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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찬송의 유래(펌)
  • 조회 수: 4810, 2007-07-27 09:18:35(2007-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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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 장 초대교회의 찬송



    기독교 초기 유대교의 종교활동 중심은 성전과 회당이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들은 성전이나 회당의 예배의식에 친숙했으며 이것은 기독교의 예배의식과 음악에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성전의 예배음악은 잘 짜여 있었고 제사장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성가대가 담당하였으며 악기도 사용하였다. 회당은 평신도들이 주도하는 예배 장소로서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렸으며 성가대가 없었고 악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음악적 요소로는 성시낭송, 시편송, 기도송등 성악으로 히브리어 가사를 따라 읊는식의 노래였다.
    호당은 바벨론 망명기간 동안 생겨났기 때문에, 음악이 발달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1. 시편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로 내려오면서 사용하던 찬송가라 볼 수 있으며 기독교는 이것을 중요한 음악적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시편의 내용, 문학형식, 창법등은 기독교 찬송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시편은 히브리 시문학 형식의 특징인 평행법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시편의 창법에도 반영되고 있다. 히브리 시는 단어의 억양에서 오는 리듬보다는 귀절체들 사이의 사상의 리듬이 주도적 역활을 한다.
    이러한 독특한 형식에서 나온 창법이 드 그룹의 성가대가 교대하면서 부르는 교송법과 독창자와 성가대 또는 독창자와 회중이 응답하며 부르는 응답송이다.



    2. 신약성서의 찬송

    신약성서에는 초기 교인들이 공적, 사적 예배에서 찬송을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시편 이외에 신,구약 성서에 수록되어 있는 노래를 ‘송가’라 하며 특히, 누가복음에 수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3편의 노래를 ‘대송가’라 한다.



    (2-1) 마리아의 노래

    눅 1:46-55에 기록된 것으로 마리아 자신이 구주의 어머니가 될 것을 알았을 때 부른 찬송이다. 라틴어 성서의 첫 글자를 따서 “Magnificat”라 하며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저녁예배에, 성공회에서는 저녁 찬송으로 사용된다.




    (2-2) 사가랴의 노래

    눅 1:68-79에 기록되어 있는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노래로 요한을 낳은 다음 혀가 풀렸을때 부른 찬송이다. “Benedictus”라 한다. 로마 가톨릭 에서는 아침 예배에, 성공회에서는 아침 기도회에 부른다.




    (2-3) 시므온의 노래

    눅 2:29-32에 기록되어 있는 늙은 시므온의 노래로 아기 예수를 보았을 때 시므온의 입에서 나온 찬송이다. “Nunc Dimittis”라고 하며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끝기도, 성공회에서는 저녁 찬송으로 사용되며 루터교에서는 성찬식 후 찬송으로 부른다.


    이 세편의 노래는 신약에 있는 송가로서 가장 오래 된 것이며 초기 유대적 배경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부른 노래로 생각된다.
    신약성서의 서신들 중에는 시적이며 예전적인 성격의 귀절들이 인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교인들이 부르던 찬송으로 추측된다.
    바울은 골3:16과 엡5:19에서 당시에 불려지던 교회의 노래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엄격히 구분되어 사용되지는 않았다.
    기독교 찬송은 성령의 은사를 받아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신령한 노래이며, 육체적인 흥분이 아닌 영적인 열성으로 불러야함과 동시에 노래의 뜻을 이해하며 다른 사람이 알아 듣도록 지성이 요구되는 것을 의미한다.



    3. 초기 기독교 찬송

    2세기 초 소아시아 비티니아 지방의 로마 행정관이었던 플리니는 당시 그 지방의 기독교인들이 예배 모습을 “해뜨기 전에 모여서 그리스도를 신으로 찬양하는 노래를 응답하며 불렀다.”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기독교인들이 부른 찬송이 그리스도 중심의 찬송이었으며 응답식이나 교송식으로 불렀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3-1) 헬라 문화의 영향

    예수 당시 헬라문화는 로마제국의 중요한 정신적인 지주였다.
    초기의 헬라어 찬송은 평행법, 대귀법, 교송법 같은 히브리 시형을 모방한 시적인 산문형식을 따르다가 점차 고대 헬라시의 운율형식으로 씌어졌다.
    1918년 중부 이집트의 옥시쿠린에서 발견된 파피루스에 악보가 붙어있는 초기 기독교 찬송이 발견 되었는데 이것은 초기 기독교 음악의 유일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것은 희랍 성악 기보법으로 되어 있다. 웰레즈는 이 찬송이 희랍 성악 기보법으로 되어 있지만 원래 헬라 근원의 노래가 아니고 원시 교회의 찬송가 형식의 노래라고 주장한다.



    (3-2) 라오디기아 종교회의

    4세기에 열린 라오디기아 종교회의에서는 예배시에 악기사용과 창작 찬송을 금하는 규제를 만들었다.
    이것은 당시에 범람하던 이단적인 찬송을 막기위한 의도였는데 이로서 예배시에는 성서에 있는 노래인 시편과 송가만 부르게 하였다.
    또한 예배시 회중들의 참여도 금하였다.
    이러한 규제 때문에 새로운 찬송 창작활동이 활발하지 못하게 되었으나 교회밖의 사적 모임이나 축제나 특별한 행사에서는 창작 찬송들이 불려졌다.    



    제 2 장 비잔틴 찬송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공통점과 차이점

    동방교회가 기독교 음악에 기여한 것은 비잔틴 찬송이다.
    비잔틴 교회의 언어는 헬라어였지만 비잔틴 찬송은 고대 헬라음악의 기법보다는 유대교와 시리아의 전통을 따랐으며 서방교회의 유사점이 많다.
    즉 무반주 단선율로 되어있으며 주로 전음계적이고 엄격한 운율이 결여되어 있는 점이다.
    서방교회 음악과 근본적으로 다른점은 서방교회가 시편이나 성서에 근거한 가사만 채택한 반면에 비잔틴 찬송은 헬라시로 창작된 가사가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비잔틴 찬송 역사

    가장 초기의 비잔틴 찬송은 4-5세기 경에 나타난 “트로파티아”인데 이것은 시편의 각절 사이에 삽입되어 불려지던 시적인 짧은 기도문이다.
    처음에는 시적인 산문형태의 짧은 기도문이었으나 5세기 경부터는 몇개의 절로된 긴 시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5세기의 수도원이나 교회에서 조과와 만과에서 불려졌다. 당시의 교회의 노래는 시편이나 성서의 노래만 사용했지만 “트로파리아”는 당대의 찬송 작가에 의해 창작 삽입되어 사용된 것이다.
    6세기 초부터는 “콘타키온”이라는 새로운 시형식의 찬송이 나타났다. 7세기 말경 부터는 “카논”이라는 새로운 시 형식을 가진 찬송이 아침 기도회에서 불려지게 되었다.
    “카논”은 9개의 노래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서에 있는 9개의 송가를 모범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8세기 중엽에는 사해 근방의 성 사바스 수도원이 비잔틴 찬송 창작의 중심지였고 대표적 작가는 다메섹의 요한이다. 9세기 초에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스투디오스 수도원이 비잔틴 찬송 저작의 중심지가 되었다.
    비잔틴 찬송은 12세기가 지나면서 점차 화려한 기교적인 장식이 붙은 유연한 스타일로 변하여 갔다.중세의 라틴 찬송과 마찬가지로 비잔틴 찬송도 대부분 수도원의 성가대에 의해서 불려졌다.



    제 3 장 라틴어 찬송



    초기 기독교에 끼친 헬라문화의 영향은 4세기가 되면서 점점 쇠퇴되었으며 헬라어 대신 라틴어가 서방교회의 언어로 대치되어 갔다.
    헬라어 성경 대신 라틴어 성경이 사용되게 되었으며 이러한 변화는 6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1) 암브로시우스 찬송

    힐러리와같은 시대에 살았던 밀라노의 대주교 암브로시우스는 “라틴찬송의 아버지”라일컬어진다.
    암부로시우스는 아리우스 이단파와 대항하여 정통신앙을 고수하는 데 있어서 찬송이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기본적인 기독교의 가르침과 삼위일체의 교리를 담은 찬송을 만들어 부르게 하였다.

    암브로시우스의 찬송 곡조는 당시에 유행하던 민요조의 리듬으로 되어 있고 한음에 한음절씩 음절식으로 가사가 붙어 있어 당시 평민들의 세속 노래와 비슷한 형태였다.
    그러므로 암브로시우스의 찬송은 종교적 민요라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2) 성무일과 찬송

    5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전에는 성찬식을 중심한 예배, 미사와 수도원에서 성무일과라고 하는 매일 8회의 기도회가 설정되어 있었다.
    이 기도회 시간은 수도사들이 지켜야 할 중요한 의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무라고한다.
    미사에서는 창작 찬송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수도원 기도회에서는 수도사들이 찬송을 부를 수 있었다.



    (3) 로마 가톨릭 교회 예전의 발달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예전은 초기 기독교 예배의 여러 요소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교황 그레고리 1세 때에 구긍경, 영광송, 삼성경이 회중들에 의해서 불려지고 있었다.
    10세기경 부터는 미사시에 노래는 성가대만이 불렀고 회중들의 참여는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이 초기의 로마식 예전은 오늘날 로마 가톨릭, 성공회, 루터교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4) 초기 라틴어 찬송

    암보로시우스의 찬송은 찬송 저작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암보로시우스의 첫 계승자는 스페인의 변호사였으며 시인이었던 프르덴티우스이다.
    그는 중세 초기의 가장 뛰어난 라틴 시인으로 그의 시는 기독교 신앙과 고대 고전 라틴시와의 조화를 보여준다.
    그의 두 권의 시집“카테매리논”과 “페리스테파논”은 원래 문화적 목적으로 씌여진 것이지만 후에는 예전용으로 사용되었다.



    (5) 그레고리 성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예전 성가는 7세기 경부터 수집되고 정리되어 10세기 경에는 완성된 형태로 법전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이미 교황 그레고리 1세때부터 시작되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가는 그의 이름을 따서 그레고리 성가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레고리 성가는 무반주 단선율 음악이고, 주로 전음계적으로 되어있고, 라틴어 가사의 산문적인 리듬을 따른 낭송풍의 노래이다.
    그레고리 성가는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 교회 음악의 모범이 되었으며, 7세기 말경에는 영국에, 8세기 초에는 독일에 전달되었다. 로마 교회가 번성함에 따라 그레고리 성가의 영향도 커졌다.
    전유럽 곳곳에 교회, 학교, 수도원이 세워졌고 이것을 통해 그레고리 성가도 널리 보급되었다.



    (6) 중세 라틴어 찬송

    라오디기아 회의에서 예배시 성서의 노래만을 부르게 하고 창작 찬송의 사용을 금지했다.
    그러나 다른 교회에서는 점차로 찬송이 예배시에 사용되었다.
    506년에 열린 포르투칼 종교회의 에서는 예배시 찬송부르기를 권장했고 630년 경에 열렸던 제6차 톨레도 회의에서는 “찬송을 창작하고 부를 수 있으며 찬송을 거부하는 자는 파문할 것”을 규정하였다.
    이것은 서방교회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찬송 제작에 대한 관심을 일으켰다.



    (7) 비예전 찬송

    13세기와 14세기에 로마 가톨릭 교회 밖에서는 평민들 사이에 이태리어로 된 비예전 찬송 영가가 불려졌다. Laydesi로 불려지는 평신도 형제단들은 방랑시인처럼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복음적인 이야기를 주제로 한 극적인 노래를 부르며 죄의 용서를 비는 회개운동을 전개하였다.
    가사는 주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모의 슬픔, 천국과 지옥, 이적기사에 대한 이야기가 강조되었으며 평민들 사이에 대단히 인기가 있어서 모이는 곳마다 이들 영가들이 불려졌다.



    (8) 개혁의 시도

    그레고리 성가는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여러가지로 변형되어 사용되었다.
    세속적인 곡조가 예전에 끼어들고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 가사가 사용되는 등의 현상이 드러났다.
    19세기 불란서의 솔레므 대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옛 성가의 원형을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본래의 가사와 곡조를 연구 하였는데 이렇게 얻은 결과는 교황청에 의해 지금도 권위를 유지하고 있다.



    (9) 후기 라틴어 찬송

    라틴어 찬송은 중세 이후에도 계속 작사되었다. 16세기에서 18세기간에 성무일과서 Breviary의 내용이 계속 수정되었는데 이것은 라틴 찬송의 발달에 있어서 적지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여지는 점이다.




    제 4 장 독일 찬송




    엄격한 의미에서 “독일 찬송”이라 함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생긴 독일 개신교회의 회중찬송을 의미하지만 독일어로 된 찬송은 이미 종교 개혁 3-4세기 이전부터 독일에서 나타났었다.




    (1) 종교개혁 이전의 독일어 찬송

    11세기경 독일어로 번역한 찬송들이 나타났고, 13세기에는 로마 교황권에 대항하여 독일어로 된 찬송과 노래가 많이 나왔으며 “Carol”도 생겨났다.
    14세기에는 Eckard를 중심한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사랑과 연합을 통한 영적 즐거움을 노래하는 찬송들이 나왔다.
    15세기에는 사도신경이 번역되었으며 “Te Deum”도 번역되어 나타났다. 이들 찬송들은 축제나 순례, 성자들의 기념일 등 교회의 특별한 행사나 사적인 모임에서 불려졌다.



    (2) 종교개혁과 루터의 코랄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으로 루터의 지도하에 독일의 회중찬송이 탄생되었고 성직자와 성가대의 전유물이었던 예배음악이 루터에 의해 회중을 위한 독일어 찬송이 만들어 졌다.
    루터는 16세기 다른 개혁자들과는 달리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예전을 전적으로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새로운 교회의 신학에 맞도록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교육을 받은 지식층과 도시교회 신자들이 이해 할 수 있는 “라틴어 미사”와 교육을 받지 못한 서민층과 농민을 위한 “독일어 미사”에서 성가대와 회중이 적절히 나누어 부르게 하였다.
    1523년, 신약성서. 모세오경. 시편을 독일어로 번역하였으며, 옛 찬송가를 수집하여 새 찬송가를 제작, 1524년까지 23편의 찬송 완성, 그의 생애에 모두 37편의 찬송을 만들었다.
    이중 9편만이 루터의 창작찬송이고, 11편을 라틴어 자료에서 번역, 4편을 종교개혁 이전의 찬송을 수정, 7편은 시편에서, 6편은 기타 성서의 여러부분에서 따온 것이다.
    루터의 이러한 찬송은 거칠고 투박하면서도 침투력이 있는 평민들의 말로 되어 있으며 위대한 구원의 진리를 객관적이면서도 신앙고백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3) 초기 루터교 코랄

    루터는 미사때 회중들이 부를 수 있는 찬송을 원했으며 이러한 요청에 의해 요나스, 작스 스페라 투스, 테시우스, 헤르만, 에베르등의 시인 과 음악가들이 코랄 제작에 공헌하였다.
    이들은 주로 종교개혁 이전의 비예전적 찬송,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전, 세속민요등에서 자료를 가져다 만들었으며, 루터는 세속민요 춤곡조 및 세속연가에 새로운 가사를 넣어 어린이를 위한 찬송도 만들었다.
    이와같이 세속 민요곡조에 새로운 가사를 넣어 만든 곡조를 “Contrafacta”라 하는데 이 방법은 종교개혁 훨씬 이전부터 사용되어 온 것이다.

    음악의 특징으로는 ‘리듬의 생동력’을 들 수 있으며, 리듬의 특징으로 대체로 신앙의 찬송은 각 악구가 짧은 음표로 시작되고, 명상찬송이나 기도의 찬송은 긴음표로 시작되는 것이다.
    루터의 가장 중요한 음악적인 공헌은 코랄제작에 있어서 독창적으로 (이오니아 선법)을 사용한 것으로 이는 중세기 8개의 교회선법을 12개로 확대하는 것을 통해 오늘날의 장조와 단조의 조성을 낳게하는 길을 열었던 것이다.
    루터는 자신이 찬송을 작사 작곡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능한 음악가 발터와 루프의 협조를 얻어 루터교 찬송가를 편집 출판하기도 했다.
    1524년 발터가 출판한 ‘영가집’은 다성 코랄 곡집이다. 1529년 클루크가 루터의 공인하에 “개편 찬송가”를 출판하였고, 1531년 라우셔가, 1535년 클루크가 1539년 슈만이 1545년 바프스트가 찬송을 출판하였다.
    교리를 강조하는 찬송 뿐만 아니라 찬양과 경배의 찬송들이 작사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은 셀네커, 랑발트, 몰려, 니콜라이 등이다.
    루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중찬송의 발달은 그 속도가 빠르지 못했고 16세기 말경에 가서야 회중찬송이 예배용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16세기말 바로크 시기가 시작됨에 따라 다성음악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대위법적인 기법에서 화성적인 기법으로 수직적인 화성 진행이 주목을 끌기시작, 회중과 성가대가 따로 불렸던 찬송가를 같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회중찬송가는 새로운 힘과 생명력을 더하게 되었다.



    (4) 17세기 독일 찬송

    30년 전쟁(1618-1648)의 영향으로 기근과 질병 가운데서 터져나온 울부짖음과 고통은 17세기 독일 찬송에 반영, 개인적이며 감성적인 것이 많아서 가정에서 사적으로 부르기에 적절한 것이 많았다.
    또한 17세기초 오피츠를 중심으로 일어난 독일 시문학 운동의 영향으로, 독일찬송은 부드럽고, 운율적이며 세련된 반면, 내용적으로 감상적이며 내적이며 주관적인 것이 많았다.
    17세기 독일 찬송작가로는 헤르만(400여편의 찬송 작사), 린카르트(다감사 드리자작곡)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독일 찬송 작가로 꼽히는 게르하르트(123편의 찬송작사), 프랑크(예수귀한 보배 작사), 노이마르크(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작사,곡), 리스트(680여편의 찬송과 영가를 작사)등이다.
    17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독일 찬송가는 크뤼거의 ‘음악을 통한 경건 훈련’이다. 크뤼거는 간결하면서도 견고한 운율적 리듬을 가져 박력이 있으며 서정적인 아름다움도 지녀 루터교 코랄에 새롭고 신선한  활력을 부러 넣어 주었다.


    (5) 경건주의 시대의 독일찬송

    30년 전쟁중에 나타나기 시작한 주관적인 종교사상은 17세기에 계속 발전하여 17세기 말경에는 경건주의 신앙운동으로 그 절정에 달하였다.
    이 운동은 ‘스페너’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당시의 냉냉한 형식주의와 생명력이 없는 교리주의에 대항하여 실제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엄격하고 깨끗한 신앙생활과 개인적인 종교적 경험과 경건을 강조 하였다.
    이 시기의 독일 찬송 작가로는 쉿츠, 니안데르(‘칼빈주의파 게르하르트’라 불려진다.) 테르스티겐 등이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찬송가로 1704년에 출판된 ‘후라이링 하우젠’의 찬송가다. 여기에는 750편의 찬송가사와 250개의 곡조가 수록되어 있다.
    후라이링 하우젠 찬송가의 전통은 경건주의 운동에만 속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바로크 음악의 가장 두드러지고 기본적인 음악요소인 ‘통주저음’과 ‘숫자저음’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곡조 중 어떤 것은 기악곡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는 장식음이 많았다.
    그의 코랄곡조는 웅장하고 심오한 감정보다는 섬세하고 가벼운 감상적인 것으로서 류트나 클라뷰상과 같은 악기를 통해 잘 표현되었으며 그의 찬송가는 코랄 역사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



    (6) 18세기의 독일 찬송

    18세기 초의 가장 유명한 독일 찬송 작사자는 슈몰크인데 그는 경건주의에 속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12권 이상의 찬송가를 출간하였으며 99편 이상의 찬송가를 작사하였다.
    이밖에 노이 마이스터가 있고, “바하”는 교회음악 전체에 끼친 공헌은 참으로 큰 것이지만 회중찬송의 발전에 기여한 점은 보잘 것이 없었다.
    17세기와 18세기 전반은 코랄 편곡의 전성기였으며 프레토리우스에서 마하에 이르는 독일 개신교 음악이 누린 영광은 코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18세기에 와서 독일 찬송은 점차 시퇴하여 갔으며, 회중찬송도 약화 되었다.




    (7) 루터교 이외의 독일 찬송

    (7-1) 재 세례파의 찬송

    쯔빙글리를 따르던 젊은이들 중의 몇 사람이 유아세례 문제를 놓고 쯔빙글리와 가랄져서 재 세례파 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이들은 유아세례를 성서적으로 효과가 있지 않다고 보고 성인이 되어 침례 받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친숙한 민요곡에다 붙인 자국어 찬송을 사용하였다.

    (7-2) 모라비아 찬송

    생명력이 있고 정열적인 것이 특징이고, 가장 유명한 모라비아 찬송 작사자는 “오늘 다시 사심을”의 작사자 바이세 인데 그는 루터와도 잘 아는 사이였고, 그의 찬송은 루터쿄 찬송가에도 들어 있다.


    (8) 코랄의 개혁과 연구

    19세기 초기에 일어나기 시작한 복음주의 정신은 회중찬송의 부흥을 초래했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옛 찬송들이 새 찬송가에 실리기 시작했으며 수정되고 변형된 찬송의 원형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경주되었다.
    박커나겔, 코흐, 잔과 같은 이들의 학문적인 연구결과로 루터교의 전통음악에 대한 지식이 쌓이게 되었다.  
    1852년에 아이제나하에서 열린 회의에서 독일 루터교 교회를 위한 공동 찬송가를 만들기로 하였는데 그 결과 140편을 모아 아이제나하 찬송가로 출판하였다.
    이 찬송가는 100여년간이나 거듭 출판되어 사용되었다.



    제 5 장 개신교 운율 시편가



    시편은 성전과 회당 예배의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16세기에 와서 칼빈의 지도하에 시편은 자국어로 운율적인 형태를 갖추어 번역되었으며 여기에 회중들이 쉽게 부를 수 있는 단순한 곡조가 붙여져 불란서 개혁교회의 회중찬송이 나타나게 되었다.



    (1) 쯔빙글리와 칼빈의 음악관

    쯔빙글리와 칼빈은 “개혁교회”의 지도자로서 루터와 대등한 역활을 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개혁사상에는 피차 다른점이 있었다.
    루터는 새로운 교회의 예배와 모든 의식에 있어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였으며 단지 그의 개혁신학에 맞게 적절한 수정만 가했을 뿐이었으며 음악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전혀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채택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쯔빙글리와 칼빈은 가톨릭 교회의 의식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고 개혁교회 이상과 모델을 원시초대교회에서 찾았다.
    음악에 있어서도 그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아주 배제하였다.
    쯔빙글리는 음악성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으나 침묵속에서 단지 마음으로 찬송하기를 강조하였고 그의 교회에도 찬송이 없었다.
    칼빈은 악기 연주를 반대 했으며 단성음악만을 허용하였고 성령안에 있는 노래 가사만을 사용, 음악에 자극력에 대해서 비판하였으며 멜로디와 가사에 기악 사용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칼빈은 음악이 선교적인 임무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2) 불란서 운율 시편가

    불란서 운율 시편가는 칼빈이 일반 신도들에게 성서의 매력있는 한 부분을 자국어로 부를 수 있도록 해 준 것이었다.
    불란서 개신교도에게 이 시편가는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교통하는 상징과 수단이 되었다.
    그들은 신앙을 위하여 싸워야 하고 고난을 당하여야 하는 투사들이었다.
    그들은 시편을 노래함으로 용기와 힘을 얻었으며 시편가는 전쟁터에서의 군가였으며 순교자들의 마지막 노래가 되었다.



    (3) 스트라스부르크 시편가

    마로의 운율시편은 칼빈의 손에도 들어오게 되었는데 칼빈은 이를 감수하고 자신의 시편번역도 첨가하여 1539년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최초의 불란서 운율시편가를 출판하였다.
    그래서 (음악에 붙인 몇개의 시편과 노래)라는 표제가 붙은 이 시편가는 흔히“스트라스부르크 시편가”라고 불려진다.
    여기에는 19편의 시편가와 시므온의 노래, 십계명, 스트라스부르크 신조가 곡조에 붙여서 실려 있다.



    (4) 제네바 시편가

    이 시편가는 칼빈이 특히 공인된 교회의 시편가로 권위를 인정한 것으로 제네바와 파리와 리용등 15개소의 출판사에서 동시에 출간되었으며 1565년까지 3년동안 적어도 63판 이상이 재판되었다. 이것은 개신교 찬송가사상 특유한 예라 할 수 있으며 ‘제네바 시편가’으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거의 개신교 가정마다 이 시편가를 가지고 있었으며 불란서어를 사용하는 개혁교회에서는 오래동안 권위있는 공인된 찬송가로 사용되었다.
    ‘제네바 시편가’의 곡조의 근원은 불란서 민요라고 믿어왔는데,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칼빈이 고대교회를 모범으로 삼았기 때문에 고대, 중세교회의 노래와 관계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제네바 시편가의 특징은 곡조 보다는 리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독일 코랄에서는 가사의 억양을 중시한 반면 불란서 운율 시편가는 인본주의적 경향을  띠고있다.
    즉 시를 읽는 사람이 사용하는 리듬형태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제네바 시편가는 불란서와 유럽 대륙으로 퍼져 나갔으며 기독교 노래에 큰 영향을 주었다.



    (5) 영어 운율시편가

    마로의 불어 운율시편가는 영국에도 알려져서 헨리 8세의 궁정내관 스턴홀드는 마로를 본따 당시 영국의 가장 통속적인 노래 운율인 “Ballad Meter”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1547년 경에 스턴홀드의 19편의 영어 운율번역이 수록된 시편집이 출판되었다.
    영국의 시편가 곡조는 단순하며 가사는 한음에 한음절씩 붙여져 있었다. 18세기에 와서는 이러한 시편가 곡조의 단조성을 깨기 위해서 리듬을 다양하게 변화시킨다든지 곡조에 장식음을 넣는다든지 풍부한 화성을 붙여 음악적인 변화를 주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제 6 장 영국 찬송


    (1) 초기 영국 찬송가

    기독교가 영국섬에 상륙한 것은 2세기경이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앵글로색슨 말로 된 성시(聖詩)를 썼다는 증거를 찾아 볼 수 없다. 59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선교사들을 영국에 보냈는데 어거스틴이 이끄는 한 무리가 켄터베리에 정착하였고 그들이 처음으로 그레고리우스 곡이 붙여진 시편가를 소개하였다.
    확실히 이때의 예배는 라틴어로 드렸을 것이 분명하다. 그 후 근 100년이 지나 캐드몬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앵글로색슨 성가를 썼다.
    이 사실이 베데의 교회사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 찬송가의 첫 행이 “자 이제 우리는 하늘나라 수호자를 찬양해야 하리라”라고 되어 있다.


    (2) 영국 찬송가의 원조 아이작 와츠시대

    와츠의 찬송가 대표작은(구주와 왕이신 우리의 하나님, 목소리 높여서, 큰 영광중에 계신 주, 이 날은 주의 정하신, 기쁘다 구주 오셨네, 저 하늘나라는, 주 사랑하는 자 다 찬송할  때에, 내 주님의 영광에 나 들어갑니다, 하나님 허락하시매, 주의 군능 찬양합니다....) 그리고 와츠의 찬송의 특성은 단순성, 민감성, 진지성이다




    (3) 웨슬레의 종교개혁과 찬송가

    챨스 웨슬레의 대표작은(내 주는 살아 계시고, 만입이 내게 있으며, 하나님의 크신 사랑, 천사 찬송하기를, 대속하신 구주께서, 생전에 우리가, 나 맡은 본분은, 큰 은혜로 묶어주신....)등이 있다.




    (4) 영국의 복음주의 찬송가 작가들

    윌리엄 윌리엄즈 (1717-1781, 칼빈주의 감리교회 전도자, “나그네와 같은 내가”의 저자), 존 세닉 (1718-1755, “우리 구주 오신다.”의 저자), 토마스 올리버 (1725-1799, “주 우리 하나님 하늘에 계시니”의 저자), 존 뉴튼 (1725-1807,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저자), 올니 찬송가집 (존 뉴튼의 찬송이 다수 수록된 찬송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귀하신 주의 이름은, 시온성과 같은 교회등 수록됨)




    (5) 옥스퍼드 운동과 찬송가 작가들

    옥스퍼드 운동은 옥스포드 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난 영국 성공회의 신앙부흥운동이다.
    옥스포드운동은 당시 산업혁명으로 인한 경제구조 변화와 실업으로 인해 사회는 혼란한 상태였고, 교회는 부의 지나친 추구와 권력남용으로 지탄받던 시기에 일어났다.
    1833을 기점으로 10여년에 걸쳐 지속되었으며, 영국을 정화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이 시기의 찬송작가를 살펴보겠다. 이 시기에는 존 헨리 뉴맨 추기경(1801-1890), 에드워드 캐스웰(1814-1878), 캐더린 윙크워드(1829-1878), 프레데릭 윌리엄 페이버(1814-1863)등이 찬송가를 작시했으나, 현재 우리 찬송가에는 페이버의 ‘성도들아 나아와(140)’과 ‘환난과 핍박중에도(383)’만이 수록되어 있다.




    (6) 빅토리아 시대와 찬송가 작가들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할 때는 옥스포드 운동이 전성기에 이르렀을 때이며, 큰 변혁기에 들어선 영국은 국교나 비국교 할 것없이 모든 교회가 변혁하는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1884년 모든 성년 남자에게 선거권과 참정권이 부여되었으며, 사회, 경제적으로는 노동조합·협동조합과 1840년대의 국민헌장운동이 일어났다.
    자연과학에서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큰 충격을 주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찬송가 작가들은 다음과 같다(크리스토퍼 워즈워드, 1807-1885 “즐겁게 안식할 날”, “내가 환난 당할 때에”의 저자, 헨리 앨포드, 1810-1871 “감사하는 성도여”저자)등이다.

    (7) 영국의 근대 찬송가 작가와 찬송가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소위 “대영제국과 아일랜드 그리고 바다 넘어 모든 영국 통치령의 왕이요, 신앙의 방어자이며 인도의 황제” 자격으로 에드워드 7세가 즉위하였다.
    이 때는 빅토리아 여왕의 전성기가 승계되어 대영제국의 흥성기였다.
    이 시기의 찬송가 작가는 헨리 스콧 홀란드(1847-1918), 길버트 키드 체스터던(1874-1936), 존 옥센햄(1852-1941), 클리포드 박스(1886-1945), 프랭크 플랫처(1870-1954) 등이 있으나, 우리 찬송가에는 클리포드 박스의 “돌아오라 헛된 길에서”가 개편찬송가 223장에 실렸을 뿐이다.





    제 7 장 미국 찬송


    (1) 식민지 시대의 시편

    프랑스 개신교도 위그노(16-18세기경의 프랑스 신교도, 칼빈파의 신교에 속하며 인문주의의 발흥과 더불러 널리 퍼짐) 이민자들이 아메리카에 처음 도착한 것은 1564년이었다.
    이들은 플로리다주 연안에 정착하였는데 이때 칼빈주의자들이 즐겨 불렀던 마로의 운율시편가가 원주민인 프로리다주의 인디안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또 1579년에 영국 시편가가 아메리카에 처음 소개되었다.
    1607년에는 영국에서 온 제임스 타운의 정착자들이 ‘구역’ 시편가를 가지고 들어왔다.
    1620년 영국의 청교도(16세기 이래의 영국에 있어서의 신교도의 단체)들이 미대륙에 정착해 들어오면서, 제네바 시편가의 화란역인 ‘화란 시편가’와 ‘에인즈워드 시편가’를 가지고 들어왔다.
    1630년 경에는 학자와 귀족층 청교도들이 본국에서 가지고 온 번역이 너무 조잡한데 불만하고 그들 자신의 시편가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을 일명 ‘베이 시편가’라고 한다.
    이 시편가는 미국 대륙에서 출판된 최초의 책이었다. ‘베이 시편가’는 대단히 인기가 있었으며 뉴 잉글랜드 지방과 펜실베니아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시편가 곡조의 연주 곡목이 점차 감소되어갔고 곡조를 악보대로 정확히 부르지 못하고 마음대로 바꾸어서 제멋대로 불렀다.
    이것은 당시 곡조집이 부족하여서 회중들이 잘 아는 몇 곡만 골라 불렀고, 악보가 있어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점점 곡조를 제대로 부르지 못하므로 원래의 곡조와 리듬이 왜곡되고 나중에는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변질되기도 했다.
    이러한 시편가의 퇴보를 극복하기 위해 올바른 가창법에 대한 계몽운동이 일어났고 이와 관련된 책자들이 출간되었다.
    18세기 중엽 후에는 음악교육을 위한 ‘가창학교’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들 학교를 위한 가창교본과 노래책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2) 대각성 운동의 영향

    1734년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전개된 대각성운동은 영국의 부흥사 화이트필드가 1739년에서 1741년까지 미대륙에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개인적인 회개를 강조하는 부흥집회를 인도함으로 더욱 열기를 띄게 되었다.
    화이트 필드는 그의 모든 부흥집회에서 찬송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는 왓츠(영국 찬송가 작사의 원조, 영국에서 시편가가 찬송가로 변화하는 중대한 계기를 마련한 사람)의 찬송을 특히 좋아했고 집회의 성격상 시편가 보다 왓츠와 웨슬리 형제의 찬송을 주로 부르게 되었다. 이것은 미국의 시편가 시대에서 찬송가 시대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미국교회에 ‘왓츠의 시대’를 갖다 주었다.
    찬송가는 회중교회, 감리교회, 보수파 교파에서는 인기가 있었지만 장로교회에서는 새로운 찬송의 도입으로 대논쟁이 100여년간 계속되다가 1802년에 장로교 총회에서 왓츠 찬송가를 정식으로 공인하고 1831년에 최초의 공인 장로교 찬송가가 나오게 되었다.
    미국의 영국 국교회에서는 1784년 ‘개신교 감독 교회’로 그 이름이 바뀌면서 미국판 기도서를 출판했는데 여기에는 27편의 찬송이 시편가에 첨부되어 수록되었으며 침례교회에서도 회중찬송에 대한 논쟁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대각성운동의 영향으로 왓츠의 찬송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독립전쟁(1775-1783)을 치룬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 북부 사람들은 전쟁후의 경제적 침체와 문화적, 도덕적 가치의 상실 그리고 동부에서 서부로 이주하면서 황폐한 개척생활에서 오는 정신적, 영적 빈곤을 겪게된다.
    이에 부응하여 1800년 제 2의 종교적 각성운동인 ‘대 부흥운동’이 서부 켄터기 지방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부흥운동은 언제나 새로운 찬송을 탄생시키듯이 서부의 대 부흥운동은 (캠프 집회 찬송)을 낳았다.
    당시는 찬송가가 부족했으므로 대부분 책 없이 외워서 불러야 했고 새로 배워야 했기 때문에 왓츠와 웨슬리의 찬송 중에도 복잡한 가사는 제외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무식하였기 때문에 가사나 곡조가 쉽게 배울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어야 했다.
    찬송의 내용은 죄인의 구원에 대한 것이 많았으며 찬송의 구조는 가장 흔한 형태인 “발라드” 스타일을 주로 채택하였다.
    곡조는 단순하며 민요조로서 후렴이나 합창이 반드시 붙여졌다.
    이들은 부르기 쉽고 들어서 금방 익힐 수 있도록 가사나 곡조에 반복이 많았다.
    이들 ‘캠프 집회 찬송’의 모음집은 당시에도 많지 않았고 대개 악보가 없이 가사만 수록되어 있었다.
    캠프 집회 부흥운동이 서부와 남부지방에서 일어나자 민속곡조와 민속가사로 된 민족찬송이 많이 불려지게 되었다.
    이들 서남부 지방에서 불려지던 민속영가와 부흥찬송의 스타일을 통털어 “남부 민속 찬송 전통”이라 하며 19세기 남부 지방 찬송의 특징이 되고 있다.
    민속찬송은 왓츠, 웨슬리, 뉴우턴등의 찬송가사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죄인의 회개, 죽음의 예고, 마지막 심판을 강조하는 민속가사도 많이 사용되었다. 이들 민속가사는 대개가 작사 미상으로 되어있으며, 가장 통속적인 발라드 (서사적인 가곡) 운율로 되어있다.




    (3) 19세기 미국 찬송

    19세기 초기에 일어난 부흥 운동의 영향으로 교파적인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각 교파에서는 해외선교와 국내선교를 위한 선교부를 설치하고 복음전파를 위한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주일학교”도 독립전쟁 후에 감리교에 의해서 처음으로 미국에 소개되었고 다른 교파에서도 주일학교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824년에는 “미국 주일학교 연합회”가 조직되어 주일학교 운동을 증진시키며 필요한 주일학교 자료들을 출판하였다.
    교파적인 사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교파별 찬송가 출판도 활발히 일어났다.
    1870년 무디는 쌩키를 만나 그로 하여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독창과 대중들에게 맞는 복음적인 노래를 만들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복음 성가의 시초가 되었다.
    무디는 대도시에서의 대중 전도집회나 교회에서의 부흥집회를 위한 음악은 캠프집회의 노래와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1872년 무디와 쌩키의 영국에서의 부흥집회는 성공을 거두었다. 1875년 미국으로 돌아온 쌩키는 블리스의 복음성가와 자신의 노래를 합하여 “복음 찬송”이라는 제목으로 1891년까지 6권으로 연속 하였는데 대단한 인기가 있었으며 5천만부 이상이 팔렸다.
    1875년 부터 블리스는 무디와 쌩키와 같이 미국의 주요 도시에서의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는데 이들의 복음찬송은 대단히 성공을 거두었다.
    복음 찬송의 곡조는 음악회에도 침투되었고 거리에서, 집에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평상 노래가 되었다.
    스티븐슨은 그의 저서 “개신교 교회 음악의 형태”에서 “복음 찬송”은 기독교 노래에 있어서 미국의 가장 독특한 공헌이다.
    복음찬송은 단단히 포장된 사람의 마음을 파헤칠 수 있는 힘이 있어서 장엄하고 고상한 교회의 교회의 찬송이 할 수 없는 승리를 할 수 있었다.
    종교가 생존하기 위해서 대중의 인정과 지지가 필요한 시대에 있어서 복음찬송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쌩키의 노래는 진정한 대중의 민요였다. 엠메트와 훠스터가 세속음악에서 미국민에게 준 영향을 종교 음악에서는 쌩키와 블리스가 효과적으로 유용하게 적용하였다 라고 하였다.
    복음 송가는 대중들에게 호소력이 있고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대중집회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복음송가는 문학성이 결여되어 있고 기독교의 강한 교리보다는 감상적인 빈약한 가사로 되어있고 대중집회라는 전도를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노래이므로 교회의 정상적인 예배를 위한 목적에는 적절하지 못한 것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송가는 교회 예배에도 침투되어 복음적인 교파의 찬송가에는 복음송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4) 20세기의 미국 찬송

    20세기의 미국 찬송가에는 괄목할만한 발전이 있었다.
    교파적인 색채를 띤 종전의 찬송가를 지양하고 교파를 초월하여 교파간에도 연합하여 찬송가를 출판하는 연합사업이 현저히 나타났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미국 찬송가 사상 어느 시기보다도 잘 편집된 찬송가들이 출판되었다.
    각 교파의 찬송가들은 다른 교파의 찬송가와 경쟁하거나 비교하는 식으로 만들지 않고 오직 각 교파의 예배 형식, 찬송가의 전통, 교인들의 문화적, 경제적 배경을 고려하면서 편집되어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또한 각 교단 찬송가를 위한 참고서도 20세기에 들어서서 많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것은 각 교단 찬송가의 가사와 곡조, 작사자, 작곡자에 대한 정확한 해설을 통해서 찬송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게 도와줌으로 회중들에게 귀중한 참고서가 되었다.


    (5) 현대 미국 찬송

    현대 미국 찬송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예배에 대한 개념의 변화가 반영되고 있는 점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임박한 마지막  심판을 강조하던 전 시기의 찬송과는 달리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노래가 많이 나타났다.
    또한 “약속된 나라”를 동경하던 표현에서 이 세상에서의 풍부한 삶을 간구하며 수동적이며 경건한 기독교인의 생활 태도보다는 적극적인 봉사와 인류의 복지를 위한 생동력있는 생활을 강조하게 되었다.
    선교에 대한 강조도 이방종교에서의 개종이나 구원보다는 인류의 평화를 위한 복음의 메시지로 변화되었다. 현대의 교파 찬송가는 교파적인 특색보다는 기독교의 풍부한 음악적 유산과 전통에서 폭넓게 자료를 택하고 있으며 교파를 초월한 보편적인 찬송가의 성격을 띄고 있다. 로마 가톨릭의 전유물처럼 생각되었던 단성성가가 개신교 찬송곡조로 많이 채택되고 있으며 루터교의 코랄 (독일 개신교에서 회중들이 부르는 찬송가)은 가톨릭이나 복음적인 교파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복음송가도 루터교나 장로교 등의 찬송가에 채택되고 있는 현상을 볼 수 있으며 회중찬송에 유니슨 창법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현상도 볼 수 있다.
    또한 영국과 유럽의 민요곡조에서 따온 찬송곡조가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미국의 민요곡조도 많이 채택되고 있으며 흑인영가도 현대 찬송가에 수록되어 사용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또한 흥미있는 현상은 동남아 지역이나 아프리카 등 피선교지역의 고유한 찬송곡조가 미국찬송가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태국, 인도네시아, 나이지리아, 한국의 곡조들도 현대 미국 찬송에 소개되고 있다. 1960년 중반기부터 미국에는 청소년들의 음악적 취향을 따른 민요와 팝음악적 요소가 병합된 청소년 뮤지칼이 많이 나타났다.
    70년대에 와서는 간단한 기타코드 반주로 된 민요와 팝 스타일의 영가들이 많이 나타나 특히 청소년들의 집회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또한 19세기 말의 복음송가를 계승하는 현대적 복음송가가 피터슨이나 게이더에 의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노래는 19세기 복음송가의 가사나 음악적 스타일과 비슷한 점이 많은데 직설적이고 단순한 가사라든지 일반 대중에게 쉽게 접근 할 수 있고 부르기 쉬운 대중적인 곡조로 되어 있다.
    현대의 미국 찬송은 과거 어느 시기보다도 다양한 음악적인 경향을 보여 주며 좀 더 의미있는 회중찬송을 위한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제 8 장 한국 찬송


    1886년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에서는 처음에 영어찬송을 그대로 가르치다가 점차 한 두줄씩 찬송을 번역하여 부르기 시작 하였다.
    1891년에는 이화학당에서 성악과 오르간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경신, 정신, 영화등 기독교계 학교에서도 설립 초창기부터 음악과목이 있어 주로 찬송가를 번역하여 가르쳤다.
    찬송가가 최초로 발간된 것은 1892년이었다. 감리교 선교사 존스 목사와 로드웨일러양이 공편한 수형본의 소책자 “찬미가”에는 당시에 사용되던 번역 찬송 27편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악보가 없이 가사만으로 된 찬송가였다.
    한국 최초의 규모를 갗춘 악보 찬송가는 1894년에 발간된 언더우드의 “찬양가”이다.
    “찬양가”의 곡조는 대부분 영국과 미국의 찬송곡조로 되어 있으며 독일 코랄이나 시편가 곡조는 거의 채택되지 않았다.
    감리교에서는 언더우드의 “찬양가”의 사용을 거부하고 존스와 로드웨일러 공편으로 1895년에 “찬미가”를 발간하였다.
    이것은 1892년의 “찬미가”를 수정 보충하여 81편의 찬송을 수록하고 있는데 악보는 실려있지 않고 곡명과 미국 <감리교 찬송가>의 페이지 표시로 곡조를 지시하고 있다.
    언더우드의 “찬양가”는 공인되지 못한채 서울 지방에서만 사용되다가 장로교회의 공인 찬송가로 출간된 것이 1985년에 발간된 “찬셩시”이다.
    이리하여 1896년에는 찬양가, 찬미가, 찬셩시, 3개의 찬송가가 사용되었다.

    그 후 장로교와 감리교 두 교파 사이에서 공동용 찬송가를 만들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1905년 9월 재한 복음주의 선교 단체들이 교파연합운동의 시점으로 복음주의 공의회를 조직할 때에 공용 찬송가의 편성과 간행을 결의 하였다.
    이 찬송가는 1908년에 나오게 되었는데 266편의 찬송이 수록되어 있으며 “찬숑가”란 이름으로 발간 되었다.
    성결 교회는 1911년에 ‘복음가’(160편)를 출간하였고 1919년에는 이를 증보하여‘신정 복음가’(210편)를, 1930년에는 ‘부흥성가’(255편)를 발행하였다. 구세군에서는 1912년에 ‘구세군가’(251편)를 발간하였고 천주교에서는 1924년에 ‘죠션어셩가’(예 80)를 발행하였다.

    예수교 연합공의회는 1931년에 “신정찬송가”를 출간하였다.
    여기에는 314편이 수록되었는데 반수 이상이 ‘찬숑가’에서 온 것이고, 70편이 청년 찬송에서, 그밖에 새로운 번역찬송과 현상모집에서 채택된 한국인 창작 찬송 6편을 싣고 있다.
    “신정창송가”는 여러가지 문제점 때문에 채택되지 않고 장로회총회 교육부는 1935년 6월에 “신편찬송가”를 발행하였다.
    이리하여 “신정찬송가”는 감리교회에서만 사용하고 장로교회는 “신편찬송가”를 성결교회에서는 “부흥성가”를 사용하다가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세 교파에서는 찬송가의 하나됨을 원하여 1949년에 “찬송가”란 명칭으로 합동 찬송가를 출간하였다.
    이로서 한국교회사상 처음으로 삼대교파가 통일된 찬송가를 부를 수 있었으며 한국인의 손으로 편집된 최초의 찬송가란 점에서도 의의가 컸다.
    점점 교회가 자라고 성숙하면서 합동찬송가의 개편의 필요성을 느끼어 1967년 12월에 “개편 찬송가”를 출간하였다.
    개편 찬송가는 종래의 한국 찬송가가 선교사들이 전도의 목적으로 사용했던 복음가, 부흥가들로 주축을 이루고 있었음에 비하여 예배찬송과 교회의 의식에 관계된 찬송을 많이 보강하므로 부흥회 중심의 경향에서 예배 중심의 찬송가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1960년대에 와서 다시 새찬송가, 합동찬송가, 개편찬송가로 분열되고 말았다. 1970년대에 와서 찬송가 통합 및 재개편을 위한 연구와 노력이 있었지만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이처럼 난항을 거듭하던 개신교의 찬송가 통일 작업은 1981년 ‘한국찬송가공회’가 발족되어 통일 찬송가의 편집, 간행, 관리를 주관하게 됨으로 박차를 가하게 되어, 1983년 12월19일에 한국교회가 염원하던 “통일 찬송가”의 출간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통일 찬송가”는 선교 100주년에 이룩한 교회일치와 연합사업의 결실이었지만 찬송가의 질적인 면을 고려할 때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통일 찬송가”는 교회의 공적 찬송가로서 내용과 편집면에서 전문성이 결여 되어 있다.
    표기 방법이나 작사자, 작곡자 표시에 오류가 많으며, 예배를 위한 좋은 찬송이 너무 부족하다.
    그러므로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한국 찬송가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의 개선을 위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하여 지소적인 투자와 지원을 하여야 할 것이다.
    1980년대에 와서 한국개신교회가 “통일찬송가”를  한국가톨릭교회가 “가톨릭 성가”를 출간한 것은 한국 찬송가의 바람직한 발전을 위한 기초로서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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