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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성애에 관한 존 스토트 신부님의 글
  • 동성애적 교제(현대사회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존 스토트



    제 16 장 동성애적 교제


    이 주제는 너무 파격적(破格的)이므로, 우선 이런 생각에 대한 적절한 맥락을 설명하고, 또 내가 글을 쓰면서 당연하게 여기는, 독자들과 내 자신 주위에 있는 여러 진리들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하려 한다.


    1. 논의를 위한 맥락


    첫째, 우리는 모두 인간이다. 따라서, "동성연애"라는 현상이 따로 있을리 없다. 있다면 오직 신의 형상에 따라 비슷하게 만들어진 인간이건만, 바로 이 역설이 의미하는 영광과 비극을 동시에 안고, 성적인 잠재성과 성적인 문제까지 포함한 채 타락하고만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동성애 행위를 비난할지라도 그것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할 자유는 없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모두 성적인 존재이다. 우리에게 성(性)이란 성경(聖經)에 의해서 보나 경험을 통해 보나 우리 인간성의 근본이다. 천사들은 무성(無性)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실 때,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셨다. 따라서 성(性)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인간성의 핵심에 근접된 부분을 다루는 것이다. 우리의 정체(正體) 바로 그것이 논의되는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 대한 승인이 될 수도 있고, 위협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주제는 비범한 감수성이 요구된다.

    더욱이 우리는 모두 성적인 존재일 뿐 아니라 각각 독특한 성적 정향(定向)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동물학자 알프레드 C. 킨제이(Alfred C. Kinsey)는 인간의 성에 대한 유명한 조사를 통해 모든 인간은 0(배타적인 이성애적 경향으로 반대 성에게만 매력을 느낀다)으로부터 6(배타적인 동성애 경향으로 남성 동성애자든지, 여성 동성애자들을 가리키는 "레즈비언"이든지간에 동성에게서만 매력을 느낀다) 사이의 유형 어디엔가 위치한다고 밝혔다. 이들 극단 사이에서 킨제이 박사는 성적 정향이 이중적이거나 불확실하거나 변동적인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양성의 변화하는 정도를 알려고 하였다. 그는 연구를 통해서 남자의 4%(적어도 미국 백인 남자들의)는 일생 동안 전적으로 동성애 생활을 하며, 10%는 3년까지 동성애 생활을 하고, 37%에 달하는 사람들이 사춘기에서부터 노년기까지의 기간 중에 동성애적인 종류의 경험을 한다고 결론지었다. 여성 동성애자들은 비록 25세에서 30세 사이에서는 비율이 4%까지 올라가지만 남자보다는 적음이 밝혀졌다. 그 숫자는 "동성연애는 극히 평범한 상태"라는 O.J 웨스트 박사의 견해를 보장하는데 충분한 만큼 많다.

    셋째,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다. 정말(다른 죄들 중에서도) 성적으로 죄인들이다.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교리는 인간의 모든 부분이 죄로 인해 감염되어 있고, 또 뒤틀려 있으며, 이것에는 우리의 성(性)도 포함한다고 단언한다. 하버드 의대 정신과의 머빌 빈세트 박사(Dr. Merville Vincent)가 1972년에 쓴 글은 확실히 옳다. "하나님의 견지에선 우리 모두가 성적 도착자(倒錯者)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는 하나님의 완전한 성의 관념에서 벗어난 음탕한 생각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 의문스럽다." 아무도(나사렛 예수님만은 제외하고) 성적으로 죄가 없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이 연구에는 "난 그대보다는 경건하오"라는 식의 불쾌한 도덕적 우월감의 자세를 가질 여지는 전혀 없다. 우리 모두 죄인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고 있다. 게다가, 성적인 죄가 유일한 죄도 아닐뿐더러 꼭 가장 큰 죄라고도 할 수 없다. 자만과 위선이 더 악한 것이 분명하다.

    넷째, 나는 인간이 성적이며 죄가 있는 창조물임에 덧붙여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이라는 입장을 받아들인다. 적어도 내가 이 장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독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심을 부인하지 않고 거기에 진지하게 복종하기 원하는 사람들이며, 예수님이 성경을 통해 그것을 실행한다는 것을 믿고, 지금 다루고 있는 문제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조명(照明)하는가를 이해하고자 하고, 알려지기만 하면 하나님의 의지를 따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만약 이런 보장이 없다면 우리들의 공동기반을 찾기란 더욱 어렵게 될 것이다. 확신하건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은 동일하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기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제 논의를 위한 맥락들은 설명하였으므로,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자 한다. 동성애적 교제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가? 나는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한 후에 말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 가지 필수적인 구분을 하게 한다.

    첫째, 적어도 1957년 볼펜덴(Wolfenden)의 보고서와 그 결과로 인한 1967년 성 범죄에 관한 법 이래 우리는 죄악과 범법행위를 구별하게 되었다. 간통이란 항상(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죄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의 나라의 경우 국가에서 벌할 만한 범법 행위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거기에 비해 강간은 죄악인 동시에 범법행위이다. 1967년 성적 범죄에 관한 법이 한 일은 21세 이상의 성인이 사적으로 서로 승낙한 가운데 행하는 동성연애 행위는 더 이상 법률적 범죄가 아니라고 선언한 것이다. "법은 사실상 그런 행위를 '합법화'시킨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도 법률상 비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아무런 법적 인정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법이 한 일이라곤 그런 행위가 두 사람의 동의 하에 성인에게서 사적으로 행해질 때는 법률적 제재를 가하지 않기로 한 것이 전부이다" 라고 교수인 노르만 앤더슨 경(Sir. Norman Anderson)은 썼다.

    둘째로, 우리는 동성애적 정향 혹은 "성적 전도(顚倒)"(여기엔 사람들이 책임이 없다)와 실제 동성애 행위(여기엔 책임이 있다)를 구별하는데 익숙하게 되었다. 이 구별의 중요성은 책임의 속성을 넘어서서 죄의 여부에 관계된다. 우리는 사람들이 어떠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비난하기는 하더라도 어떤 상태(狀態)에 있다고 해서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동성연애에 관한 모든 논의에 있어서도 이 "상태"와 "행위",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의 본질과 행동, 성적인 선호와 성행위, 체질과 행위는 엄밀히 구별해야만 한다.

    이제 우리는 세 번째 구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즉, 자기 만족을 위한 일시적인(그래서 알려지지도 않을) 동성애 행위와 결혼 후의 이성(異性)과의 성적 교섭과도 마찬가지로 진정한 인간의 사랑의 표현인(그렇다고 주장되는) 동성연애 행위와의 구별이다. 책임감 있는 동성연애자들은(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간에) 젊은 사람들이나 아이들의 폭행과 타락은 말할 것도 없고 "하룻밤만의 태도"를 옹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일부 특히 이른바 동성애 그리스도인 운동(Gay Christian Movement)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이성과의 결혼과 동성애적 교제는 동등하게 애정에 차고, 성숙하고, 신앙적인 "두 개의 동등하게 유효한 양자택일안(兩者擇一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당한 문제는 일시적인 성질의 동성연애 행위와 관련될 것이 아니라 동성애적 교제-일생동안 계속되고 애정이 깃든-가 과연 그리스도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냐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널리 유행하고 있는 태도(그것이 전반적인 급변이든 혹은 마찬가지로 무비판적인 시인이든지)를 성경의 조사에 회부하는 것이다. 우리의 성적인 "선호"란 단지 개인적 "취향"의 문제일까? 혹은 하나님께서 그의 의지를 규범으로 계시하셨는가? 특히 성경이 동성애적 교제에 제재를 가한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을까? 혹은 적어도 그것을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힐 수 있을까? 도대체 성경은 무엇을 비난하는 것일까?


    2. 성경상의 금지


    고(故) 데릭 셔윈 베일리(Derrick Sherwin Bailey)는 최초로 성경상의 금지에 관한 전통적 이해를 재평가한 기독교 신학자였다. 그의 저명한 저서는 1955년에 출판되었는데, 그의 주제, 즉 『동성연애와 서구 기독교 전통』에 대한 뒤를 이은 저자들은 그가 의도한 재구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히 소돔의 죄에 관한 그의 해석의 경우에는 더욱 그랬지만, 어떤 작가들 중에는 학문적인 기준에는 그보다 덜 신중하면서 그의 논의는 단지 예비적인 것으로 여기고 그가 마련한 기초 위에서 더욱 관대한 입장을 취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 논의를 고려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네 가지 중요한 성경구절이 동성연애 문제에 관해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혹은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①소돔의 이야기(창19:1-13), 그리고 매우 유사한 기브아(Gibeah) 이야기(삿19), 이것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②"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함함"을 분명히 금하고 있는 레위기 사본(레18:22; 20:13). ③바울 사도의 퇴폐적 이방 사회에 대한 묘사(롬 1:18-32). ④일종의 동성애 행위에 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는 바울의 두 가지 죄인 목록(고전6:9-10, 딤전1:8-11).


    (1) 소돔과 기브아 이야기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으며(창13:13).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해서 하나님이 조사하기로 결정하셨으며(18:20,21), 그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18:25)의 공의와 완전히 일치하는 심판 행위에 의해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없이 멸하셨다"(19:25)고 창세기 기자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 성경 이야기의 배경에 대해선 아무런 논쟁도 없다. 문제는 멸망을 받을 만한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전통적 기독교의 관점은 그들이 동성애 행위의 죄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롯이 그의 집에 받아들인 두 천사에게 그것을 행하려고 시도(실패로 돌아갔지만)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소도미"(sodomy)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러나, 셔윈 베일리는 두 가지 기반 위에서 이런 해석에 도전했다. 첫째, 그는 소돔 사람들의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영어 성경에 의하면 'know'로 되어 있음-역자 주)하리라"는 요구가 "우리가 그들과 성적 교섭을 하겠다"(NIV)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가정이다(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에 "알다"(know, yadha)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 943회가 나오지만, 그 중에 겨우 열 번만이 육체적 접촉을 의미하며 그럴 경우조차도 그저 이성과의 관계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구절은 "우리가 그들을 자세히 알 수 있도록"으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들이 난폭했던 이유를 롯이 이방에서 온 거주자의 권리를 벗어나서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아직 자격증도 조사받지 않은" 두 낯선 사람들을 자신의 집으로 받아들인데 대한 분노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럴 경우 소돔의 죄라면 롯 가정의 사생활을 침해한 것과 고대의 환대의 관습을 무시했다는 것밖에 없다. 롯은, 두 사람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8절)이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단념하기를 청하였다.

    베일리의 두 번째 주장은 구약 성경 나머지 부분에는 아무데도 소돔의 범죄의 성격이 동성연애적이었다는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이사야는 그것이 위선과 사회적 불의라고 했으며, 예레미야는 간통, 사기, 일반적인 사악함이라 했고, 에스겔은 교만, 탐욕, 가난한 자에 대한 무관심이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비록 베일리는 여기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지만) 독립된 세 번의 기회를 통해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의 복음을 부인하는 자들 보다는 그들이 심판날에 "더 견딜 만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런데 이 모든 언급 중에 동성연애 작태에 대해선 소문이나 기미조차 없지 않은가! 소돔의 죄가 부자연스러운 성적 행위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B.C. 2세기 팔레스틴의 위경 문서를 접할 때에 국한된다. 그리고 이것은 유다서에 정확히 반향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거기에는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습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라고 적혀 있다(7절). 필로(Philo)와 요세푸스(Josephus)같은 희랍 사회의 동성애 행위에 충격을 받은 유대 저자들의 글 속에서도 이것이 나타난다.

    셔윈 베일리는 기브아의 이야기도 같은 방법으로 다루었는데, 그것은 그것들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또다른 외국인 거주자(이번엔 무명의 "노인")가 두 낯선 사람들(천사는 아니고 한 레위인과 그의 첩)을 그의 집에 초대한다. 악한 사람들이 그의 집을 둘러싸고 방문객을 "우리가 그들을 알 수 있도록" 데리고 나오라는 소돔 사람들과 같은 요구를 한다. 집주인은 처음에는 그들에게 "손님"에게 "악"을 행치 말라고 요구하고 그리고는 그의 딸과 첩을 대신 그들에게 줄 것을 제의한다. 기브아 사람들의 죄는 동성애적 접촉의 제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환대의 법을 어긴 것이라고 다시금 제의되었다.

    비록 베일리도 이 두 이야기의 재구성이 기껏해야 새험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는 여전히 "역사적 사실로든, 밝혀진 사실로든 소돔 시와 근처의 도시가 동성연애 행위로 멸망되었다는 것을 믿을 만한 근거는 조금도 없다"고 지나친 주장을 한다. 대신 "소도미"(sodomy)에 대한 기독교적 전통은 최근 위작(僞作)인 유대 자료에서 추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셔윈 베일리의 주장은 여러 가지 근거로 인해 설득력이 없다. ①"악한"(wicked), "악"(vile), "망령된"(창19:7, 삿19:23) 같은 형용사는 환대를 소홀히 했다는 것을 설명하는 데는 부적절해 보인다. ②대신 여자들을 내주겠다는 제의는 "이 이야기에 어떤 성적인 암시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③비록 동사 알다(yada)가 성적 교섭을 의미하는 것은 열번 뿐이지만, 베일리는 그 중에서 여섯 번이 창세기에, 그것도 소돔 이야기 바로 거기에 한번(롯의 딸들이 남자를 "알지"못했다는 것에 대해,8절) 나온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④신약성경의 문서를 소중히 다루는 우리들로서는 유다서의 명백한 진술을 단지 유대 사이비 문서에서 잘못 베껴진 것으로 제외시킬 수는 없다, 확신하건대, 동성애 행위가 소돔의 유일한 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그것도 죄 중의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2) 레위기의 구절들


    레위기에서 두 구절은 모두 이 책의 핵심인 "신성 규범"에 속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의 율법을 좇고 애굽(그들이 살았던)이나 가나안(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해 가는 곳인)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요구한다. 이런 행위들 중에는 금지된 친척과의 성적 관계, 온갖 성적 변태 행위, 어린이 희생제, 우상숭배와 여러 종류의 사회적 불의를 포함한다. 우리는 반드시 이런 맥락 하에서 다음 두 구절을 읽어야 한다.

    18:22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20:13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죄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베일리는 "레위기 두 율법은 모두 남자 사이의 통상적인 동성연애 행위와 관련되어 있고 의식이나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다른 행동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썼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베일리가 부정한 바로 그 문제를 긍정한다. 그들은 두 구절이, 주로 의식적(儀式的) 정결함이 주로 다루어지고 있는 문맥 속에 삽입되어 있음을 정확히 지적했다. 그리고 피터 코울만(Peter Coleman)은 또 두 구절 중에서 "가증한" 혹은 "험오"로 번역된 단어는 우상숭배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덧붙였다. "영어로 그 단어는 혐오나 불만을 표시하지만, 성경에서 그것의 주된 의미는 도덕이나 미학(美學) 보다는 종교적 진실과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런 금지들은 종교적 금기에 불과한 것일까? 그것들은 "이스라엘 남자와 여자들은 성전의 창기가 되지 못한다"(신23:17)는 또다른 금지들과 연결되어 있단 말일까? 하긴 가나안의 다한 제사는 의시적 매춘 행위를 포함하였으며 따라서 남성과 여성의 "신성한 매춘자"(비록 여기에 동성애적 접촉도 관계되는지에 대해선 명백한 증거가 없지만)가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사악한 왕들은 계속 그들을 여호와의 종교에 끌어들였으며, 공의로운 왕들은 계속 추방했다. 따라서 동성연애의 후원자들은 레위기의 구절은 오래 전에 그쳐진 종교적 행위를 금하는 것이며, 오늘날 동성간의 교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주장한다.


    (3) 로마서 1장의 바울의 언급


    26절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절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게 받았느니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그 당시 그리이스, 로마 세계의 우상숭배하는 이방인들을 묘사하고 있다는 데는 모두 합의했다. 그들은 창조된 우주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19,20). 도 자신들의 도덕의식도 가지고 있었다(32절). 그러나, 악을 행하기 위해 그들이 알고 있던 진리는 억눌렀다.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대신 그들은 창조물들과 창조주를 혼동한 나머지 우상에게로 돌아섰다. 그들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을 그들의 타락한 마음과 "부자연스런" 성 행위를 포함한 퇴폐적 행위들에 "내어 버려두셨다"(24,26,28절).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동성연애 행위에 대한 분명한 유죄판결로 보여진다. 그러나, 다른 방면으로 두 가지 주장이 전개되고 있다. ①비록 바울이 성욕 전도자(inverts, 동성애적 성질이 있는 사람)와 변태성욕자(perverts, 성향은 이성연애자에 가깝지만, 동성애 행위에 탐닉하는 사람)간의 현대적 구별에 관해 전혀 알고 있지 못했지만 그가 비난하고 있는 쪽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동성연애만 하는 남성이라면 여자들과의 자연스런 관계를 가졌을 리가 없는 반면, 그들은 그것을 "버린"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므로 틀림없는 일이다. ②바울은 분명히 하나님이 정의롭게 "내어 버리신"사람들의 무분별하고, 파렴치하고, 방탕하고, 난잡한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입장을 분명히 밝힌 사랑을 수반한 동성애적 교제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4) 기타 바울 서신의 구절들


    고전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1:9-10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여기에서 바울이 확언한 것 중 첫째로는 하나님의 나라와 상반되며, 둘째로 율법이나 복음에 상반되는 추악한 죄의 목록이 둘 있다. 한 죄인들의 부류는 말라코이(malakoi)로 불리고 다른 부류는 두 개의 목록에서 아르제노코타이(arsenokoitai)로 불리우는 것이 관찰될 것이다. 이들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최초의 개정표준역(Revised Standard Version : 신약은 1946년, 구약은 1952년 미국에서 발행됨-역자주) 고린도전서 6:9의 번역에는 그것들이 "동성연애자"로 하나로 묶어 번역되었음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그 단어의 사용은 "필연적으로 순수한 성욕 전도자(顚倒者)도, 비록 나무랄 데 없는 도덕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동적으로 불의한 자로 낙인찍혀 하나님의 왕국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에 베일리가 이의를 제기한 것은 정당했다. 다행히도, 개역자들은 그 이의 제기에 유의하여 제 2판(1973)에서는 비록 아직도 단어를 한데 묶기는 했지만 그것을 "성적 도착자"로 표현했다. 요점은 고린도전서 6:9,10에 나열된 열 가지 범주가 모두("탐람하는 자"는 혹시 예외일 수도 있지만), 예를 들어 우상숭배하는 자, 간음하는 자, 도적같이 그들의 행동에 의해 죄를 저지른 자들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malakoi와 arsenokoital의 두 헬라어는 하나로 묶여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정확한 의미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문자 그대로는 "건드리기 쉬운"이라는 뜻이지만, 비유적으로는 헬라인들에게 동성연애 행위에서 수동적 역할을 하는 남성(반드시 소년일 필요는 없는)을 의미했다. 후자는 문자 그대로 "침대 위의 남성을 의미하고 헬라인들은 이 표현을 능동적 역할을 하는 사람을 묘사하는데 사용하였다." 예루살렘 성경은 제임스 모팻(James Moffatt)을 따라 사악한 단어인 "미동과 남색"을 사용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의 결론 중에 피터 코울만은 "바울이 아마 고대 세계의 동성연애 행위의 가장 통상적인 형태인 나이가 많은 사람과 사춘기를 지난 소년과의 상업적인 남색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라고 제의했다. 만약 그렇다면 다시 한번 바울의 비난은 서로 동의하고 입장을 밝힌 성인 동성연애자와는 관계가 없다는 주장이 거론될 수 있다(또 실제로 거론되고 있다). 이것은 피터 코울만 자신이 도출해낸 결론은 아니다. 그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전체적으로 보면 바울의 서신들은 동성연애 행위를 로마의 이방인들의 악으로, 고린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데 대한 장애로, 또한 디모데전서의 도덕률이 용납하지 않는 범죄로서 거부한다."

    내가 열거한 동성애 행위에 대한 성경의 언급을 제고하였으므로, 우리는 그들 네 가지밖에 없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가 성경의 주된 공격에서는 좀 벗어난 것이라고 결론지어야 하는가? 그것으로는 동성연애적 생활양식에 저항해서 확고하게 버티는 데는 다소 빈약한 그거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까? 성경상의 금지는 "몹시 특정한 것으로" 환대의 위배(소돔과 기브아), 의식적 금기(레위기), 파렴치한 방탕(로마서), 남창과 젊은이의 타락(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을 금하고 있지만 이런 구절들에는 순수한 동성애적 전도자간의 애정이 오가는 교제에 대해서는 비난은 고사하고 언급조차 없다는 주장의 주창자들은 과연 옳은가? 이것이 예를 들어, 레타 스켄조니(Letha Scanzoni)와 버지니아 몰렌코트(Virginia Mollenkott)가 그들의 저서인 『동성연애자는 나의 이웃인가?』에서 도달한 결론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썼다.

    "성경은 어떤 종류의 동성연애 행위(……일단의 강간, 우상숭배, 호색적인 난잡함)를 비난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떤 다른 동성연애의 양태에 대해선 침묵을 지키는 것으로 보여진다."

    즉, 동성연애적 정향과 "이성간의 일부일처제와 유사한 입장을 밝힌 사랑의 관계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것이 비록 그럴듯하게 들릴지라도, 우리는 성경의 자료를 그렇게 다룰 수는 없다. 동성연애 행위에 대한 기독교의 반박은, 전통적 설명이 뒤엎어질 수 있을 정도의 "소수의 고립되고 불투명한 증거 구절들"(때때로 이렇게 표현된다)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해 글을 쓰고, 그들의 논의 가운데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부분을 포함시킨 사람들이 모두들 이런 방법으로 그것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예를 들어, 셔윈 베일리는 "동성연애 행위에 대한 기독교의 자세를 고려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파멸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시작은 결코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사실상 그것은 절대적으로 실수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동성연애 행위의 부정적인 금지는 인간의 성(性)과 이성과의 결혼에 관한 창세기 1장과 2장의 긍정적인 가르침의 시각 아래에서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셔윈 베일리의 책에는 이들에 대해선 조금의 암시도 없다. 그리고 피터 코울만 조차도, 그의 『동성연애에 관한 그리스도의 자세』는 물론 이미 출판된 가장 포괄적인 성경적, 역사적, 도덕적 개관이지만 거기에 대해선 바울이 창세기 2:4을 인용한 고린도전서 1장에 대한 지나가는 언급에서 밖에는 말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성과 결혼에 관한 성경의 총체적이고 긍정적인 가르침이 없이는 동성연애 문제에 관한 우리들의 시각은 견강부회(牽强附會)에 그치고 말 것이다.


    3. 성경상의 성(性)과 결혼


    우리가 조사를 시작하는데 필수적인 곳은 이미 13장과 14장에서 살펴보았지만 창세기 2장의 결혼제도인 것처럼 보인다. 동성연애 그리스도인 운동(Gay Christian Movement)의 구성원들이 이성과의 결혼과 동성간의 교제 사이에서 유사점을 신중히 추출하였으므로, 과연 이 유사점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 물어볼 필요성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가 우리에게 창조에 대한 두 가지 구별되는 설명을 하였다는 것을 보아왔다. 첫째(창세기 1장)는, 일반적으로 성의 평등을 확언한다. 그것은 양성(兩性)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과 지상의 경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창세기 2장)는, 특수한 것으로 상보성을 확언한다. 그것은 이성간의 결혼의 토대를 구축한다. 이 두 창조에 대한 설명에서 세 가지 기본적 진실이 드러난다.

    첫째, 인간의 교제에 대한 욕구.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18절). 사실이다. 이 단언은 후에 사도 바울이(분명 창세기에 대한 반향으로)다음과 같이 쓴 것으로 누그러진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고전7:1). 다시 말해서, 비록 결혼이 하나님의 훌륭한 제도이지만 독신의 요청도 일부에게는 좋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는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회적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이시며 우리를 그의 형상대로 만드셨기에 우리에게 사랑하고 또 사랑받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그는 우리들이 공동체 속에 살고, 홀로 살지 않기를 의도하셨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하셨다. 게다가 하나님이 "그에게 적합한"이라고 말씀하신 "돕는 자" 혹은 동료는 또한 그의 성적 상대가 되게 하며, 그들이 사랑을 성취하고, 자손을 낳을 수 있도록 그와 더불어 "한 몸"이 되게 하셨다.

    둘째로, 창세기 2장은 이런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신의 예비를 보여준다. 아담에게 배필이 필요함을 확인했으므로, 적당한 자를 찾는 일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먼저 그의 앞에 새와 들짐승들을 보이셨다. 그리고 아담은 그들을 돌보기로 했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지어나갔다(20절). 그러나, 아담과 "곁에"살면서 "상대"가 될 수 있고, 친구는 물론 보완을 해주고, 상대자이며 동료일 수 있는 적당한 조력자를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특별한 창조가 필요하였다.

    다음에 계속된 일(신의 마취 하에 신의 수술)을 우리가 어떻게 문자 그대로 이해하기로 되어 있는지에 관한 토의가 요지를 파악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신의 창조 중 특별 사역이 일어났다. 성은 분화되었다. 아담의 분화되지 않은 인성으로부터 남성과 여성이 출현하였다. 그리고, 아담이 그의 깊은 잠으로부터 깨어나자 그 앞에 그 자신의 투영, 그 자신의 보완, 실로 그 자신의 일부가 있음을 보게 되었다. 다음 남롁로부터 여자를 창조해낸 후 하나님 자신은 그녀를 마치 오늘날 신부의 아버지가 신부를 데려오듯 그에게 데려왔다. 그리고 아담은 갑자기 무의식적으로 역사상 최초의 사랑의 시를 터뜨렸다.

    이제 마침내(새와 들짐승과 비교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이 이야기의 중요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아담처럼 하와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창조된 방법은 창세기 2장에 의하면 무로부터도 아니요(우주처럼), "땅의 먼지"(아담처럼 7절)로부터도 아니요, 아담으로부터 창조되었다.

    세 번째 창세기 2장의 중대한 진실은 결과로 일어나는 결혼제도에 관한 것이다. 아담의 사랑의 시는 23절에 기록되어 있다. 24절의 "이러므로"는 "이런 이유로"라는 것이 화자의 추론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부주의한 독자일지라도 "몸"에 대한 세 번의 언급이 눈길을 끌었을 것이다. "이것은 ……살 중의 살이요……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우리는 이것이 계획적이고 우연적이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것은 결혼에서 이성간의 관계는 결합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것은 일종의 재결합이다. 그것은 서로에게 속하지 않고 정확히 한 몸이 될 수 없는 성질이 다른 사람들의 결합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원래 하나였지만 서로 분리되었다가 이제 결혼에 의해 성적인 만남으로 다시 하나가 될 두 사람들의 결합이다.

    어떤 문화에서든 시인과 철학자들이 찬양하였던 이성간의 정교(情交)의 심원한 비밀을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성간의 관계는 육체적 결합 이상의 것이다. 이것은 상호 보완적 성격의 융합이다. 그것을 통해서 소원함이 우세한 가운데에서 인류의 풍요롭게 창조된 통일성이 다시 경험된다. 남성과 여성 성기의 상보성은 단지 심오한 정신적 상보성에 대한 육체적 수단에서의 상징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 몸이 되고 이런 성스러운 비밀을 체험하기 위해 어떤 예비단계가 필요한데 그것이 결혼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그러므로"(24절).

    "남자가"(단수는 결혼이 두 개인 사이의 배타적 결합임을 의미한다)

    "부모를 떠나"(공개적이고 사회적인 견해가 고려 중이다)

    "그 아내와 연합하여"(결혼이란 사랑하고 결합하는 실행 및 계약으로 이성간의 관계이며 영원하다)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왜냐하면 결혼이란 성적 교섭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혼 계약의 징표이자 서약이며, 여기엔 아무런 부끄러움과 당황의 그림자도 드리워진 적이 없다. 25절)


    예수님 자신도 나중에 이 가르침에 찬성하였다. 그는 창세기 2:24을 인용하여 남자와 그의 아내 사이의 평생 동안의 결합은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의도였다고 밝히고,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덧붙였다(막10:4-9).

    이렇게 성경은 결혼을 하나님이 이성간의 일부일처제에 의해 설치하신 것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결합이며, 공개적으로 인정되어야 하며(부모를 떠남), 영구한 타결이며(그는 "그 아내와 연합하여"), 육체적으로 완성을 이루어야 한다("한 몸"). 그리고 하나님이 다른 대안은 제시하시지 않았으므로 성경은 다른 어떤 종류의 결혼이나 성적 교섭도 상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므로 특별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동성연애 행위를 선택해선 안된다. 사실은, 하나님의 계시된 의도를 벗어난 어떤 성적 관계나 행위도 바로 그 사실에 의하여 그에게 불쾌한 것이며 그의 심판 아래 있게 된다. 이것은 일부일체제나 일처다부제("한 남자-한 여자"의 원칙에 위배된다), 은밀한 결합(이것은 부모를 떠나는 아무런 결정적인 공개 행위도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우연한 만남과 일시적인 결합, 간통, 수많은 이혼들("연합"이라는 것과 예수님의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는 금지에 상반된다), 또 동성연애적 교제(이것은 "남자"가 "그의 아내"와 결합해야 된다는 진술에 배치된다)를 포함한다.

    요약하면,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성경이 고려하고 있는 유일한 "한 몸"의 경험은 남자와 그가 "살 중에 살"로 여기는 그의 아내 사이의 성적인 결합에 국한된다.


    4. 현재 고려되고 있는 논의들


    그러나, 동성연애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성(性)과 이성간의 결혼제도에 관한 이런 성경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동성애적 교제의 합법성을 옹호하기 위해 거기에서 수많은 이의를 제기한다.


    (1) 성경과 문화에 관한 논의


    전통적으로, 성경은 모든 동성연애 행위를 비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성경의 기자들이 이런 문제에 믿을만한 지도자일까? 그들도 자신들의 경험이나 문화에 의해 한계를 갖는 것이 아닐까? 문화에 대한 논의는 대개 둘 중의 한 형태를 취한다.

    첫째, 성경의 저자들은 그들 자신의 상황에 관련된 문제들을 제기하였는데, 이것들은 우리들의 문제와는 매우 격차가 있다. 소돔과 기브아 이야기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은 이제는 황폐하게 된 고대 근동지역의 환대의 관습이나(만약 죄가 도대체 성적인 것이라면) 동성연애자 무리들의 강간 같은 극히 보기 드문 현상에 몰두하고 있다. 레위기 율법에서도 관심 사항은 낡아버린 다신제에 관한 것이었고 바울은 헬라 남색자들의 특수한 성적 선호에 손을 대었던 것이다. 그것은 모두 매우 낡은 것들이다. 성경 기자들은 그들 자신의 문화에 감금되어 있어서, 그들의 가르침을 이 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만든다.

    두 번째, 이것을 보충하는 문화에 대한 문제는 성경 기자들이 우리들의 문제는 손을 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가르침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침묵에도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바울(구약 성경의 기자들은 그만두더라도)은 프로이드 이후의 심리학에 대해선 전혀 알 리가 없다. 그들은 "동성연애적 사정"에 대해선 들어본 적도 없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곤 어떤 행위에 불과하다. "성적 전도"와 "성적 변태"와의차이는 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두 남자 혹은 두 여자가 서로 사랑에 빠져 결혼에 비유될 만한, 깊은 사랑을 가진 확고한 관계로 발전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렇다면, 노예, 흑인과 여성이 해방되었던 것처럼 "동성연애 해방"도 오래 지연되고 있는 것 뿐이다.

    만약 이 문제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이 금지 구절에서만 발견된다면, 이 반박에 대답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절들을 신이 마련한 결혼제도에 관해서 살펴본다면, 우리는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신이 계시한 원칙은 소유할 수 있다. 그것은 고대 근동의 문화적 상황이나 1세기의 그리이스, 로마 세계의 상황에서 모두 적용되었으며, 마찬가지로 고대인들이 무척 무지했던 현대의 성(性)문제에도 적용된다. 성경상의 금지의 근거가 현대의 애정적인 동성연애 교제가 비난받지 않을 수 없는 같은 근거이다. 즉, 그것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와 모순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질서(이성간의 일부일처제)가 문화가 아닌 창조에 의해 설치되었으므로, 그 유효성은 영구하고 보편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규범으로부터의 "해방"이란 있을 수 없다. 진정한 해방은 오직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발견된다.


    (2) 창조와 본성에 관한 논의


    나는 이따금 이런 종류의 진술을 보거나 들은 적이 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나는 동성연애자가 됐어요. 따라서 동성연애는 좋은 것이 틀림없소, 나는 창조에 의해 내가 이렇게 된 것을 받아들이고 또 찬양까지 할 작정이요." 혹은, "당신들은 동성연애 행위가 본성과 정상적 상태에 어긋난다고 할지 모르지만, 내 본성에는 어긋나지 않고, 내게는 조금도 비정상적이지 않소." 노르만 피텐거(Norman Pittenger)는 수 십년 전 이런 논의를 사용하면서 무척 거리낌 없었다. "그는 동성연애자는 '부자연스런' 욕구와 습성을 지닌 '비정상적인'사람이 아니다"라고 썼다. 그와는 반대로, "이성애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이 이성과 행위할 때 '자연스럽게' 행동하듯이, 동성애적 정향을 갖고 있는 사람도 그의 기본적이고 확립된 동성애적 욕구와 충동에 부합되게 행동할 때, 역시 동등하게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다른 사람들은 동성연애 행위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이류를 ①수많은 원시 사회에서 그것을 당당하게 받아들였으며, ②일부 선진 문명(예로, 고대 헬라)에서 그것은 이상화되기까지 했으며, ③동물들에게도 비교적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보고한 웨스트 박사(Dr. D.J. West)는 계속 동물의 성에 대한 전문가인 비취 박사(Dr. F.A. Beach)를 인용했는데, 그는 동물의 동성연애 행위를 보고,인간의 동성연애 행위를 "蚓자연스런"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엄밀한 정확성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논의들은 무엇이 "자연스럽고", 무엇이 "자연스럽지 않은가"에 대해 너무 주관적인 견해만을 표현한다. 우리는 "정상과 자연스러움에는 영구적인 기준이 없다"는 노르만 피텐거의 진술은 받아들일 수 없다. 또 동물의 행위가 인간의 행위를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에 동의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에 의해 성과 결혼의 규범을 설치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구약 시대부터 받아들여져 왔다. 따라서, 동물과의 성적 관계는 금지되었으니 "이것은 문란한 일"(레18:23), 다시 말해서 "자연의 율법에 대한 미개한 의식"을 보여주는 자연에 대한 위배, 혹은 혼란이기 때문이다. B.C. 2세기 "나프탈리의 성약"(Testament of Naphtali)에 의해 소돔에게 다음과 같은 판결이 내려졌다. 해와 별이 순서를 바꾸지 않듯, 나프탈리 족속은 우상숭배와 무질서를 행하기 보다 하나님에게 복종해야 한다. 모든 창조된 사물에서 그것을 창조하신 주를 인정함으로써 그들은 자연의 질서를 바꾼 소돔처럼 되어서는 안된다…….

    똑같은 관념이 로마서 1장의 바울의 마음에도 명백히 나타난다. 그가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쓴" 여자들과, "순리대로 쓰기를 버린" 남자들에 대해 쓸 때, 그는 "순리"(phusis)란 말을 하나님이 세우신 사물의 자연적 질서(2:14, 27 그리고 11:24에서 처럼)를 의미하는 것으로 썼다. 그러므로, 바울이 비난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성질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이성애적 사람들의 변태적 행위가 아니라, "순리"(Nature),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에 어긋나는 모든 인간의 행위인 것이다. 마치 베鵛(C.K. Barrett)이 덧붙인 것처럼, "그(바울)가 언급한 추잡한 쾌락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창조를 맡았을 때에나 예상될 수 있는 창조된 질서의 왜곡을 똑똑히 볼 수 있다."


    (3) 관계의 성질에 대한 논의


    동성애 그리스도인 운동은 성경으로부터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라는 원리(그건 사실이다)를 차용했으며, 1960년대의 "신도덕" 혹은 "상황윤리"에서 사랑은 모든 관계를 판단하는데 쓰이는 적절한 기준이라는 생각(그건 그렇지가 않다)을 빌었다. 그렇지만, 이 견해는 오늘날도 확고한 기반을 쌓고 있다. 예를 들어, 프렌드(Friend) 교도의 보고서 "성에 관한 퀘이커 교도의 견해에 관해서" 에는 "사람들은 '동성연애'에 대해 왼손잡이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개탄할 이유가 없다." 또 "분명히 문제되는 것은 관계의 본성과 성질이다"라는 진술이 포함되어 있다. 이와 유사하게 1979년 감리교회의 "사회 책임부"(division of Social Responsibility)는 그 보고서인 "인간의 성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이해"에서 "동성연애 행위"는 "본질적으로는 잘못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어떤 동성애적 관계의 성질도…… 이성애적 관계에 적용되는 같은 근본적인 기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성연애 남성이나 여성의 경우 사랑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영원한 관계는 그들의 성을 나타내는 적절하고 기독교적인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해(1979)에 영국 국교회의 노동 위원회는 "동성연애적 관계: 토의를 위한 논문"이란 보고서를 발행했다. 그것은 퀘이커 교파나 감리교파의 보고서 보다는 신중하고, 공정하며, 포괄적인 것이었다. 그 저자는 수 세기에 걸친 기독교의 전통을 부인할 수 있는 것으로 느끼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어떤 상황 하에서는 개인이 결혼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교제와 성적 사랑을 찾아서 동성애적 관계를 "선택하는 것이 정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노르만 피텐거는 그의 『동의의 시간』(Time For Consent)에서 진정한 사랑의 교제의 특징을 여섯 가지로 나열했다. 그것은 ①위임(얽매임 없이 자신을 서로에게 맡김), ②주고 받음의 상호 관계(상대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공유), ③부드러움(강제나 잔인함이 아닌), ④신의(평생 동안의 관계의 의지), ⑤희망(서로의 성숙에 봉사함), ⑥결합의 욕구 등이다.

    만약 그렇다면 동성애적 관계는 두 남자들 사이의 것이든 두 여자들 사이의 것이든, 이런 사랑의 성격만 특징으로 하고 있으면, 물론(논의를 계속한다) 그것은 악한 것으로 부인되지 않고 훌륭한 것으로 긍정되어야 함-그것은 사람들을 외로움이나 이기주의와 난잡함으로부터 구출한다. 그것은 이성간의 결혼처럼 풍부하고 책임감 있으며, 자유스럽고, 적합한 것이 될 수 있다-이 틀림없단 말인가!

    그러나,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은 이 사항이 의존하는 근본 전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 즉, 사랑이 유일한 절대적인 것이며, 그것을 제외한 모든 도덕적 율법은 철폐되었고, 사랑과 모순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사실로 인해 다른 모든 고려 사항과는 관계없이 훌륭하다는 전제이다. 이것은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랑도 그것을 인도할 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커다란 율법으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면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는 모든 다른 율법을 버리지는 않았다. 반대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했고,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폐지가 아니다)"고 했다. 따라서 어떤 관계에서 애정이라는 성격은 그것을 확증하는데 있어서 비록 필수적이지만,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못한 기준이다. 예를 들어, 만약 사랑이 확증의 유일한 시험물이라면 일부다처제에도 반대할 근거가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일부다처제도도 틀림없이 수명의 아내와 피텐거 박사의 여성 특성을 모두 반영하는 관계를 즐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자신의 목회 경험으로부터 얻은 더 좋은 예가 있다. 몇 번인가 다른 경우에 한 기혼 남자가 내게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얘기했다. 내가 그에게 부드럽게 충고를 했더니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예, 옳은 말씀입니다. 전 이미 아내와 가족이 있지요. 하지만 이 새 관계는 진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태어났습니다. 우리들 서로간의 사랑은 전에는 알지 못했던 성질과 깊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옳지 않다. 어떤 사람도 다른 여자와 사랑의 성질을 기초로 해서 그 아내와의 결혼 계약을 깨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사랑의 성질만이 옳고 그름을 판가름할 유일한 척도는 아니다.

    비숫하게, 나는 동성연애 관계가 사랑일 수 있다는 주장을 부정하지는 않는다(비록 나는 선험적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이성간의 상호관계 같은 풍부함을 그들이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들의 사랑의 성질은 그들을 정당화하는 데는 불충분하다. 실제로 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과 위배되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과도 모순된다는 것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은 사랑받는 자의 최고의 행복에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인간의 최고의 행복이란 하나님의 율법과 의도의 순종하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지 거기에 반항하는 데서는 아니다.

    어떤 동성애 그리스도인 운동 지도자들은 자신들 상황의 논리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을 위해서라면 일부일처제 조차도 포기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맬킴 마코트(Malcolm Macourt)는 동성애 해방자들의 이상은 "매우 다양한 삶의 형태"인데, 이것들은 "사회에서 동등하게 존중되는 가운데 유지될 수 있다"고 썼다. 그것들 중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선택안을 열거했다. 일부일처제나 복합 교제, 평생 교제나 서로의 성장을 위한 일정 기간 동안의 교제, 동성 상대나 이성 상대, 공동체 속에서의 삶이나 작은 가족 단위의 삶 등이다. 사랑의 이름으로 일부 사람들이 정당화되기를 요구하는 데는 한계가 없어 보인다.


    (4) 관용과 복음에 관한 논의


    "물론"일부 사람들은 "동성애 그리스도인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성애적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서로를 받아들이고 실로 환영하라고까지 말했다. 만약 하나님이 누군가를 환영한다면, 우리 중에 누가 그를 심판하겠는가?"(롬14:1)라고 한다. 노르만 피텐거는 더 나아가서 동성연애자를 부인하는 자들은 "기독교의 복음을 이해하는데 전적으로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가 선하고 또 우리의 죄를 고백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계속하기를, "그것은 다른 길로 해서 온다. 먼저 오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의 용서가 우리의 회개를 일깨운다"라고 한다. 그는 찬가를 인용하기 조차 한다. "한번의 청원도 없었는데, 내 있는 그대로를." 그는 덧붙인다. "기독교 복음의 전체적 요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고 받아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의 매우 혼란한 진술이다.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를 "있는 그대로"받아들인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먼저 선하게 할 필요가 없고 실제로 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의 "받아들임"은 그가 회개하고 믿는 자들을 모두 완전히 아낌없이 용서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가 죄 가운데 계속 있는 것을 용서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동료 순례자로서이지 우리 죄를 지속시키기로 결심한 동료 죄인으로서는 아니다. 하나님이든 교회이든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의지에 어긋나게 우리 마음을 강퍅하게 하면 아무도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 다만 심판이 있을 따름이다.


    5. 믿음, 소망, 사랑


    만약 동성연애 행위가 완전한 성경적 계시 하에서는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는 넓은 범위 안에서의 변형이 아니라, 하나님의 규범으로부터의 이탈로 여겨져야만 한다면, 그래서 우리는 동성애적 정향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동성연애 행위와 교제를 삼가라고 요구해야 된다면, 우리는 이런 요구에 그들이 응하는 것을 장려하기 위해서 어떤 충고나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나는 바울의 믿음, 소망, 사랑의 세 요소를 택하고 싶다. 그래서 그것을 동성연애적 정향이 있는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싶다.


    (1)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필요성


    믿음이란 신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첫째, 믿음은 하나님의 기준을 받아들인다. 이성간의 결혼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적 금욕 뿐이다. 나는 이것의 의미를 알 것 같다. 동성연애자들의 독신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는 알렉스 데이비드슨(Alex Davidson)의 감동적인 책 『사랑의 회복』(The Returns of Love) 만큼 내게 도움을 준 것이 없다. 그는 "율법과 욕망 사이의 이 끊임없는 긴장." "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괴물," "이 격심한 고통"에 대해서 썼다.

    세속에 있는 사람들은 말한다. "성이란 인간적 성취에는 필수적인 것이다. 동성연애자들이 동성연애 행위를 중단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그들을 좌절시키고 그들을 신경질환, 절망, 심지어는 자살로까지 몰고가는 일이다. 어떤 사람에게 그에게 있어서는 정상적이고 자연스런 성적 표현의 양식을 부인하라는 것은 매우 난폭한 일이다. 그것은 '비인간적이고 잔인하다.' 실제로 그것은 몹시 잔혹한 일이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은 다르다. 성적 경험이 인간적 성취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확실히, 그것은 하나님의 훌륭한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며, 인간성에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니다. 바울의 시대엔 그것을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어는 "위를 위한 음식과 음식을 위한 위 육체를 위한 성과 성을 위한 육체"(고전6:13)였다. 그러나, 이것은 악마의 거짓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독신이었지만 인간성은 완전하였다. 게다가 하나님의 명령은 선한 것이지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멍에는 휴식을 가져다 주었지 소란함을 가져다 주진 않았다. 갈등이란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에게만 온다.

    따라서 그것은 믿음의 근본적 갈림길이다. 우리는 누구를 믿는가? 하나님인가, 세상인가? 주 예수님께 굴복하겠는가, 우세한 문화의 압력에 무릎 꿇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정향"은 체질(호르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선택(감정, 정신, 의지)에 의한 상태이다.

    둘째로,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인다. 금욕이란 훌륭한 것 뿐만이 아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독신을 요구하신다면, 그것은 가능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부인한다. "당신도 성적 충동의 절박한 위력을 아시잖소"라고 말이다. "우리에게 자신을 억제하라고 하는 것은 거의 소용이 없다. 그건 불가능에 가까워서 거의 이야기할 가치도 없다"고 노르만 피텐거는 썼다.

    정말인가? 그러면 우리는 남창과 동성연애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하리라는 바울의 경고 뒤에 계속되는 그의 진술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6:11)라고 그는 외쳤다. 그리고, 우리는 독신으로 사는 수 백만의이성애적인 사람들에게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확신컨대, 모든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투쟁과 외로움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스도인을 자칭하는 우리들이 순결이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것은 현대 사회가 성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더욱 어렵게 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세속의 그럴 듯한 논의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 연민에 빠지고, 우리의 상상력을 음란 영화와 같은 것들로 채우고, 그래서 그리스도가 주가 아닌 환상의 세계에 살며 또 우리의 눈을 뽑아내고 손과 발을 잘라내라는 그의 명령, 즉 유혹의 수단에 가혹하게 대처하라는 명령을 무시한다면, 우리 스스로 그것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든 그리스도는 바울에게 찾아가서 말씀하길,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6)고 하신 것처럼 우리를 찾아오신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세속, 육체와 악마의 가련한 희생물로 묘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에 위배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의 필요성


    나는 지금까지 동성연애자들의 "치료"에 대해선 전혀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치료란 전제 같은 것이 아니라 성적 경향을 완전히 역전시키는 것이라고 이해했었기 때문이다. 이런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주로 동성애적 성질의 원인에 대한 이해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선 아직 최종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웨스트는 "동성애적 성질의 원인에 대한 조사는 수많은 미해결의 수수께끼를 남겼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견해에 의하면 "어린이는 같은 성이나 혹은 다른 성을 향하는 구체적인 성 본능을 안고 태어나지는 않는다.다른 성에 대한 전적인 편애는 후천적인 특징이다……."

    이성간의 욕구의 배출구가 없고 문화적인 압박 속에서는 많은 비율의 사람들이 동성애적으로 행동한다(적어도 할 수 있게는 된다)는데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한다. 실제로, 물론 유전적 인자나 성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상황은 "유전"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학습"에 의한 것이다. 일부의 사라믈은 그것을 어머니의 사랑이 제거되거나, 성적 성장의 억제 같은, 어린 시절의 상처를 남기는 충격적 경험에 그 원인을 돌린다. 그럼 만약 그것이 학습된 것이라면, 그것을 잊어버릴 수 없을까?

    하나님의 은혜나 능력에 의한 변화의 가능성도 역시 개개인의 결심의 강도에 달려 있으며, 이것 자체는 또다른 요소에 의존한다. 성욕이 불확실한 사람은 강한 영향과 강한 동기가 있다면 쉽게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조사자들은 체질적인 동성애성은 바뀔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웨스트는 "알려진 어떤 치료법이나 벌로도 동성연애 행위를 하는 엄청난 무리를 실질적으로 감소시킬 희망은 없다"고 했다. "사회에서 그들의 위치를 찾아주는 것이 더 현실적"일 것이다. 그는 "장려를 위해서는 아니지만," 동성연애 행위에 "관용"을 베풀어줄 것을 호소했다. 다른 심리학자들은 더 나아가서 동성애가 더 이상 병적상태라고 여겨져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치료받지 않은 채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1973년 미국 심리학 협회의 의원들은 동성연애를 정신질환의 범주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나, 이런 견해들은 세속화된 지성들의 좌절된 견해가 아닐까? 그리스도인들은 동성연애 상태가 하나님의 규범으로부터 이탈된 것으로 창조된 질서의 표시가 아니라, 타락한 무질서의 표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묵인하고 또 고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유일한 문제는 신의 구제와 회복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까를 기대하는 것 뿐이다. 사실은 비록 그리스도인들은 갱생을 통해서든 성령의 계속되는 역사를 통해서든 동성연애가 "치료"되기를 요구하지만, 그것들을 구체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마틴 할렐(Martin Hallett)은 개종 이전엔 동성애 장면에 적극적이었는데 후에 동성연애와 이와 관련된 문제애 대해 각 종파간의 훈계와 상담사업인 "진정한 자유 신앙"(True Freedom Trust)을 찾았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르침』(Testimonies)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행했다. 그 안에는 동성연애 그리스도인 남성과 여성들이 그리스도가 자신들에게 베풀어준 일에 대해 증언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서 새로운 자기 자신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새로운 개인적 성취의 의미를 찾아냈다. 그들은 하나님의 관대한 받아들이심에 의해 죄와 수치와 두려움으로부터 구제되었으며 성령의 내제하는 능력에 의해 이전의 동성연애 행위의 속박으로부터 풀리워졌다. 그러나, 그들은 동성애적 정향으로부터는 구제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약간의 내적인 고통은 그들의 새로운 기쁨과 평안 곁에 계속된다. 여기 두 가지 보기가 있다. "내 기도는 내가 원했던 대로 응답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에게 당시의 나를 기꺼이 받아들여 주는 두 그리스도인 친구를 주시는 큰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손을 얹고 기도를 받은 후에 도착의 증상이 사라졌습니다. 나는 그날 저녁 내가 얻게 된 구제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나는 동성연애 행위로부터 3년이 넘는 자유를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곧 이성애로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정향에는 실질적인 변화의 희망이 없는가? 엘리자베드 모벌리 박사(Dr. Elizabeth Moberly)는 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연구에 의해 "동성애적 정향은 유전적 기질과 호르몬의 불균형 또는 비정상적인 학습과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부모-자녀 관계의 어려움들 특히 어린 시절의 어려움들 때문이다"라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그녀는 계속하기를 "기초적인 원칙은 동성연애자는-남자든 여자든-동성의 부모와의 관계에서 일종의 결핍을 겪었었다. 그래서 같은 성, 즉 '동성연애적'관계를 매개로 이런 결핍을 보상하려는 상대적 욕구가 있다." 결핍과 욕구는 공존한다. 동성간의 사랑의 배상욕구는 그 자체로는 병적인 것이 아니다. "정반대로-그것은 병적인 것을 치료하고 해소하려는 노력이다." "동성애적 상태는 비정상적인 욕구가 포함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욕구가 보통 성장과정에서 비정상적으로 충족되지 못한 채로 있었다." 동성연애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발전상태"며 충족 못한 욕구의 상태다. 따라서 적절한 해결책은 "성적 행위 없이 동성간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장과정의 결핍을 성욕화 하는 것은 정서적 욕구에 생물학적 충동을 혼란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이런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 이 욕구는 정당하다. 그러나 그것을 충족시킬 정당한 방법은 무엇일까? 모벌리 박사의 대답은 "부모의 애정을 대체할 수 있는 관계는 마치 부모와의 관계가 창조의 계획 속에 있었듯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 있다." 필요한 것은 깊고, 사랑스럽고, 항구적이고, 같은 성(性)간의, 그러나 성적이지는 않은 교제, 특히 교회에서의 교제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기도에서나 교제에서나 사랑이 기초적인 치료법이다……사랑이 근본적 문제며, 커다란 욕구며, 유일하게 진정한 해결책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치료해 주시고 구제해 주시는 사랑을 구하고 계획한다면, 동성연애의 치료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현실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신체와 정신과 영혼의 완전한 치료는 살아 있는 동안엔 일어나지 않은다. 어느 정도의 결핍과 무질서는 우리 모두에게 남는다. 그러나, 영원히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지평은 이 세상 안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는 다시 오신다. 우리의 몸은 구제받을 것이며 피, 고통, 죽음은 제거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와 우주는 변형될 것이다. 그 때는 우리의 인격을 더럽히고 왜곡시켰던 모든 것으로부터 결국 해방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독교적 확신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현재의 고통도 참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왜냐하면, 고통도 평안한 상태 속에 있기 때문이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2). 따라서 우리의 탄식은 새로운 시대의 출생의 고통을 표현한다. 우리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는 것을 믿는다. 이런 확신이 우리를 지탱케 한다.

    알렉스 데이비드슨은 그의 기독교적 희망으로부터 동성적 기질 가운데서도 위안을 얻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하늘을 바라볼 때, 거기에도 마찬가지로 도달할 수 없는 길이 무한정 계속되어 보이는 것은, 이런 상황으로선 가장 견디기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아닐까요? 거기에 아무런 지표도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는 당신은 반항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한계도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는 좌절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제가 좌절이나 반항심 혹은 두 가지를 다 느낄 때, 언젠가는 그것이 끝날 날이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할 때면,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3)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필요성


    현제로서는 우리는 "시간 사이에" 살고 있다. 믿음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은총과, 소망 속에 기대하는 영광 사이에 살고 있다. 그것 사이에 사랑이 있다.

    그런데도 교회는 일반적으로 동성연애자들에게 바로 이 사랑을 보여주지 못했었다. 짐 코터(Jim Cotter)는 "경멸과 모욕, 두려움, 편견, 그리고 억압의 대상"으로 취급된 것에 대해 심한 불만을 표했다. 노르만 피텐거는 그가 받은 "꾸짖음"의 서신을 묘사했는데, 그 속에는 그리스도인을 자칭하는 사람들로부터 조차도 동성연애자들은 "추잡한 것들," "혐오스런 변태들," "저주받을 죄인들"과 같이 취급되고 있었다. 사회 해설자 삐에르 베르통(Pierre Berton)은 "동성연애자들은 현대에는 문둥병자에 해당된다는 사정이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릭터 노턴(Rictor Norton)은 그보다 더 날카롭다. "동성연애자에 관한 교회의 기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잔악한 행위이다. 우리가 사함을 구할 것이 아니라 교회가 보상을 해야 한다."

    동성연애에 대한 개인적 적대감의 자세는 최근에는 "동성연애 공포증"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비이성적인 공포, 증오와 격한 반동의 혼합체다. 그것은 동성연애자들의 다수가 그들의 사정에 책임이 없다는 사실(물론 그들은 그들의 행위에는 책임이 있지만)을 간과한다. 그들은 고의적인 변태자는 아니므로 우리의 이해와 동정을 받을 만하며(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선심쓰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하지만) 거부를 받아선 안된다. 리차드 러브레이스(Richard Lovelace)가 "이중의 회개"를 요구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즉, "동성연애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행동적인 삶의 양식을 단념해야 하며," "직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동성연애 공포증을 버려야 한다." 데이비드 엣킨슨(David Atkinson) 박사는 "우리는 그리스도인 동성연애자들에게 독신이나 혹은 관계의 확대도 마음대로 재촉할 수는 없다. 만약 진정한 사랑 속에서 전자에 대한 도움과 후자의 기회를 얻을 수 없다면 말이다" 라고 했다. 나는 동성애 그리스도인 운동에 속하는 이른바 "선교적 교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운동 자체의 존재가 교회에 대한 불신임의 결의라고 생각한다. 동성연애 상태의 핵심에는 깊은 고독과 자연스런 인간의 사랑에의 굶주림, 자기 주체성의 탐고, 그리고 완전성에 대한 갈구가 자리잡고 있다. 만약 동성연애자들이 이런 것들을 그 지방 "교회가족"속에서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런 표현을 계속 사용할 자격이 없다. 선택의 여지는 동성애적 교섭의 따뜻한 육체관계 아니면 냉대 속에 고립의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 선택의 길이 있으니, 그것은 사랑과 이해와 관용과 원조의 기독교적 환경이다. 나는 동성연애자들이 그들의 성적 정향을 누구에게든 밝혀야 한다고 강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필요없을 뿐 아니라 도움이 되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그들 자신을 털어놓을 수 있고, 그들을 비난하거나 거부하지 않으며, 우정과 기도로써 그들을 도와줄 친구가 한 명은 꼭 필요하다. 그들은 아마 전문적이고 사적인 충직한 목자의 충고를 베풀 수도 있을 것이고 그에 덧붙여 전문적으로 지도되는 치료원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며, 양성의 사람들로부터 많은 따뜻하고 애정이 찬 우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성(性)간의 우정은 마치 성경상의 룻과 나오미, 다윗과 요나단, 바울과 디모데와 같이 장려되어야 한다. 이들에겐 애욕적인 의미에서 동성애적이었다는 암시는 조금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현저하게 애정이 넘쳤으며(적어도 다윗과 요나단의 경우엔) 겉으로 드러날 정도였다. 물론 지각있는 안전장치가 중요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아프리카나 아시아 문화에선 당황하지 않고 두 남자가 손을 잡고 길을 걷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 서구 문화는 "기괴한"것으로 조소당하거나 거부당할 두려움이 일어나서 동성간의 풍부한 우정의 발전을 금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런 관계는 동성간이든 이성간이든 보편적이긴 하지만 지역적 한계를 갖는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발전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모든 지역교회가 따뜻하고 관용적이며, 원조적인 공동체가 되길 의도한다. "관용"이란 것은 "묵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동성연애 공포증"을 반대한다고 해서 동성연애 행위에 대한 적절한 그리스도인들의 거부조차 반대하는 것이 아닌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다. 진정한 사랑은 도덕적 기준의 유지와 위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회개를 거부하고 의도적으로 동성연애 행위를 고집하는 교인들의 경우에는 교회에서 징계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겸손하고 온유한 심령으로 시행되어야 한다(갈6:1). 우리는 남자와 여자 혹은 동성이나 이성간의 죄를 차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공공연한 추문의 경우, 필요한 징계가 마녀 색출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동성연애 그리스도인들의 고민이 아무리 난처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그 남자 혹은 여자에게(아니 우리 모두에게) 믿음, 소망, 사랑을 요구한다-믿음이란 그의 기준과 그들을 지키는 은총에 대한 믿음이며, 소망은 현재의 고통 너머 미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이며, 사랑은 서로를 돌보고 조력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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