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 셈법: 당신도 나처럼 할 수 있다!
조충연 프란시스
그렇다. 분명히 교회 안에서 돈의 문제를 다루기란 무척 곤란하게 여겨진다. 마치 성(sex)에 대한 교회의 태도처럼 돈의 문제를 드러내놓고 말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하고, 마치 세리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스스로를 깎아먹는 아주 속된 일처럼 보인다.
봉헌에 대한 글 요청을 받고 생각을 정리하기 쉽지 않았다. 아마도 교회에 대한 어떤 자격이나 열심의 정도, 헌신의 깊이를 봉헌의 정도와 동일시 하는 것으로 떠올리게 되고 그것이 내가 이런 얘기를 할 자격이 있나하는 것으로까지로도 비약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 봉헌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면서 갖게 된 십일조에 대해 변화된 생각과, 나와 공동체의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고민들을 그대로 밝힐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속 안에서 성과 권력, 돈의 문제와 직접 대면하지 않고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개인적인 문제제기에서 출발한다.
이제 다시 독자에게 질문하고자 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십일조를 하십니까?
십일조에 관련해 종교세에 얽힌 문헌이나, 율법으로 강조된 신구약의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딱히 그 기준은 고정되어 있지 않아 보인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만나본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각자의 형편이나 선교적인 관점에 따라 여러 형태의 십일조 방식을 고민해 왔다는 것에 새삼 놀라왔다.
당장 떠오르는 생각부터는 반드시 십 분의 일이어야 하는가이다. 15분의 일이면 안되는가? 혹은 십 분의 이, 삼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소득을 기준으로 할 때 세전이냐 세후 어떻게 정해야 하는 걸까? 빚은 제외해야 하는가? 빚이 많아 소득을 넘어선다면 안해도 되는가? 다른 곳에 후원하는 것을 십일조에 포함시킬 것인가? 내가 누군가 어려운 주변의 사람들을 위해 금전적으로나 혹은 시간과 노동을 동원했다면 이미 십일조를 한 것은 아닐까? 등등
정말로 매달 십일조로 머리가 복잡해지며 고민에 빠질지 모른다. 어떻게 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나의 소득의 십 분의 일을 봉헌하는 것이 일면 가장 속 편한 셈법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편안하고 굉장히 신실해 보일거라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각자에게 맞는 굉장히 복잡한 셈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어려운 셈법을 정말 열심히 잘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물론 이 글이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에 국한된 경험일 지 모르겠지만 독자들 개개인의 치열한 셈법을 위해 새롭게 시작한 작은 공동체인 ‘질그릇 교회’의 봉헌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보면 어떨까 한다.
대부분의 성공회 개교회 들이 교회 건축, 구제에 대한 일정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위해 기도와 십일조의 일정 부분, 특별 헌금을 통해 봉헌하고 있다. 그것과는 대비되어 질그릇 교회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이라면 특별한 대단위의 목표를 세우지 않고 오히려 작은 공동체만의 고유한 선교 방식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 그것을 위해 적절한 재정계획을 세우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질그릇 교회는 건축을 하지 않기로 했으며(그럴 수도 없거니와), 일반 구제보다는 ‘삶으로의 파송’ 이라는 선언으로 각자가 자기 생활의 영역에서 주변과 이웃을 살피고 혹은 이웃을 발견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선교모델을 찾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주일 헌금이나 특별한 감사헌금은 없고(전례 안에서 봉헌은 없으며 대신에 각자가 내려놓고자 하는 바를 적어 단지에 넣는다), 오직 십일조와 지원받은 선교기금으로 이런 선교방식에 필요한 재정을 보전하고 지원하고 있다.
이로써 ‘질그릇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각자의 선교의 방향을 설정하고, 그것에 필요한 재원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요청하고 공동체 안의 회의를 통해서 충분히 지원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봉헌된 재정적 지원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공동체 각자가 서로를 위해 고민하거나 셈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머리 아픈 셈법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맴버쉽은 교회에 대한 일정한 봉사와 헌신의 시간으로 정량화해서 획득되기보다는, 선교적 삶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삶의 일정 부분을 구체적으로 내려 놓는 것으로 내면화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십일조를 통해 쌓여진 재정은 대체적으로 성직자 사례와 공간 및 애찬 등의 경상비에 1, 신자 양육과 주일학교 어린이 교육에 1, 신자들 개인이 펼쳐 갈 선교방식에 따른 지원에 1씩 각각 1:1:1의 운영 비율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물론 쉽지않은 이 비율을 유지시키기 위해 관할 사제는 사제로서 신자들과 함께 스스로 세상에 파송되어져 반자급하면서, 외부의 다른 일을 통해 일반적으로 재정의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사례금의 반을 보전한다. 거기다 또 다시 십일조를 봉헌한다. 성직자의 셈법은 평신도의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해 보인다. 하느님은 세리만큼 지독하신지도 모르겠다.
교무구나 교구의 평신도 회의에 참석했을 때에 종종 어렵게 비밀 얘기하듯이 십일조에 대한 독려를 듣게 된다. 십일조에 대한 애초의 신실하고 솔직한 대화는 엇나간다. 그때마다 매번 마음 속으로 드는 아쉬움은 십일조를 통해 신자들 각자에게 중심이 된 선교적 삶의 방향이 길을 잃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논의의 방향이 고작 교회의 자립을 위한 십일조 액수를 계산하거나, 또는 그것을 위해 몇 명의 신자가 필요하다는 양적 성장의 선교목표를 세우는 이상한 셈법이 되고 만다. 십일조만 잘 걷히면 교회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는가? 십일조 할 수 있게 자기의 삶이 나아졌으면 하고 기도하는 것은 온당한가? 가난한 사람은 어떤 십일조를 할 수 있을까?
십일조를 둘러 싼 이런 저런 복잡한 셈법이 교회에 대한 헌신을 나름대로 가늠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헌신과 내려놓음에 대한 상상력은 더 깊어지리라고 기대해본다. 권력과 성에 대해 최근의 교회가 직시하고 적극적으로 대면하듯이, 돈에 대한 문제를 두고도 교회와 공동체 안에서 더 세심하고 솔직하게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으로 교회 공동체에 어떤 선교가 필요한지 또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새로운 이웃은 누구인지를 더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적어도 십 분의 일이라도 자신의 가진 것을 내려 놓으라는 가르침에 대해서 그 전에 가졌던 것보다 훨씬 나은 셈법으로 대답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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