯이 성경도 마찬가지로 선별된 주제만을 다루고 있다고 보아야 정당할 것이다.
      
    창조과학회는 시대정신인 진화론에 용감하게 맞서서 하나님의 창조를 주장한다는 면에서 칭찬받아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성경을 잘못 읽고 있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의 관심은 잃어버린 세상의 구속이다. 이런 성경적인 관심을 넘어서서 과학적인 관심으로 성경을 읽어서 성경이 과학적으로 보아도 무오하다는 주장을 창조과학은 하게 되는데 이는 일견 대단히 고무적인 결과인 것처럼 비쳐진다. 하지만 과학 이론 자체가 갖는 잠정성 때문에 이런 시도는 무모하다 못해 자체적인 모순을 배태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창조론을 지지하면서도 창조과학회의 주장에 선뜻 동조할 수 없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3가지 입장

    보통 자연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하여 3가지 정도의 입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로 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식의 생각인데 슐라이어마허 이래로 자연과학과 신학의 갈등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다. 자연과학은 자연현상의 ‘어떻게’(how)를 다루는 것이라고 한다면 신학은 자연현상의 ‘이유’(why)를 탐구하는 것이라는 식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의 갈등은 발생하지 않는다. 창조론이나 진화론 모두 통용되는 각각의 독자적인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창조론을,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배우면서도 아무런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자연과학과 신학이 전혀 다른 영역을 다루기 때문에 자연과학과 신학은 무관하며 서로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주장과는 반대로 자연과학과 신학은 갈등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진화론과 창조론이 날카로운 대립의 각을 세우는 것은 자연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해 이러한 이해를 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이런 입장에는 흥미롭게도 과학주의(scientism)와 창조과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함께 속하여 있다. 가장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만 이 또한 바른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처음의 입장이 자연과학이나 신학 양자의 주장 모두를 긍정하는 쪽이라면 두 번째 입장은 자연과학이나 신학의 주장 중 어느 한 주장만이 옳다고 주장한다. 자연과학과 신학에 대한 다소 애매한듯하지만 가장 바른 관계 정립은 서로 간에 대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일 것이다. 이 점에서는 아인슈타인의 명언이 있다. “종교 없는 과학은 불완전하며, 과학 없는 종교는 맹목이다” (Science without religion is lame, religion without science is blind). 서로 무관하다고 비껴가지도 말고, 반대로 불필요한 정면대결도 하지 말고, 서로 간에 배우려는 자세로 진지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과학이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우주라는 공간과 그 시간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은 인간이 사는 지구를 중심으로 비교적 짧은 시간을 그 관심의 대상으로 하는 듯하다. 즉 6천년이면 커버할 수 있는 것이 인류의 역사요 성경 전체의 역사이다. 물론 이런 주장은 과학의 연구 결과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인류와 우주의 역사에 대하여 짧게는 수십만 년을 길게는 수십억 년을 이야기하니 차이가 커도 너무 크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과학의 연대 측정법에 오류가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주장한다. 충분히 가능한 반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의 역사를 6천년으로 제한하는 것은 이런 과학의 연대측정법이 잘못될 수 있다는 주장을 떠나 성경 내적인 증거를 통해서도 잘못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얼마 전 필자는 올리버 버스웰(Oliver Buswell, Jr.)의 조직신학을 동료 교수님과 공역하였다. 버스웰은 대단히 보수적인 신학자로 알려져 있는 분인데 놀라운 것은 그의 인간론에 보면 소위 창세기의 족보가 망라된 족보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와 있다. 그 증거로서 버스웰 박사는 창세기 11장에는 없는 ‘가이난’이라는 사람이 누가복음 3장의 족보에 들어가 있는 것(눅 3:36)을 들고 있다. 우리가 성경의 영감을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증거는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의 족보가 망라된 족보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즉 6천년을 인류의 연대로 주장하는 것이 성경 안의 증거를 통해서도 지지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류가능한 과학의 측정방법을 통해 나온 결과인 20만년도 정확한 것이 아니라면, 성경을 나름의 방법으로 읽어 추론해낸 6천년도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창세기 1장의 ‘날’을 24시간의 날로만이 아니라 지질학적인 연대로 읽을 수 있는 여지가 발생한다.
      
    버스웰의 조직신학을 번역하며 느낀 것은 벌코프의 조직신학과 함께 버스웰의 조직신학이 좀 더 빨리 번역이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었다. 두 분 다 보수적인 신학자이지만 서로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하나의 모범답안만을 인정하고 정답을 두 개 이상 인정하게 되면 심정적으로 불안해한다. 한국 교회가 최근까지 개역 성경이라는 통일된 성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나름의 커다란 축복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잘못된 성경관을 갖도록 조장한 측면 또한 없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요즈음 개정 개역이라든가 다양한 번역 성경이 사용되는 것은 평신도들 입장에서 겪는 혼돈도 있겠지만 긍정적인 부분 또한 많이 있다. 성경의 원본은 무오하지만 무오한 유일의 성경 번역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겸허한 인정이 필요하다. 하물며 어떤 성경 구절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어떤 견해만을 무오한 성경해석으로 고집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창세기 1장의 6일을 각각 24시간의 날로 해석하는 분들은 구약신학자 영(E. J. Young)의 견해를 추종하는 사람들이요 그렇게 주장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중 가장 주된 이유는 십계명의 제 4계명인 안식일 계명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글리아슨 아처(Gleason L. Archer, Jr.) 같은 구약신학자는 창세기 1장의 날을 지질학적인 연대로 해석하고 있다. “창세기 1장의 ‘날들’은 문자적 24시간의 하루들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기간의 단계를 묘사하는 것이 분명하다”(『구약총론』, 210). 두 분 다 훌륭한 구약신학자이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 서로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글리아슨 아처는 창세기 1장의 날을 24시간의 하루로 해석하기를 거부하고 있지만 아담의 연대를 정하는데 있어서는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아처는 창세기 5장과 10장의 족보에 수많은 갭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지만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42번의 계보 중에 일곱 개의 가능한 고리가 빠져 있음을 지적하며 그 비율이 1/6임에 비추어 아담이 20만 년 전에 있었던 인물로 보는 것은 창세기의 기록을 지극히 의심스럽게 만든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글리아슨 아처는 24시간의 6일 창조를 부정하면서도 아담의 연대를 6천년으로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론을 지지하는 사람들 안에서도 세부적인 부분에 있어서 이렇듯 의견이 갈리고 있는 것이다. 누구는 창조과학회의 입장과 같이 창세기 1장의 ‘날’을 24시간이요 아담의 연대는 6천년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기도 하고 누구는 자연 과학의 결과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창세기 1장의 ‘날’을 지질학적인 연대로 보기도 하고 누구는 심지어 아담의 연대를 6천년 보다 훨씬 오래된 것으로 가정하기도 한다. 서로 배척해야 할 입장이 아니라 함께 창조론의 맥락 안에서 토론되어야 할 입장들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자연 과학의 연구 결과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 모든 입장들을 진화론 또는 유신론적 진화론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무신론적 진화론이 우리의 주된 논적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유신론적 진화론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보다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미국이나 유럽의 많은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진화를 하나님의 지속적인 창조의 도구로 보고 있다.
      
    필자는 미국 유학 중 풀러신학교에서 캘리포니아 레드랜즈 대학(University of Redlands) 물리학 교수인 리차드 칼슨(Richard F. Carlson)이 가르치는 자연과학과 신학의 문제를 다루는 수업을 택하여 토론하는 중에 유신론적 진화론의 입장에 서 있는 교수와 서로의 전제가 다른 것을 확인하고 적지 않게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확인한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유신론적 진화론이라는 것은 입 밖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미국 복음주의 내에서는 이미 유신론적 진화론이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일례로 미국 IVP에서 1997년에 처음 출판된 칼빈대학교 과학 철학교수인 델 라취(Del Ratzsch) 교수의 <시작의 싸움>(The Battle of Beginnings)이라는 책은 그 부제가 “왜 창조론과 진화론 토론에 있어 어느 쪽도 승리할 수 없는가”(Why Neither Side Is Winning the Creation-Evolution Debate)이며 책 말미에서 저자는 유신론적 진화를 자신의 결론으로 제안하고 있다. 조금은 우리나라 교회나 신학계의 지적 풍향과는 차이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우리 주변에는 리차드 도킨스와 같은 매우 호전적인 진화론자도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도킨스의 견해는 과학주의의 극단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이요 비록 대중적이기는 하지만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더 이상 지지될 수 없는 치우친 입장이다. 여전히 도킨스는 자연과학과 신학 또는 신앙을 그 대척점에 놓고 싸움을 걸어오고 있다. 그에 비하면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통섭’(consilience)으로 유명한 하버드대 명예교수 에드워드 윌슨은 비록 도킨스와 같이 무신론자이기는 하지만 보다 온건하게 기독교를 향해 대화를 제안하고 있다. 인류가 처한 환경 위기의 극복을 위해 과학과 신학이 함께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학문의 분과 현상은 다른 학문 영역은 고사하고 같은 학문의 분과 안에서도 깊이 있는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필자로서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기에 세부적인 과학 이론 자체를 논하게 되면 절로 입이 막히게 된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허히 듣게 된다. 자연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서로를 향해 열린 마음으로 들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박찬호  총장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원본주소: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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