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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퍼온 글 ----
  • 가난이 지속되는 원인과 성경적 토지법, 희년 및 코이노니아에 대해 신학교와 교회가 침묵하는 것은 성적인 부도덕과 함께 '어둠'에 속하는 일(엡 5:6-17)이라고 언젠가 대천덕신부님이 설교한 말씀이 기억납니다. 교회가 기득권층의 충실한 대변인 노릇을 하면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자원의)희년을 선포하라는 주님의 뜻을 왜곡하고 영성화시키거나 묵살해버린 것은 AD313년이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오래된 문제입니다. 10월 3일 "하늘이 열린 날" 임진각에서 다시 예배와 기도의 함성이 울려 퍼질텐데 Jubilee Korea집회에서마저 희년의 의미가 단지 영적인 해방만을 의미할 뿐 기업의 땅을 회복하고 빚을 탕감해주며 종들이 풀려나서 진정한 자유가 선포되는 "요벨"의 성경적 의미가 퇴색되지않기를 소망합니다. (cf.사 1:11-20) 통일후 북한의 토지제도와 날로 심화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양극화 현상에 대한 열쇠가 되는 희년과 토지문제에 대해 분명한 선포와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경고한대로 더 이상 우리 교회가 눈먼 소경과 짖지못하는 벙어리 개가 되지 않게 되도록...)
    성목사님에게 그날 강력한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대언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여러 해전 이 주제로 대신부님이 강론한 메세지가 있어 첨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아멘

    희년 :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대천덕 신부(예수원 원장, 성토모 초대 회장)

    본문 : 레위기 25:1-10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 돌아갈지며

    기도 : 주여 지혜를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조건이 있는데, 무조건 주님께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 구약의 말씀을 성취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레위기 25:1-10에서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23장에도 나오지만, 희년에 대해서는 25장에 있습니다. 6년 동안 모든 것을 하고 그 다음 해는 안식년입니다. 그런데 제 칠년에는 땅의 안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한 안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인과 외국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 그리고 모든 가축과 짐승은 안식년의 소산을 먹을 수 있습니다. 칠 년 안식년 일곱 번 후(後)에, 요벨 즉 나팔을 불고 제 오십년 7월 10일에 온 땅에서 해방이 선포됩니다. 자유가 공포됩니다. 모든 거민 위해 그 해는 요벨 해가 되고 자기 땅,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자기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해방입니다.
    사람이 땅을 잃어 버리면 지주를 위해 살게 됩니다. 땅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땅이 있으면 농사짓고 공장도 지을 수가 있습니다. 땅이 없으면 지주에게 가서 구걸해야 합니다. 지주의 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자유가 없어 종이 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지금,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는 토지 없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토지없는 사람은 자유가 없습니다. 이들은 자기 하고 싶은대로 못하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희년에 자유를 선포하면 자기 땅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땅이 있게 됩니다. 성경의 원칙은 50년째 희년이 되고 각 사람이 자기 땅으로 돌아가게 되고 자기 뜻대로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어떤 때는 땅이 있어도 자본이 없으면 일을 못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말씀을 읽어 보면 그것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자 없이 돈을 빌려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이자율이 너무 높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후 종 제도 즉 노예제도가 없어졌습니다. 대신에 소작제도가 생겼습니다. 소작제도는 지주에게 유리한 제도입니다. 왜냐하면 노예제도 하(下)에서는 주인이 노예가 죽을 때까지 노예의 건강과 생활을 도와 주어야 하고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하지 못해도 먹여주어야 합니다. 저의 조상 중 한 사람은 100명 정도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했을 때, 조상은 부인에게 말하기를 “해방된 사람은 나요”라고 했답니다. 실제로 노예들은 노예 해방 후 땅이 없어 다시 지주들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건강과 가족 또는 생활에 대한 책임질 필요가 없고, 병에 걸리면 쫓아 내버리면 됩니다.
    미국이나 한국은 모두 토지 없는 노동자를 필요로 합니다. 왜? 다른 데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을 값싼 임금으로 고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땅이 있는 사람은 토지 수입이 모두 자기 것이기 때문에 가혹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토지가 없는 사람은 늙거나 병에 걸리면 쫓겨납니다. 지금은 법이 조금 고쳐졌지만 역시 심각합니다.
    물론 특수 계층도 있습니다. 특수계층 노동자는 많은 임금을 받고 일하지만 일반 노동자는 여전히 어렵게 삽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가장이 혼자 벌어서 가정을 부양할 수 없습니다. 부모들은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를 볼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야 하는 등 교육비도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지금 미국의 제도는 가정을 파괴하는 제도입니다. 또한 결혼한 사람 절반이 이혼을 합니다. 살다가 재미 없으면 딴 사람과 살아 가정이 깨지고 윤리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왜? 토지 문제가 근본 원인입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왜? 몇 세대 동안 땅이 없었기 때문에 알지 못합니다. 살기가 바빠 땅을 마련할 생각이 없습니다. 혹은 땅을 마련할 돈이 없습니다.
    성경은 토지개혁을 50년마다 하라고 합니다. 이 법은 변치않는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공의(公義), 정의(正義)란 말은 토지법에 관한 말과 연결됩니다. 지금은 영어의 의(righteousness)는 그저 착하다는 의미이고 한국어에서 의(義)라고 하면 유교 분위기가 있어 효자가 되어야 한다는 느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희브리어로 공의가 체데크(קדצ)인데, 영어로 번역될 때 80번이 그냥 의(義)로 애매하게 번역되었고, 20번만 공의로 번역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공의를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토지법이 변했습니까? 토지법이 지켜지지 않아도 된다는 성경 말씀은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 토지법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법을 바꾸셨습니까? 예수님 오신 것은 구약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의 말씀을 모두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물론 예수님 사역 당시에도 이 법은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바알법이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산상수훈에 가난한 사람(온유한 자)은 복이 있으니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큰 일 났습니다. 원래 기업이란 말은 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희년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설교부터 도전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지주들이 이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도 도전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들도 예수를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기뻐했습니다. 이들은 ‘좋습니다, 이 사람이 왕이 되고 정부가 되어야 한다’고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정부에서 이러한 희년 선포가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로 왕이 되시고, 그래서 희년을 선포하시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3년 동안 이런 기대를 가지고 있던 일반 사람들은 예수님이 당나귀 타고 여리고로 입성하실 때 나무가지를 깔고 희년을 기대하였다. 즉 종 생활의 끝을 알리는 자유를 선포하실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싸움 즉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희년을 반대하는 로마와 갈릴리의 헤롯과 유다의 빌라도를 완전히 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실행하시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를 속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하나님의 자원적인 희년이 이루어졌습니다. 모두 나누어 주어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책임지고 문제를 해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토지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희년은 예수님 시대로부터 로마가 붕괴될 때까지 실시된 적이 없었습니다. 로마 황제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이 제도를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바알 법이 계속해서 유지되었습니다. 바알제도는 지주제도이며 가난한 자를 이용하는 제도입니다. 부자는 계속 큰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하게 되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이 무너진 다음 구라파에서는 봉건제도(feudal system)가 생겼습니다. 그 제도에는 계급이 있지만 윗 사람이 아래 사람을 책임지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200년 또는 300년 동안 그 제도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여전히 악해 하나님의 뜻을 실행 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또한 성경의 법을 몰랐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악한 마음이 들어와 윗 사람은 밑에 사람에 대해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아래 사람은 다시 종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소지주들은 왕에게 건의하여 기존의 봉건제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일반 농민들은 공동의 땅이 많아서 공동 땅에서 양이나 소를 기를 수 있었습니다. 자기 땅이 없어도 살 수 있었습니다. 결국 소지들의 주장대로 울타리를 치는 인클로저(Enclosure) 법이 통과되어 사람은 더 이상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도시는 빈민굴이 생기고 사람들은 주려 죽게 되었습니다.
    바로 인클로저 법이 생길 때 성경이 번역되었습니다. 번역자들도 시대의 영향을 받아, 성경의 강한 내용을 부드럽게 번역했습니다. 이는 호랑이의 이빨이 뽑힌 것과도 같습니다. 성경은 호랑이 소리를 냅니다. 한국말 새 번역 역시 정의에 관심이 없고 토지문제를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있긴 있습니다. 사람들은 희년 말씀은 옛날 4000년 전 이야기라고 합니다. 4000년 동안 하나님이 변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욕심이 희년제도가 바알제도로 바뀌도록 했습니다. 바알제도의 기본은 이윤 동기로 모으는 것입니다. 이윤동기(욕심)은 우상숭배입니다. 모든 것이 이익이 없다면 하지 못하게 하는데 이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이 구약시대 법을 이루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코이노니아를 통해서입니다. 서로 나누어 주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나의 형제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 정신이 코이노니아라고 하며, 성령 역사 중 가장 중요한 역할 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예수님의 은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코이노니아가 나옵니다. 코이노니아를 통해 구약의 법이 어느 정도 시행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자들끼리 가능한 일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 우리 나라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실행하려는 헨리 조지의 방법을 통해서 할 수 있습니다.
    헨리 조지는 집에서 매일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 공동기도문을 파는 집에서 일하시는 그의 아버지는 성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매일 읽었고 잘 알았습니다. 헨리 조지는 필라델피아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갔습니다. 필라델피아는 부자 도시이고 발전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에 비해 샌프란시스코는 잘 살지는 못했지만 가난한 사람도 없고, 일 자리 없는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왜 그런가를 깊이 묵상을 하면서 계시를 받아서 ‘진보와 빈곤’이란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레위기 25장 10절의 내용과 똑같습니다. 땅 값을 계산할 때 희년까지 몇 년 남아 있는지 계산을 하는데 예를 들어 희년이 48년 남아 있으면 48년간의 수입을 값으로 계산합니다. 희년 1년전이면 1년간의 수입을 값으로 계산합니다. 따라서 땅값이 해마다 내려갑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땅값은 해마다 올라 갑니다.
    헨리 조지는 우리가 비싼 물건을 살 때 분할 납부하는 것 처럼 매년 토지의 소득을 계산하여 분할 방식으로 내면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해마다의 토지 값을 내면 희년과 같은 원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땅값이 없으면 친척이 내기 때문에 주인이 다시 나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합니다.
    희년 제도는 모세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최근의 ‘Land Value Taxation around the World’ 라는 책을 보면 바빌론 왕이 죽고 새 왕이 등극할 때 토지소유권은 원 소유자에게 돌아갑니다. 왕이 바뀔 때마다 전 소유권은 없어지고 원래 소유자에게 소유권이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50년마다 희년을 선포하게 했습니다. 50년 이상 사는 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를 보여 주신 것 입니다.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까지 그러한 것이 있었지만 나중에 없어졌습니다. 이 법은 유다에서 히스기야 왕까지 계속되어 왔는데, 므낫세 왕(제일 오래 산 왕)때 와서 희년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안식년도 무시했습니다. 안식년이 있으면 이자는 없을 뿐만 아니라 빌린 돈도 탕감되었습니다. 지금 이자는 너무나 비쌉니다. 인플레이션을 이기려면, 성경에서 허락하지 않는 이자는 받아서는 안됩니다.
    한 가지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토지와 부동산을 구별해야 합니다. 미국의 부동산 세에는 두 가지(토지와 건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둘은 별개 입니다. 건물은 사람의 투입된 것입니다. 그것에서 세금을 거두는 것은 노동 의욕을 꺾는 것과 같습니다. 도적질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노동 의욕을 꺾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나라가 아니라 지방 정부가 마을이나 군 단위에서 징세하고 있습니다. 버지니아 주에서는 토지에 대해서는 가을에, 건물에 대해서는 봄에 세금을 부과하는데 연(年) 12%정도입니다. 펜실베니아 주에서도 건물과 토지의 세금은 분리했지만 옛날의 많은 도시들이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세율을 적용했습니다.
    그런데 헨리 조지의 영향을 받은 피츠버그 시는 포항과 유사한 제철도시입니다. 그리고 제일 더러운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피츠버그 시는 토지에 대해서는 비싸게 세금을 부과하고 건물에 대해서는 세금을 낮추었습니다. 8%에서 7%로... 결국 건물세가 5%정도이고 토지세가 12%정도가 되었습니다. 결론은 건물 일 늘어나고, 상업이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 빈민굴을 고치기 시작하고 땅을 잘 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따라서 실업자가 없고 일자리가 많아졌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살기 제일 좋은 도시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제일 더러운 도시에서 제일 살기 좋은 도시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펜실베니아 각 도시는  피츠버그시와 같이 세제(稅制)를 바꾸어 세금을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똑 같은 효과를 가져 왔습니다. 실업자가 사라졌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법을 시행하면 똑같은 효과가 나타납니다. 토지법 시행을 통해 모두가 이익을 얻습니다. 다만 지주(地主)만 이익을 보지 못합니다. 일하는 사람 모두가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유익한 법입니다.
    토지 주인들은 여러 해 동안 토지를 통해 벌어 들인 돈으로 힘이 커졌습니다. 마샬 필드(Marshall  Field, 미국의 유명한 백화점 소유주)가 말했듯이 ‘토지는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제일 좋은 방법도 아닙니다,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부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덴마크도 하나님의 토지법을 1957년부터 1960년까지 4년동안 시행했습니다. 그 결과 여덟 가지 정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종류의 세금이 사라지고, 빚이 상환되고, 잉여가 생겼습니다. 외채가 16,000,000 크로나(Krone)에서 4,000,000 크로나로 1/4정도 줄어 들었습니다. 이자율이 내려갔습니다. 집세도 내려갔습니다. 실업자가 거의 없어졌습니다. 임금이 올라 갔습니다. 생산성이 향상되었습니다. 물가상승률이 1%정도였습니다. 또 덴마크 역사 중 임금이 제일 높았습니다. 하나님의 토지법은 참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플레이션이 없었고 새로나온 세금도 없었고 3년 동안 파업이 없었습니다. 여론조사 결과 82%가 좋은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주들이 힘을 모아 방송 매체를 사고, TV와 책자, 신문을 통해 이것이 나쁘다라고 홍보하고, 국회에 진출하여 그 법을 바꾸었습니다. 법을 바꾼 다음부터 계속 바뀐 법이 유지되고 있는데 12년 후의 결과를 보면 잉여(剩餘)가 부족해지고 빚이 다시 늘어갔습니다. 약 30억 내지 40억 크로나 정도 부족하여 나라 운영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외채가 50배나 올라가게 되었고, 이자율은 배로 상승하였습니다. 땅값은 170억 크로나에서 670억 크로나로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1000억 크로나까지 되었습니다. 집세는 6배나 뛰었습니다. 인플레이션이 1%에서 8.5%로 상승하였습니다. 모든 다른 세금이 5배로 증가하였습니다. 새로운 종류의 세금이 자꾸 생겼습니다. 여론조사 결과 80%가 좋지 않은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법이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덴마크 역사를 통해 볼 때 민주주의(民主主義)는 없었습니다. 대신 지주주의(地主主義)가 있었습니다. 지주들의 힘은 강력합니다. 법을 고칠 수 있습니다. 지주들은 20% 밖에되지 않지만 80%보다 힘이 큽니다. 여기에는 민주주의가 없습니다.
    덴마크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법이 얼마나 실제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1950년에 농지에 대한 토지개혁이 있었다. 그 때 각 가정이 토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토지소유자의 30%가 토지의 80%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토지법과 유사한 법을 시행하는 나라들은 대부분 2%의 국민이 80%의 땅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1%가 90%의 땅을 소유하는 곳도 있습니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토지세를 해마다 올리는 것인데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토지세는 이제 쓸 데가 없습니다. 해방 즉 희년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다시 개혁해야 합니다. 희년이 없으면 위기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희년을 선포해야 우리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정치인들은 입을 다물고 있고, 대통령도 시행할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 재벌들만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국과 연합해 자본을 빌려와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회사는 아무 돈도 없고 자꾸 실패만 합니다. 국내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미국이 무너지면 재벌도 무너집니다. 몇 일 전 한 은행 회장과 전화를 했는데 미국이 언제 쓰러질지 모르지만 가까워졌다고 했습니다. 머지 않아 큰 문제가 일어 날 것 같다고 했습니다. 미국은 빚으로 살고 있습니다. 미국 1인당 소득이 12000달러입니다. 그런데 그 반절이 빚입니다. 빌린 돈으로 소비하고 있습니다. 이를 갚을 힘이 없습니다. 미국 나라도 외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라 빚이 엄청납니다. 세계 역사상 이렇게 큰 빚은 없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빌린 돈으로 미국 경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갚으라고 하면 갚을 능력이 없어 쓰러질 수 밖에 없습니다. 증권시장에서 주식이 자꾸 올라가고 있습니다만 이 역시 참된 값이 아닙니다. 결국 터집니다. 사람들이 의심하고 팔기 시작하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미국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믿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조지스트가 많습니다. 또 대만과 싱가폴, 피츠버그와 펜실베니아 도시에서 잘 실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잘 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논리적으로 말하고, 논리적으로 가르치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악하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악한 마음을 해결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성경적 토지 정의를 위한 모임(성토모)은 하나님을 강조하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이 있습니다. 논리만 믿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요한복음 7장 17절을 보면 ‘누구든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하셨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5절 말씀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충성없이 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할까 말까,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지혜를 받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무조건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고 결정하고,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떠한 위험도 무릅쓰고, 어떤 대가도 지불하겠다고 결정할 때,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결정해야 합니다.

    기도 : 주여! 참말 이 모임에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 방법과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결정하고자 하는 마음 주시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옵나이다. 아멘.

    (1999년 2월 제 8회 토지학교중 강의하신 내용을 전문에 가깝게 정리한 것임)


    자료 : 헨리조지 연구소(Henry George Institute) : www.henryg

    성토모 칼럼
    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준비
    대천덕(예수원 설립자, 성토모 명예회장)

    통일을 위해서는 어떠한 영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할까? 한국 기독교인들은 여러 해 동안 통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왔으며, 기도가 기본 조건임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는 문제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간구를 갖고 나아갈 때, 그 간구들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해야 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당신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발견해야 한다. 너무도 자주 우리는 통일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이라고 당연시하고는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얼마 전에 하나님께서 교회 지도자들 중 한 분에게 통일을 위해 그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주 단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속한 교단조차 하나되게 할 수 없다면, 네게는 한국의 통일을 위해 기도할 권리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순서가 있고 필요조건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명백히 반대되는 교회 내의 분열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국가의 통일에 대해 우리가 보이는 관심은 거짓이다. 그러한 분열로 인해 불신자들이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 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됨보다 조국의 통일에 더욱 관심이 있다면, 우리는 우상숭배자이다. 이는 곧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의 조국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협력할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북한의 불신자들과 협력할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통일을 위해 기도할 때의 첫 번째 전제 조건은 교회의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도대체 남한의 교회가 하나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만이 아신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성령님으로 하여금 서로를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하게 하시도록 하여 드리고, 이 문제에 있어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받아들인다면, 성령께서 나아가야 할 바를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 영적인 통일이 아니라 정치적인 통일을 원하는 자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통일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지혜를 주시지 않는다. 한국 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철저히 믿는다고 자랑스러워한다. 성경에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68번이 넘게 나오지만, 그러한 말씀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우리는 훨씬 더 많은 정력을 서로 비방하는데 소비하고 있다. 우리 잠시 멈추어 서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에 귀를 기울여 보자.
    시편 85:10을 보자.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자비, 진리, 공의, 평화, 이 네 가지 요소 모두가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에 필요하고 그분의 축복을 이 땅(12절)에 임하게 하는데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온갖 강단과 신학교에서 진리를 설파하고 있지만, 자비는 부족하다. 공의는 어떠한가? 공의의 실천은 부족하고 그 안에는 평화가 없어, 각 교단이 다른 교단을 공격하고 기존 교단도 쪼개지기를 거듭하고 있다. 200년 동안에 재결합의 사례는 단 한 번뿐이었다.
    그러한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복 주시기를 바랄 수 있는가? 정부 부패를 추방하고자 하는 작금의 흐름으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패에 참여했던 것이 드러났는데, 그들 중에는 평신도들 뿐 아니라 장로와 목사들도 많았다. 이제 예레미야 32:39을 보자.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道)를 주어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리니, 이것이 자기들과 자기 후손들의 복이 될 것이다.” 에스겔 11:19을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일치(一致)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두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효력을 갖게 된 새 언약은 하나됨의 언약이다.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마음과 한 길(道)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한 마음을 갖지 못하고 다 각기 제 길을 가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연기에 불과하고, 사기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이 무엇인가? 통일의 제 1 조건은 남한 기독교계의 불일치를 회개하는 것이다.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와 우리의 분열에 대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결단력을 주시고, 성령을 우리 마음에 보내주시고, 우리의 돌같이 굳은 마음 대신에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도록 부르짖어야 한다.
    통일의 두 번째 조건은 공의이다. 우리가 북한에서 공의를 회복시킬 계획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대화의 기반이 전혀 없게 된다.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은 북한의 현 체제가 불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남한에서 공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알고 있는 기독교인이 얼마나 되는가? 예수께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공의를 구하라”라고 하실 때 말씀하신 바가 무엇인가? 남한은 여하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남한에는 공의가 있는가. 공의란 무엇인가?
    뇌물을 가장 많이 줄 수 있는 사람이 판사의 유리한 판결을 받을 수 있을 때, 그것이 공의인가? 돈 있는 사람은 뭐든지 할 수 있지만 땡전 한 푼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받지 못할 때, 그것이 공의인가? 성경에서는 공의란 모든 사람이 자신의 토지를 갖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 두고 있다. 제 1 인권은 토지권이다. 성경의 율법은 이 권리를 보호하고 부자와 권력자들이 가난한 사람의 토지를 사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그들은 토지를 빌려 쓸 수 있지만 희년이 되면, 가난해서 토지를 임대해 줄 수밖에 없었던 원주인에게로 토지는 돌아가고 임대 계약은 만료된다. 이 원칙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여러 가지 실제적 방법론들이 있지만 남한에서 이제까지 한번도 실행되는 것을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이 다음과 같이 정죄하고 있는 바로 그 방법을 사용해 부자는 더욱 부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는 현상이다. “전토에 전토를 더하고 가옥에 가옥을 더하여 마침내 발 딛고 설 공간조차 없게 만들고, 사람을 압제하고 그 유산을 빼앗는” 방법이다. 유산, 구속(救贖), 구속자(救贖者) 그리고 성경에 등장하는 다른 많은 용어들이 모든 공의의 기반이 되는 토지법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성경에 등장하는 이러한 가르침들에 무관심하고, 공의를 요구하는 소수의 신자들은 종종 사회주의 사상과 인본주의 철학자들로부터 공의의 개념을 빌어 왔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율법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믿는다면 우리는 모든 가정들이 갖는 토지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남한이 토지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천 가능한 모종의 해법을 찾을 때에야, 우리는 북한과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남한에서 너무나 복잡하고, 실행불가능하며 불의한 법률들을 고수함으로 끊임없이 토지투기를 조장한다면(건물과 주택에 대한 세금은 토지투기를 부추긴다), 우리는 북한과 대화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남한 교회가 공의에 더욱 관심을 갖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교회가 공의를 말할 때 인본적 개념이 아니라 성경적 원칙을 옹호하도록 기도하고, 그 다음 정치권이나 경제계의 실력자들이 성경적 공의를 법률로 제정하고 실천하는 일을 시작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교회 위에 내리셨을 때, 토지 투기꾼들은 자신들의 부동산(토지와 주택)을 팔아, 토지 판매 수익금을 자선 사업에 사용하도록 교회에 헌납했다.
    자비는 순서 상으로 공의 다음에 온다. 한 국가에 공의가 서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들의 수가 계속 늘어나고 고아와 과부는 착취되거나 무시된다.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자선사업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재원이 그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의가 서면, 자선사역이 필요한 불행한 사람들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게 되어 그들의 필요를 나머지 사람들이 어렵잖게 채워줄 수 있다. 북한과 대화하려 하면 우리는 공의가 아니라 뇌물로 운영되는 잔인한 시스템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온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공의로울 뿐 아니라 자비로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남을 진실로 동정할 수 있는 마음을 채우시고, 그러한 동정심을 실제적으로 실천할 줄 아는 지혜를 주시도록 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공의와 자비와 연결시키는 세 번째 것이 있으니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임을 뽐내고, 자신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스스로 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임을 자랑하지만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없다. 우리가 북한의 동포들에게 그런 종류의 거만한 태도로 이야기를 건다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종류의 신앙적 태도와 관계 안에 하나님의 깊은 겸손이 임하도록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그러한 겸손함이 있을 때에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적도 없고 그분의 나타나심을 본 적도 없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통하지 않고는 예수님께 갈 수가 없다. 우리가 겸손하고, 자비롭고, 토지권에 기반을 둔 공의를 추구한다면, 그때는 대화의 여지가 생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 중에 정직한 사람들이 우리 안의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을 알고 싶어할 가능성 또한 생길 것이다.
    북한 정부의 전적인 반(反)종교적 태도가 북한 사람들의 삶에서 종교적인 진공상태를 남겨둘 것이 확실하다. 한국에서는 언제나 샤마니즘적인 흐름이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공산주의 하에서도 모종의 샤마니즘이 지속되어 왔을 뿐 아니라 어쩌면 더 늘어났을 가능성이 많다. 표면에 드러나는 움직임은 아니겠지만, 기독교를 거부한 것과는 달리 샤마니즘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막시즘은 기독교 고유의 공의에 대한 외침 때문에 기독교를 위협 세력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막시즘이 보기에 샤마니즘은 실제로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윤리적인 이상이 없기 때문이다. 샤마니즘이 추구하는 것은 기도와 희생을 통해 행운을 가져오는 것 뿐이다.
    남한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샤마니즘적인 심성으로 기도하고 금식하고 교회 출석해서 운수대통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들은 성경의 하나님이 샤만의 작은 신들보다 더 크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총애를 얻어낼 트릭을 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이런 종류의 기독교를 갖고 북한으로 가면, 환영을 받기는 하겠지만 그러한 환영의 이유는 아주 잘못된 것일 것이다. 그러한 기독교는 전혀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고, 도리어 그들의 이기심만 강화시킬 것이다. 우리가 뛰어나다고 자랑스러워하는 남한의 개인주의도 북한의 국가주의와 별다를 것이 없다. 그것은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진정한 공의와 자비를 훼손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북한의 국가주의와 남한의 무책임한 개인주의 사이의 중간지대는 존재하는가? 그렇다. 그것은 성경에 나타나는 코이노니아라는 현상이다. 코이노니아에서 핵심단어는 “서로서로”이며 이것이야말로 성경에서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표현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 하고, 이것을 실제적인 방법으로 나타내어야 한다고 강하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실제적, 심리적, 영적인 모든 면에서 서로 짐을 져야 한다. 한국 교회가 코이노니아를 실천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을 북한에 설명할 수 있을 것이고 그들에게 공산주의란 코이노니아의 모방이고 대단히 조악한 모조품이자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은혜를 주사 코이노니아가 무엇인지 이해하여 코이노니아를 그리스도인 가운데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을 주시도록 간구하자.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떳떳이 고개를 들고 북한의 동포들과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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